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년 평생 원이 아파트 벗어나는 것이라 월 300만원 정도씩 통장에 넣어주기로 했다. 지금 사는 주공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라 시설도 괜찮고 한데 그래도 시골 사람이라 단독 주택에 사는 게 마음을 편케 해주니까. 동물도 키우고 텃밭도 가꾸고. 


그이가 내가 보낸 신호를 잘 감지 못하는 것은 그이가 세상의 온갖 전파에 시달려 눈이 흐려져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탓이다. 얼마간 보태주랴 했더니 그럴 것까지는 없고 1년 6개월 무이자 대출 방식이 좋댄다. 나야 뭐 속으론 좋지. 그냥 달라는 말도 아니고 2년 후에 땅 살 때 돌려준다는데. 중요한 건 그네 입에서 저 말들이 먼저 나왔다는 거.


알고 지내는 과일 선별기 업체 사장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는 말이 사기치는 사람들, 남들 덤태기 씌우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랬겠느냐, 다들 알고 지내는 사람들한테 사기 당하고 세상 사람 못 믿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힘이 드니까 에라 남들도 하는데 나도 그런 식으로 나간댄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는 거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면서 사업하면서 보아온 관공서나 농협 사람들, 지방지 기자들 실태를 들려준다. 과장도 있겠으나 이쪽 지역사회라는 점을 감안하고 또 내가 보아온 그네들 모습을 보자면 과히 틀린 말들은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좋잖은 모습 보이는 그네들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까지 정말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느냐, 먹고 살려니 달리 방도가 없어서 그렇고, 주변 사람들 사는 방식에 묻어가는뭍어가는 것이지, 그 모습 자체가 바르지 않은 것이라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 사장도 수익 때문에 가끔 꽁수를 부리기도 하지만 정말 열심히 땀흘려 일한다. 설비를 좀 갖추면 품질을 높여서 더 많이 팔리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하는데 하루 종일 땀흘려 제작하는 모습 보고 있으면 아 자식 마누라 먹이려고 정말 고생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자기도 지역사회의 거대한 복마전 속에 뛰어들어 한동안 수익을 거두고 큰 소리 친 적이 있지만 지나고 보니 좀 부끄럽고 헛일이란다. 다들 살 뜯어먹기 경쟁이라고. 정석대로 사는 게 최고라고.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지역에 오래 살았으니 아는 사람 천지건만 마음 내어줄 사람은 많지 않은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대개들 그렇게 보인다. 그이가 식구가 아닌 타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곁을 내주는 이가,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속 신출내기 기자가, 나인 셈이다.


또 알고 지내던 이가 재산 상속과 등기 문제로 뭔가 부탁을 하려고 찾아왔다. 그네 역시 그 과정에 법적 문제가 있었고 결국 속내는 '정석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좀 들고 내가 요새 좀 돈벌이가 되고 먹물로 쬐깐 튀긴 놈이라 생각해서 였는지 날 찾아왔다. 첨엔 눈치를 채지 못했고 옆사람이 사정을 정확히 알려주어서야 알았다. 내가 좀 둔해야지.


나랑 티격태격하다 내게 주먹질까지 한 건축업자는 지금 사면초가 상태다. 그동안 결제를 받지 못한 자재업체 사장들한테 시달리고 시공 맡겼던 사람들에게서는 죽일 놈, 나쁜 놈, 실력 없는 놈 소리 듣고. 그네 역시 다른 방법은 없다. 잘못 빌고 수중에 쥔 돈에서 갚을 수 있을만큼 갚고 나머지는 꾸준히 변제할테니 기다려 달라고 사과를 하는 방법 외엔 묘수가 없다. 그네가 자재값 결제를 잘 하지 않는 이유는 조금씩 외상값을 남겨놓아야 계속 외상을 할 수 있는 법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배워서란다. 외상값 받으려면 계속 외상 주어야 하니까 :)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아닌가? 대기업들. 대금 결제 잘 해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다고.


그 인간 상황은 최악이다. 소문이 좋지 않게 나서 일도 잘 들어오지 않고 사실 손에 쥔 현금도 그닥 많지는 않고(물론 나보다야 엄청 많다). 물려받을 농토가 워낙 많은 지라 버티고 있다는 소문이고. 또 시골에 허름한 집 한 채와 미리 상속받은 땅도 얼마간 있다. 그거 팔아서 외상 값는 게 유일한 방편인데 그걸 하느냐 마느냐로 버티고 있는 셈이다. 그 인간 문제는 손에 결제할 돈이 있으면서도 결제를 부러 않는 것이다.


나는 그 인간 불쌍하지만 정작 욕 먹어야 할 것은 그를 키운 부모며 동네사람들, 일 가르친 어른들이라고 혔다. 보고 배운 거니까. 또 그네들에게 그만큼 믿음이 없는 거니까.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서지 말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항상 그럴까?

어른은 막을 수 있는 불가역은 막아선다. 어느 지점까지 가버리면 불가역이 되기 때문에 그 전에 막아서는 것이다. 막을 수 있는 불가역을 막지 못했을 때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 말로 '한'이 된다. 불가역을 막는데 엄청난 돈과 자원이 드는 것은 아니다. 쥐고 있던 일부를 여럿이 풀어놓는 걸로 대개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