…그러므로 유럽이 유라시아의 나머지 부분과 동등한 대륙이라는 생각을 조장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1) 유럽 '대륙 전체'를 언급하지 말고 대신 유럽 '본토' 혹은 유럽 '반도 전체'를 언급하고 (2) 러시아 가운데를 통과하는 의미없는 경계선을 그려 놓은 지도들을 쓰지 말고 (3) '아시아적'이라는 말이 마치 '유럽의' 혹은 '미국의'라는 말들처럼 특별히 구체적인 특성을 지칭하는 듯이 쓰지 말고 (4) '아시아'나 그 하위구분들에 대해 우리가 하는 말들을 잘 살펴서 혹시 유럽과 그 하위구분들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피해야 할 또다른 어법은 '동'과 '서'가 세계문명의 상호보완적인 반쪽인 듯이 말하는 것이다. '동방의' 혹은 '동양의'라는 말보다 우스꽝스러운 것이 있는가? 우리는 알제리와 러시아에서 자바와 일본까지의 모든 것, 즉 유럽적이지 않은 거의 모든 것을 이런 어휘들로 뭉뚱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단일한 '서구의' 문명과 비슷하게 단일한 문명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은 명백하다.
 간단히 살펴보기만 해도 '동방'의 적어도 세 개의 거대한 문명들은 각각 유럽과 다른 것만큼이나 서로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전략에 대한 최신 유행 서적에서든 일본을 깔보는 논리에서든, 혹은 '동양적인 여성의 격리'나 '동양적인 삶의 곤고함' 같은 일반화된 성격 부여, 혹은 다른 어떤 '동양적인' 특성에서 보이는 것이든, '동방'이나 '동양'이라는 어휘의 용례는 거의 대부분 그 위험성을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동은 동이고 서는 서'라고, 그들은 절대로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일은 단지 "동방은 우리만큼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이 아니다. 동방이 유럽의 나머지를 채우는 단일한 문화적 실체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1) 이런저런 특성을 '동양적'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비록 그런 일은 드물겠지만 어떠한 현상이 모든 '동방' 지역에 적용되고 '서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치밀한 연구로 밝혀내었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언급은 서구가 '동방' 전체의 총합과 동등하다는 관념을 뒷받침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2) '동방'이나 '동양'이라는 어휘는 애매하므로 절대로 쓰지 말고 그 대신 극동, 인도, 근동, 아프리카, 중국 등의 어휘를 쓰자. (3) '서구', '서양' 등의 어휘를 쓰는 데 극히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4)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의 신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만약 필요하다면 그 대신 '자기 문화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라.

 - 마셜 호지슨,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 유럽, 이슬람, 세계사 다시 보기』, 사계절, 2006, 82-84쪽.


 어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 자체에서는 아무래도 책이 출간되고 시간이 좀 흐르다 보니 생각보다 참신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참고로 제가 이전에 '전통 잡상'이라는 글에서 송대 중국에 석탄을 이용한 산업혁명의 조건이 갖춰졌다는 주장을 소개했는데, 바로 그 주장을 한 사람이 마셜 호지슨입니다) 하지만 몇몇 행동 지침에 대한 권고를 담은 문장들을 읽다 보면 개인적으로도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 많군요. 저는 의식적으로 가급적 서양/동양의 이분법을 쓰지 않으려 했고, 꼭 사용해야 한다면 지리적 경계에서만 사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저 역시도 무의식적으로 그 수준을 상당히 넘나들었던 것 같네요.

 다만 저는 호지슨의 주장 중 '근동'이나 '극동'을 사용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용어 자체가 이미 (서구에 가까운) 동방, (서구에서 먼 극단에 있는) 동방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호지슨은 극동에 대비하여 '극서(far west)'라는 용어를 제안하지만, 별로 인기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저는 '근동/중동'보다는 '서아시아/서남아시아'를, '극동'보다는 '동아시아/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를 적절히 섞어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