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이야기는 아니고,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래에서 참사랑님께 질문을 드렸던 다음의 논변을 좀 깔끔하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기'라는 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나타날 수 없다면, 개개인에 대해 저마다의 현시 양식 기1, 기2, ...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만약 '기'를 믿는다면 이러한 기1, 기2, ... 중 하나의 유형을 믿게 되겠죠.

2. 또 어떤 사람이 다른 기를 믿는 사람과 서로 기의 유형, 즉 기1, 기2, ... 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비교해서 자신이 믿는 기a와 다른 사람이 믿는 기b를 서로 같은 것, 혹은 다른 것이라 칼로 자르듯이 결론내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컨대 기a를 믿는다고 해도, 기a를 제외한 다른 기의 유형 기x를 믿지 않는다고 믿을 수는 없겠지요.

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기의 유형 기a에 대해서, 기a를 믿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이 사람은 기a를 믿는다고 믿는 것은 아니고, 결국 이 사람은 기a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앞에서 임의의 기의 유형 기x에 대해서, 기x를 믿는다면 기a를 믿지 않는다고 믿을 수는 없으므로, 기a를 믿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기x를 믿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a를 믿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기a를 포함한 임의의 기의 유형에 대해서 그것을 믿지 않아야 합니다. 이때 1에서 이는 '기' 자체를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겠네요.

4. 근데, 참사랑님이 기를 믿으신다면, 적어도 참사랑님이 이건 진짜 기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기의 종류가 한 가지는 있겠지요? 예컨대 참사랑님이 느끼시는 기는, 제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이오씨프 스딸린 대원쑤 동지의 코딱지 맛'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실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런 기 유형을 믿지 않으신다고 믿고 계시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3에서 참사랑님은 '기' 자체를 믿지 않으시는 거네요. 뭐가 틀렸죠?

위에서 제가 사용했던 수법은 '객관성 논증'이라 불리는(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이름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유명한 반회의론 논증을 좀 약한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논증은 아마 고대의 메가라학파(*) 혹은 그에 관련된 철학자가 처음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이 p를 믿는다는 걸 R(p)로 쓴다면,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이 현대적으로 공식화할 수 있습니다.

1. (현시양식이 다를 가능성) R(기) → R(기1) ∨ R(기2) ∨ .... ↔ ∨R(기i) (i∈N)
2. (상호 비교 불가능성) For any n, m∈N(n≠m), R(기n) → ~R(~R(기m))
∴ 결론. ∀a∈N, ~R(기a) → ~R(기).

1, 2의 두 전제와 결론 사이에서 생략된 과정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에 관한 기본적인 논리학적 사실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주장은 다음 세 개입니다.(임의의 명제 p에 대하여)

a. R(~p) → ~R(p)
b. R(p) → R(R(p)) (긍정 내성 공리positive introspection axiom; PIA)
c. ~R(p) → R(~R(p)) (부정 내성 공리negative introspection axiom; NIA)

저는 c의 NIA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원래 주장에서 이것이 사용되는 부분을 생략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사용하면 더 강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죠. 논증의 네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a와 PIA에서, R(~R(기a)) → ~R(R(기a)) → ~R(기a).
[2] 그런데 2에서, R(~R(기a)) → ~R(기n) for any n∈N s.t. n≠a.
[3] 그러므로, R(~R(기a)) → ∧~R(기i) (i∈N) ↔ ~[ ∨R(기i) (i∈N) ] → ~R(기). (원문에서 제가 주장한 건 여기까지입니다.)
[4] 마지막으로 NIA에 의해 ~R(기a) → R(~R(기a)). ∴ ~R(기a) → ~R(기).



* 메가라학파에서 제시한 논증들 중에는 현대적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의 객관성 논증 외에 예를 하나만 들어 보면, 역시 유명한 시제논리에서의 마스터 논증이 있죠.

** 제가 NIA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전 기본적으로 믿음의 적극성 테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예를 들면서 참사랑님께 이걸 믿지 않는다는 걸 믿고 계실까를 물어본 것이구요. 어쨌거나 NIA를 받아들인다면 참사랑님께서 믿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제가 든 반례는 곧바로 적용이 가능하겠죠.

덧붙여, NIA를 처음부터 가정했다면 그냥 위의 a, b를 써서 [1]을 보일 필요 없이 NIA만 쓰면 위 논증이 성립합니다.


p.s.
저도 오늘(6월 24일) 오후부터 대략 29일까지는 어디 나가 봐야 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으니, 대강 오늘 정오까지는 제가 모니터링을 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 29일 사이로 제 글 혹은 덧글에 답변을 해 주시는 분에게는 제가 즉답을 해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돌아오자마자 빠르게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