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고우영, 3부 9권 82페이지

나는 1990년에 고우영의 만화 [초한지]를 보다가 문명이 인간의 의식을 조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느끼는 어떤 가치들은 문명의 조장에 따라 생긴 것이다. 그 조장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로 살아도 좋고, 그 조장을 개무시하고 살아도 좋다. 나는 문명의 조장을 개무시하는 쪽으로 살겠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20년간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1. [초한지] 3부 9권 82페이지의 내용

한나라의 왕이었던 유방은 대군을 거느리고 초나라의 왕인 항우와 싸우러 갔다. 된통 얻어터지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서 형양성(?)에 틀어박혀서 농성하는 중이었다. 항우는 형양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다음 날이면 형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방과 그의 신하들은 모두 죽을 위기에 놓였다. 이 때 장자방이 비책을 내놓는다. '사항계'라고 하여, 가짜로 항복하는 계책이다. 유방으로 가장한 누군가가 항복을 하러 가는 동안 진짜 유방과 신하들은 서쪽으로 탈출한다는 계책이다. 유방을 대신하여 거짓 항복을 할 사람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형양성에 남아서 시간을 끄는 장수 또한 전사할 게 뻔하다. 그럼 누가 이 일을 맡을 것인가? 주가와 종공이 이 일을 맡게 되었다. 신하들은 이 두 사람이 만고의 충신인 것처럼 추켜올린다. 그런 말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주가와 종공은 자원해서 이 임무를 맡겠다는 심정이 된다. 결국 이들은 죽게 되고, 유방과 신하들은 탈출에 성공한다. 고우영은 이 부분을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2.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이었을 때는 충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옛사람들의 행위가 대단히 위대해 보였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도 아름답고 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 [천년여왕]에서 끝에 천년여왕도 암흑행성을 향해서 카미카제한다. 내 의식은 다른 사람의 교육이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3. 1990년 이후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충성을 다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저 문명의 조장에 지나지 않는다. 왕조시대에는 왕을 위해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장려되어, 다들 충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름답고 위대한 행위인 것처럼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자들은 왕정을 부정하고 있으며, 나는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정말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옛날의 충신은 자신의 목숨을 충성보다 가볍게 여긴 것 뿐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살았으니 그런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의식은 아닐 거라고 본다.

4. 충성이라는 가치만 조장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예절도 조장되는 것이고, 효도조차도 조장되는 것이다.

5. [열자列子]에는 가치에 대한 부정이 나온다. 대충 이런 얘기다.

초나라에 유명한 재상이 한 명 있었는데, 세 번이나 재상자리에서 짤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안색이 편안하다. 어떻게 안색이 편안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어떤 사람이 가서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재상이라는 자리가 존귀한 것일까, 내가 존귀한 것일까? 재상자리가 존귀한 것이라면 그건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 그 자리를 얻었건 잃었건 내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존귀한 것이라면, 내가 재상자리에 있건 물러나서 야인이 되었건 내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 쪽이 답인지를 모르지만, 이런 생각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편안히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안색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6. 나는 존귀한 자리라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 ^ ^ 짜~아식들, 문명의 조장에 놀아나는 어린애들이지, 뭐..... 존귀한 자리라는 것은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않는다. 나는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니 그 밑의 교육부총리나 대학총장이나 무슨 장 같은 자리로 내게 권위를 세워 봤자 통하지 않는다. 높은 체하면 할수록 도리어 내게 비웃음을 살 뿐이다.

7. 한편 나도 권위를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존귀한 자리라는 개념은 내게 없지만, 어떤 사람의 성취나 어떤 사람의 노력에 대해서는 평가를 하기 마련이다. 나는 김대중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존경하고 있다. 반김대중광신도들이 김대중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김대중광신도라고 표현하고, 그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용어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김대중광신도라고 불릴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딴 것에 대해서는 권위를 인정한다. 비록 학위는 없더라도 비록 출신대학 브랜드는 별 볼 일 없더라도 나는 말 님이 가진 역량 자체는 높게 평가한다.

8. 문명의 조장에 의해서 생겨난 인식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인식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명확한 기준을 찾기는 어렵다.

9. 나는 왕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목숨을 잃는 충신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더 이기적이어서도 아니고, 내 목숨을 이 우주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도 아니다. 단지 왕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이며, 그저 문명의 조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서다.

10.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존귀함이 없다면, 그건 단순히 일하는 자리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노무현이 대통령자리를 탐내고 추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대통령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 그 자리가 존귀해서 탐낸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