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와 기독교 그리고 아함경과 관련된 글을 한번 써볼까 했는데 그 전에 이 문제(종교에서 신과 법의 문제)를 먼저 언급하고 넘어가는게 좋을 듯 싶네요.

 

신이냐 법이냐? 여기서 신은 인격적 성격이 강조되고 법은 비인격적 성격이 강조된다는 점을 우선 언급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게 분리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기독교(그 밖에 이집트 유대 수메르 이란등 근동 지역의 대부분의 종교)는 신을 강조합니다. 불교는 법을 강조하구요. 힌두교에서는 베다시대에서 우파니샤드의 시대로 옮겨가면서 신-->법으로 그 중심추가 이동해 가구요.

 

결국 종교의 뿌리는 3개로 나누면 신 강조중심의 근동, 신과 법이 혼재되어 있는 인도, 법 중심의 동아시아 이렇게 대별해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에 어느정도 영향을 준 것 같구요 나아가 조로아스터교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비로자나불(=창조주)에 영향을 미친 듯 보여요. 특히 구약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섬겼던 그러면서도 다신론적인 색채가 강했던 고레스가 여호와를 섬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불교의 비로자나불로 대표되는 창조주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의 지극히 다신교적인 색채가 일신론적 색채로 바뀝니다. 다만 그 일신론이 붓다의 법으로 수렴되어 법이 더 중요하게 되구요.

 

반면 힌두교는 지극히 다신교적이고 개인중심적이고 소승불교와 매우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원래 범신론적인 색채가 강해 다신론적 성격이 강했지만 결국 신이 삼신론적 일신론으로 정리되어가고(이것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일지도 모름) 우파니샤드철학에 와서는 인격적 신이 점점 관념적 신으로 바뀌어 갑니다. 나아가 베다적 논의에서도 브라흐만과 브라흐마처럼 인격신적 성격과 법적인 성격을 공유해버립니다. 그럼에도 인도의 경우는 매우 다신교적인 그런 흐름이 현실에서는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몇몇 소수의 엘리트에 한해서 소승불교적인 수행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의 여러 기적이야기나 요한복음의 신학적 사고를 제외한 순수한 예수의 어록을 볼 수 있는 도마복음은 지극히 법구경이나 기타 불경에 보이는 시와 같은 구절이 매우 많습니다. 나아가 지극히 역설적인 메시지로 가득차 있구요.

 

이런 관점에서는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대승불교는 매우 깊은 영향관계가 있지 않나 요즘 생각이 듭니다. 반면 다신교적인 색채의 수메르종교나 힌두교 소승불교는 또 서로 비슷한 면이 많구요. 다만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는 신이 더 강한 반면 대승불교는 법이 더 강하고 힌두교나 수메르 종교는 다신이 더 강한 반면 소승불교는 법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이해의 측면에서 보면 서구적인 전통은 직선적 시간관(최후의 심판)면 동양적 전통은 순환적 시간관(윤회)는 점이 있습니다.

 

각설하고 종교에서 신과 법의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죠.

 

우선 기독교적인 논의를 보도록 하죠.

 

창세기 1장과 2장 자체가 1장의 신은 인격적 속성이 있기 합니다. 즉 좋았더라 이런 표현이 그렇죠. 더구나 창조 자체가 이르시되 이렇게 표현하므로써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2장에 나오는 인격적 속성보다는 더 적습니다. 더구나 인간을 흙으로 만들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하므로써 상당히 대조를 보입니다.

 

즉 상대적이지만 1장은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므로써 법적인 속성을 강조해요.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이 말씀 자체가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하구요. 그 결과 1장은 법의 속성이 강조됩니다. 나아가 예수의 신성은 곧 말씀의 신성과 연결이 됩니다. 예수가 자기 살을 먹고 마시라고 하는 것도 말씀을 먹고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아라라는 의미가 아닐까 해요. 즉 말씀을 먹는다는 건 결국 법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이른바 거듭남과 연결이 되죠. 그리고 그 뒤에 계속 회개하고 죄를 씻는다는 것은 이른바 성화되는 것과 관련되구요.

 

반면 창세기 2장에서는 신이 구체적으로 흙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생기를 그 코에 넣어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인격적 의미를 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격적 의미는 보통 지 정 의라고 보는데 즉 인간이 기도하는 것을 듣고 반응한다는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예수)과 믿음의 관계는 자력구원이나 타력구원이냐의 문제로 다시 변환이 가능해요. 그래서 기독교역사에 어거스틴(칼빈) VS 펠라기우스(아르미니우스)의 끊임없는 대립이 여기서 오는거구요. 그런데 아무래도 신을 강조하는 그들 문화의 성격성 어거스틴(칼빈)이 주가 될 수 밖에 없었을 듯 싶어요. 그리고 극단적 칼빈주의로 대표되는 이중예정론은 신만을 강조하는 그래서 신이 곧 악의 창시자로 오해할 수도 있게 만드는 그런 매우 극단적 이론이지 않을까 해요.

 

암튼 기독교의 바울서신에 보면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은 날로날로 성화되어 간다는 것 자체가 말씀으로 깨닫기 전에는 겉사람만 있다가 깨닫은 후에는 그 겉사람을 죽이고 새로 창조된 속사람으로 산다는 의미라고 보여집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신을 강조하는 체계에서는 그 주도권이 상대적으로 신에게 있다고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불교적인 논의도 사실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데 결국 이건 법을 깨닫는다는 것이고 결국 오염된 마음이 정화된 마음으로 거듭난다는 것과 연결이 되죠. 이 거듭남이 돈오일 수도 있고 점오일수도 있다 머 이런 논의가 있잖아요. 나아가 마음의 모든 더러움을 씻는 것은 법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게 가능하니깐요. 이거 수양의 문제이구요.

 

사실 내 마음에 더러운 자아를 죽이는 것은 사실 피 흘리는 것과 같은 아픔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이것은 자아를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죽이는 것과 서로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해여. 물론 유식학적인 관점에서 말라식(자아의식)의 작용으로 인해 더러워지고 왜곡된 업장이 저장되어 있는 아뢰아식을 개끗게 하는 것과 이게 별반 다르지 않거든요.

 

그런데 불교에서도 비로자나불로 대표되는 창조주 비슷한게 있잖아요. 그리고 이 비로자나불은 어느정도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의 법신불로 여겨 집니다.(즉 석가모니가 비로자나불의 화신) 그리고 우파니샤드철학의 영향일지 모르나 이 비로자나불이 곧 다르마 즉 법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요. 이건 기독교에서 예수를 바라볼때 신=말씀이라고 보면서도 동시에 인격적인 인자로 보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불교 자체가 자성을 부정하는 논리가 강하다 보니 인격적 신으로서의 관점보다는 법이라는 측면이 훨씬 강조되는 흐름으로 갔구요. 그 결과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입각해 법을 깨닫고 수행을 해가는 점이 강조되었죠. 물론 여기서도 믿음은 중요합니다. 다만 이때 믿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참이라는 믿음이죠.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중심적인 것이 되다보니 자연히 그 법을 인간이 수행을 통해 깨닫아가는 것이 부각되게 됩니다

 

즉 기독교처럼 신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체제에서는 이른바 깨닫아 변화되는 과정에 신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보게 되는 반면 불교처럼 법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체제에서는 이른바 깨닫아 변화되는 과정에 인간편에서의 수행해가는 과정을 중요시하게 된다는 거죠.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역할이 배제된다면 극단적 칼빈주의처럼 신이 악의 창시자가 되어버리고 인간의 책임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의 역할을 상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고 불교에서도 인간이 수행해간다고 하지만 결국 인연법으로 얽혀 있는 세상에서 나 홀로 수행이 가지는 의미만을 취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아미타불에 의한 타력구원도 수용하게 되죠.(물론 결국은 극락에서 자력구원을 해야 하지만) 나아가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행을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법이 가지는 궁극적 주도권은 존재한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지나치게 인간의 관점을 강조한다면 결국 자의식만을 높히게 되므로 오히려 말라식만 강화시켜 오만과 독선만을 키울 염려가 있지요.

 

즉 기독교의 신 중심 사고는 신의 주도권을 통해 인간의 교만과 자아의식을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신이 악의 창시자가 되어버리는 등 논리적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나아가 극단적으로는 특정신만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론으로 흘러가면서 구원론 자체가 무슨 사이비교주의 그것처럼 독선적이게 될 가능성이 다분한 반면 불교처럼 지나치게 법 중심으로 사고 하다보면 인간이 주도권을 잡게 되어 깨닫는 다는 것이 자성이 없다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인데 오히려 자아의식을 죽이지 못하고 말라식에 의한 망상식만 키우는 문제만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대승불교의 경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과 말라식을 부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때 자력으로 뭘 이룬다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반대승불교적인가 하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깨닫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또 인식해야 하구요.

 

참고로 드루몬드는 불교의 인간론을 기독교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극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영적 이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천지의 창조자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피조 세계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믿는 우리들의 신앙의 결과로서 우리는 석가의 교훈에서 비쳐진 자아의 회심에 깊은 존경과 이해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의 역사는 석가의 생애와 교훈에 역사하였음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 이해와 윤리적 성질의 실천은 선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역사를 떠나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초합리성 영역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설명을 정리하면

 

신과 법의 문제에서 신을 강조하느냐 법을 강조하느냐는 진짜 진리의 세계에서는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보고 그 십자가 공적을 자랑할 것이고 불교는 법 자체를 자랑할 겁니다. 그 결과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타력구원으로 불교적 세계관은 자력구원을 강조한다고 하나 이것 자체가 피상적인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진짜 중도가 필요할지도 모르죠.

 

이렇게 신과 법의 문제를 이해하면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대승불교가 매우 유사한 면이 있고 반면 수메르종교 힌두교 소승불교가 매우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어느 종교나 기복적이고 샤머니즘적 요소는 모두 존재합니다. 당장 살기위해 신을 찾고 법을 찾는 그런 것인데 모든 인간에게 또 다 존재합니다.

 

기독교도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의 영향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수메르 종교와 싸우면서 그러면서 어느 면에서는 영향을 받으면서 일신론의 뿌리를 만들고 거기에 조로아스터교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등장으로 완성된 것이구요.

 

불교 특히 대승불교는 힌두교와 싸우면서 그러면서 어느 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신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기독교는 신을 강조하고 대승불교는 법을 강조하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곧 법이고 법이 곧 신이라면 이 양자의 차이는 어느 면에서는 해소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시간관과 역사성 그리고 특유의 몇몇 교리는 여전히 차이점으로 남지요. 그리고 그것 자체가 존중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서로 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뉴에이지적인 통합종교를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고등종교와 저등종교가 어느정도 구별이 있다고 보구요 나아가 각자의 종교가 가지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럼에도 공통적인 요소가 있고 그 공통적인 요소야 말로 어쩌면 신=법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계시이자 초합리적 영역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게 서로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경쟁(?)하는 기반이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