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
레드문님/
이 부분에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특유의 교리체계는 상당부분 그들 계시의 역사성과 실제성을 전제로 성립되기 때문일 겁니다"
흐강님의 글에 댓글에도 제가 썼지만, 다른 종교에서는 없는 기독교의 특수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이것이 믿음의 영역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회피하는 기독교인은 저는 무책임하다고 봅니다.
19세기부터 사르곤과 모세의 유사성-물에 띄워진 아기-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생겨난듯 한데요..
여러가지 유사성을 쪼개어서 꼼꼼하게 비교하시긴 하셨지만.. 사실 핵심적인 유사성은 "강가에 띄워보내진 아기"라는 하나의 포인트인것 같네요..
같은 고대의 강가문화의 특성상 갈대바구니를 쓴다던가 역청을 발랐다던가 하는건 아기를 바구니에 담아 물에 띄우는 방식에 딸려가는 문제일테구요..
모세의 어머니는 레위의 후손이었던 것이지 신전여사제도 아니었죠..
레위의 후손들이 사제노릇을 하는건 먼 훗날에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의 일입니다..
아무튼 '물에 띄워진 아기'라는 저런 일치성은 흥미로울만한 점인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양쪽의 문명(사르곤-메소포타미아, 모세-이집트)이 모두 강에 인접하면서 발달해온 강가문화라는 환경적 공통점으로 볼때..
아기를 바구니에 담아 강에 띄워보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오늘날 강에 인접한 삶을 살지않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일반화된 관습이었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겠죠..
일단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에서는 이 대목을 흥미롭지만 또 노골적인 카피라는 식의 시선과는 거리를 두는듯 하네요..
-------------------------------------------------------------------
"19세기 말부터 학자들은 모세의 탄생이야기와 사르곤의 탄생전설 사이의 유사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여대사제(high priestess)에게서 태어난 사르곤의 탄생전설에서는 여대사제가 사르곤을 상자에 두고 강으로 띄워보낸다. 마침 물 길러 나왔던 악키가 사르곤을 건져 키우는데, 이 사르곤은 나중에 위대한 메소포타미아의 왕이 된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 사이에 어떤 문학적 연관이 있는것 같지는 않다.
.. 사르곤 전설의 경우, 여대사제는 아이를 가지면 안되는 몸이었다.
히브리 문화나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물위에 띄운 상자는 아이를 물을 관장하는 신의 보호에 맡김을 의미한다(출애굽기의 경우, 그 신은 여호와다). 아이를 상자에 놓고 물에 띄우는 것은 오늘날 키울 수 없는 아이를 집이나 병원의 문 앞에 두고 가는 관습에 견줄 수 있다.."
(이안프로반 등,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p262)
-------------------------------------------------------------------
=======================================================================================
모세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한다는 이집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
=>
이런 지적은 오래된 지적입니다만.. 이와 관련해서 [이집트 성경역사]에서는
출애굽사건이 이집트의 패배를 인정해야하는 일인데 근동민족들의 특성상 패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때문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집트와 성경역사, p99)
=======================================================================
결국 전반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이집트에 어떤 재앙이 존재했고 사르곤이야기도 있는 상태에서 아피르 집단이 이집트에서 어떤 이유로 빠져나오면서 현재의 이스라엘을 형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모세이야기 이집트재양이야기 등이 기존의 사르곤이야기 아이푸어파피루스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
=>
십계같은 영화를 보면 마치 국가대 국가의 대립처럼 극적으로 그려지고
좀 그런 식의 느낌을 가지고 출애굽기를 읽으면 이 전개가 왜 이집트 역사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가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요..
위에서는 이집트의 국가적 자존심때문일 수 있다는 지적을 하는 학자의 견해를 적었습니다만..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이건 사회계급 안에서 일어난 내부적인 문제라고 보는 차원에서 기록이 되지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바로 말씀하신 아피르의 얘기와 관련될 수 있는 얘긴데요..
아피르는 흔히 '하비루'..라고 더 잘 알려져 있죠..
우리가 이스라엘민족을 '히브리'라고 부르는데 '하비루'와 '히브리'는 언어적으로 유사성이 크다보니 더 관심을 모으는것 같습니다.
'하비루'라는 집단은 혈연집단이기 이전에 이집트주변에서 발견되던 밑바닥 계급의 광범위한 명칭인데,
떠돌이 하층민인 하비루족 안에 여호와신앙을 가진 아브라함족속이 존재했고 그 집단을 중심으로 하비루들이 점차적으로 뭉치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신앙공동체로 발달해간 과정으로 보는 그런 설명이 있죠..
(낮은 밑바닥의 하비루가 출애굽하는 스토리는 해방신학에서 되게 선호하는 스토리라죠..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서 해방의 상징이 되기때문에..)
아무튼.. 기존의 '히브리'라는 단어는 통념상 민족개념이고 '하비루'는 계급개념이다..라는 구분이 조금 있긴한데..
이것도 꼭 그런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히브리사람이 한 장소에서 다른 집단처럼 따로 불리는 장면이 있거든요..
------------------------------------------------------------------------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사무엘상 14:21)
------------------------------------------------------------------------
=>
성경의 이 장면을 보면 히브리인이 꼭 이스라엘민족을 의미하는것만은 아니라는걸 알 수 있죠.. 일종의 사회적 계급의 차원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 하비루들이 히브리다..라는 구도는 워낙 구도적으로 깔끔하게 들려서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긴 한데.. 얼마전에 듣자하니 하비루=히브리설이 지지되기 어렵다면서 다른 얘기를 듣기도 했었네요..
뭐 그냥 하나의 가능성쯤으로 생각하면 될것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집트의 10가지 재앙에 대해서.. 레드문님께서 좋은 지적을 해주셨는데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재앙이었을 가능성얘기 말입니다..
안그래도 작년인가 [이집트 10가지 재앙의 비밀]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을 읽으면서 오호 꽤 재밋구나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바로.. 1만년간의 화산폭발중 가장 강력한 화산폭발이라고 일컬어지는 산토리니화산폭발의 여파로 인해서 성경이 기록된 현상들이 순차적으로 발생했을 수 있다는 과학자의 주장을 담고있는 책이죠.. (이거 꽤 재밋습니다.. ^^;)
영국의 유력일간지 텔레그라프도 조금 유사한 주장을 담은 내용을 보도한적이 있죠..
성경 속의 10대 역병(1)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39992
성경 속의 10대 역병(2)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40029
성경 속의 10대 역병(3)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40076
일단 과학적으로 충분히 성경의 재앙이 "순차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방식대로 일어났을 수 있는 과학적 원인을 규명하는 책이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었습니다.
뭐 레드문님께서도 인용하셨듯 이집트안에서도 출애굽기의 열가지 기적을 비슷하게 경험했다는 파피루스를 말씀하셨는데.. 이게 흥미로운게 연대적으로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보면 죄다 BC1500~1600년 근처더군요..
산토리나화산이 폭발한 시기나.. 성경의 출애굽기가 가르키는 대략적인 출애굽시기나..
출애굽기와 비슷한 재앙을 기록했다고 하는 이집트의 아이퓨어 파피루스가 측정되는 시기나.. 다 어느정도는 비슷한 시기라는게 흥미로운거죠..
레드문님께서 오늘 적으신 이런 얘기는 제 성향상 재미를 느끼는 분야랍니다..
위에서 하비루얘기나 이런 얘기나.. 뭔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듯한 느낌을 주잖아요.. ㅎㅎ..
하지만 불교도에서 예수쟁이로 개종한지 한 30년정도 지내면서 느끼는건..
다 들을 당시에는 정말 무릎을 치면서 바로 이거구나..했던것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는가를 잘 살펴봐야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늘 생각하게 되긴하더군요..
확 와닿는 얘기도 좋지만 평범해보여도 세월을 이겨낼 수 있는 얘기가 결국에는 진짜더라구요..
아무튼 말씀하신 견해에 대해서는 저도 하나의 좋은 가능성들이고 좋은 이론들이라고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 아.. 이 말을 빠뜨린듯한데요.. 당연한 얘기지만 모세가 사르곤의 카피라는 대목은 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카피운운하기에는 일치점이 너무 많이 빈약하죠.. ㅎㅎ.. )
레드문님 /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아피루 설은 이제 부인되고 있습니다
히브리는 하피루가 아니고 천민 계층도 아닙니다
성경에도 주류는 히브리 민족이고 거기에 따라나온 다른 민족이나 계급이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요셉이 힉소스 시대에 총리를 한 것은 확실한듯하고 아멘호텝에 의해 식소스가 쫒겨나면서 유대민족은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서구의 유대인의 역사를 봐도 이게 애초 팔레스타인을 떠났던 유대인들의 순수한 혈통만이 아니라 당시의 하층계급이나 다른 민족들도 결혼이나 개종등으로 유대민족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히브리인들 역시 여러 소수 부족들 계층들의 연합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민족개념으로 통합된 사람들이고 주력은 히브리 사람들이지요
지금까지 레드문님이 안티바이블을 기준으로 제시하신 의문들의 구조는 모두 성경에 있는 이야기가 근동지방의 타 종교나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명의 발전이나 시기로 볼 때 성경이 그것들을 수용하여 자기것으로 만들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호루스 이야기 조로아스터 이야기등은 주장하는 사실 자체가 왜곡된 주장이고 길가메쉬 서사시나 사르곤이나 수메르 신화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해서 성경이 허구인데 이 사람들의 신화를 받아들였다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수메르 신화나 바벨론 이집트 신화는 그 신들이 인간의 모습 성질 그리고 때론 아들을 잡아먹는 그런 아주 원시적인 신의 모습입니다.
그리스의 신이 모습도 인간의 확장형이지요
그러나 성경의 여호와는 애초부터 추상적인 신으로 나타납니다.
이건 일관됩니다.
천지를 창조했는데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건 엄청난 것이고 당시 수메르나 바벨론 이집트를 통털어서 그런 식의 창조 이야기는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창조이야기는 비슷하지만 말이지요
이후로도 성경의 신관 제사 이런것들은 완전히 독자성을 유지합니다.
니므롯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사람의 딸들이라는 단어속에 이웃지역의 신화적 요소가 조금 들어있다고 볼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의 뼈대나 핵심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런 중요한 차이를 무시하고 다만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니 카피햇다라는 것은 그야말로 안티들의 주장일 뿐이지 진실을 찾아서 확증하는 학문적 주장은 아니지요
또한 사르곤의 이야기와 모세의 이야기도 좀더 따져들어가면 많이 다릅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 고대 근동 지방의 역사에 신화적인 영웅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아요
하지만 모세와 사르곤은 애초부터 다르지요
히브리인을 탄압하기 위해 남자를 죽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산파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들이 살리며 한동안 기르다가 의도적으로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오는 틈을 타서 갈대상자에 애를 태우고 누나는 지켜보다가 공주가 아이를 거두자 어머니가 유모를 자처합니다.
공주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인줄 알고도 거둡니다
여러가지 다른 부분은 놔두고 취사선택하여 같은것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이지요
모세의 어머니가 레위지파 사람이었지만 당시는이스라엘에 제사제도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제도 아니고 그후에도 여자는 사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물론 근동에 여사제가 존재하던 점에 비해 이스라엘에는 여사제가 끝까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해모수 설화나 금와부인의 이야기와 박혁거세의 알 탄생 이야기가 같습니다
그렇다고 신라의 박혁거세가 해모수나 금와부인의 이야기를 카피한 것일까요
사르곤의 이야기를 보면 어머니가 지체높은 여사제입니다
여사제가 임신을 했기에 남몰래 나아야 했고 버려야 했지만 모세는 국가로부터 남자는 죽이라는 탄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는 그냥 노예처럼 사는 히브리 사람의 여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공주가 거두었고 사르곤은 물긷는자
모세는 왕궁에서 왕자에 버금가게 길러졌지만 사르곤은 원예사였습니다.
결국 같은점은 강에 띄어졌고 바구니가 같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가끔 어쩔수 없이 아이를 출산한 어머니가 강에 아이를 떠내려 보내는 이야기가 있고 아이를 담은 바구니는 당시 당연히 갈대와 역청을 바를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 두가지 외에는 같은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런식으로 조금 비슷한 것을 표절이라고 해 버린다면 동양은 서양의 역사책을 표절한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나라와 나라 개인의 이야기도 다 그런식의 해석이 가능할 겁니다
지체 (肢体) 높은 여사 제 (女司祭)였던 어머니는 나를 밴 후 남들 모르게 나를 낳았다.
골풀로 만든 궤짝에 나를 넣고 뚜껑을 닫은 후 역청 (沥靑)으로 봉 (封)했다.
어머니는 나를 강물에 띄워 보냈다 .
물은 나를 덮 치지 않았다 .
강은 나를 아키 (Akki), 물 긷는 자에게 보냈다.
아키 (Akki), 물 긷는자는 물병으로 물을 긷다가 나를 건졌다.
아키 (Akki), 물 긷는자는 나를 자식 (子息)으로 키웠다.
아키 (Akki), 물 긷는자는 내게 원예사 (园艺师)의 임무를 주었다.
아침112님 흐강님 / 네 반론 잘 읽었습니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답변이기도 하네요.
반론주신것과 관련되어 몇가지만 언급할까 해요.
우선 사르곤과 모세이야기에서 모세어머니를 레위지파여사제라는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좀 무리가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다만 출애굽기 2장 1절에 레위가족중 한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레위 여자는 모세어머니고 레위 지파는 나중에 제사를 담당하는 것으로 나와요. 그리고 재미있는게 모세이야기에서는 모세어머니가 중심에 나오고 모세아버지는 싹 사라져버려요. 그 뒤에 전혀 안나오구요. 사르곤 이야기에서 사르곤의 엄마가 여사제로써 아버지는 잘 모른다는 것과 유사하죠. 다만 사르곤의 아버지 형제가 산 사람이라고 하므로써 자신의 계보가 산신을 섬기는 자(또는 산의 아들)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요. 모세도 비슷하게 모세아버지는 레위지파라고 하면서 처음 등장하고 그 뒤로는 이야기구조에서 사라져버리고 레위지파가 섬기는 하나님 즉 산신의 이미지만을 취합니다. 그리고 레위지파는 출애굽기 뒷부분에 제사를 담당하도록 나오므로 전체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해요. 레위여자로서 모세 누나 미리암은 또 여선지자로 나오구요
결과적으로 단지 물에 띄었다만 같은 게 아니라는 거죠. 나중에 사르곤을 물에서 건진 사람이 바로 이쉬타르 여신입니다. 성경의 이집트 왕의 딸과 어느정도는 연관되는 대목이기도 하잖아요.
흐강님이 해모수설화와 금와부인 나아가 박혁거세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일단 여기서는 머가 원본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사르곤 모세이야기에서는 어느 이야기가 더 이른 것인지가 확실하잖아요. 그리고 당장 알탄생신화가 사실을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모종의 목적하게 만들어졌다는 측면에서 성경의 모세이야기 역시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거구요. 그리고 성경이 일정부분 편집되기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고 하나님은 겉으로는 유대인만을 상대하는 것 같지만 그 시대 있었던 유대 종족 외의 다른 모티브까지 다 사용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네요.
이것은 나중에 고레스가 여호와를 섬겼다고 하는데 그 여호와가 실제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이 됩니다. 구약은 고레스를 매우 좋게 서술하고 이 고레스가 섬기던 신을 여호와라고 보고 있는데(이사야서 44장 28절) 역사적으로는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 있거든요. 나중에 아기 예수에게 찾아왔다는 동방박사 즉 마기들도 바로 이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였는데 성경에서는 이들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라는 것이 특이하거든요.
ㅎㅎ..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기독교와 다른 전통과의 유사성목록을 쌓아올리고 싶어하는 분들은 유사성을 "찾아내는"게 아니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예요.. ^^;
한쪽은 남자를 만나서는 안되는 여자제사장이 부적절한 성적접촉을 통해서 낳은 아기를 강가문화의 풍속대로 유기한 문맥이고.. 전혀 이런 일들의 진행은 예언에 대한 성취라던가 하는 맥락이 없죠.
하지만 모세의 어미 요게벳은 전혀 제사장직분과는 관련도 없고 부적절한 성적접촉을 통한 아기도 아니었죠..
그리고 모세의 유기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세상의 핍박의 맥락에서 제시되는 것이고 그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계획을 위한 남겨진 자를 준비하신다..라고 하는 유명한 "남은자"신학의 한 사례로서 강에 유기되는 아기의 배경으로 묘사되는거죠..
객관적으로 우리가 양쪽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성이란 강가문명의 배경에서 궁지에 몰린 이들이 아기를 처리하는 흔한 관습과 연관되는것 말고는 실제적인 배경적인 공통성에서 정말 유사하다..라고 할만한건 없죠..
괜히 유사성목록을 쌓아올리고 싶은데 모세엄마는 여사제가 아니라고 하니 이제는 엉뚱하게 모세의 누나를 여선지자라는 구색으로 끼워넣으시는데.. 솔직히 미리암의 위상은 모세가 나중에 히브리족속 안에서 얻은 특별한 위치로 인한 종속적인 요소지 독립요소가 아니잖아요.. 그냥 어떻게든 공통점을 발명하고 싶으신 나머지 너무 모든걸 끼워맞추기식으로 보시는게 아닐까요..?
-------------------------------------------------
"나중에 사르곤을 물에서 건진 사람이 바로 이쉬타르 여신입니다.
성경의 이집트 왕의 딸과 어느정도는 연관되는 대목이기도 하잖아요."
-------------------------------------------------
=>
모세의 이야기에서 공주가 그를 건졌다..라고 하는 맥락은 결국 그 맥락이 소비되는 대목이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모든 이집트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포기하는 모세의 결단에서 공주의 양자라는 대목이 소비되는 맥락으로 사용되거든요..
하지만 사르곤은 적어도 여신의 자식이라는 지위를 내던짐으로써 신적역사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맥락이 아니라 그냥 사르곤이 여신의 아들이라는 위상만 더해주는걸로 끝나는 용도잖아요..
어떤 유사한 맥락이든 그것은 그 자체의 개체적 차원에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맥락속에서 그 요소들이 어떤 목적과 용도에서 소비되는가의 차원에서 그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라는걸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야기는 언제나 주변의 근동과 비슷해보이는 재료를 가지고 시작해서 종국에 가서는 전혀 다른 지향을 가진 결과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건 고대근동신화와 창세기의 유사성과 차이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나오는 얘기인데요.. 바로 이런게 성경이야기와 근동의 신화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아이덴티티의 격차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말로는 설명이 안되니.. 혹시 기회가 되시면 마르둑의 신화와 성경의 창세기를 같이 한번 읽어보세요.. 본인이 직접 읽어보시면 두 이야기의 공통점 이전에 엄청난 격차부터 느끼실지도.. ^^;
읽어보면 독자 개인이 무엇보다 먼저 느낄 수 있는 큰 차이가 있는데 온갖 말로 유사성목록만 그럴듯하게 만들어내서 현혹을 시키니 둘 다를 동시적으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차이를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게 아니냐.. 전 일단 그리 보고 있습니다..
===============================================================================
이것은 나중에 고레스가 여호와를 섬겼다고 하는데 그 여호와가 실제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이 됩니다.
===============================================================================
=>
이건 레드문님께서 신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는가의 방식과 연관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기독교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셨다..라고 이해하는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개체자"라는 의미가 아니지않나 싶어요.
신의 의미란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천으로서의 의미가 있으신 것이지만..("만물을 붙드시는 분")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실때에는 어떤 역사적 행동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고레스가 아후라 마즈다를 섬겼다.. 이슬람이 알라를 섬겼다..라고 인간이 친구를 사귀듯 각각이 다 개체화된 다른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기전에..
존재의 근원을 사유하는것은 언제나 우주의 창조자, 즉 이스라엘에 개입하신 그분을 사유하는 것이라는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들도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거나 이 세상을 만드신분을 섬긴다고 할때.. 제한적인 차원에서이긴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려는 의도속에서 전혀 엉뚱한 사물을 섬기거나 잘못된 신의 대체물을 발명해낸다..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런 사유와 섬김은 진정한 신이 스스로 계시하신 자신과 그분의 목적을 알 수 없음으로 결국에는 그 사유가 머물곳을 찾지못하고 잘못된 길로 왜곡되고 만다는게 문제인거죠.
이것은 가짜, 저것은 진짜..라는 관점보다는.. 모두가 나름대로는 참된 신을 향한 진정성과 빛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본질상 참된 신을 사유하고 섬기는대로 나가지못하는 한계속에 있다는 것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싶네요..(일단 기독교인들은 그런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결국 이슬람지역에 살고있는 기독교인은 알라신을 섬기는거죠..
그런데 그 알라신은 이슬람이 사유하는 그런 알라신이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신,
피조물와 하나가 된 모습으로 오셔서 스스로를 낮추시고 만물의 고통속에 동참하시는 신,
결국에는 세상의 모순을 끝내려하시는 신..
그렇게 만물속에 자유를 주려고 오시는 알라신을 섬기는 것이죠..
예수라고 하는 한 존재안에서 참된 신의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본질이 피조물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되면
인간이 늘 붙잡으려고 애쓰던 존재의 근원, 혹은 이 세계의 창조자와 그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사유와 섬김이 담길 적절한 그릇을 찾게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입니다..
고레스는 여호와가 아닌 아후라 마즈다를 섬긴게 아니냐는 말씀은..
이 신은 무슨 신, 저 신은 또다른 무슨 신.. 이런 개체적인 사고속에서 나오는 말씀이지만 실제는 그런 개체별로 다른 신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인간은 그 안에서 참된 신을 향해서 예배하려고 하는거죠.. 잘못 오도되고 있을뿐..
만약 조로아스터교의 신관속에 참된 신에 대해 바른 관점이 조금이라도 담겨있는바가 있다면..
적어도 그 정도의 크기만큼은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참된 신을 바라볼 빛을 가진 셈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죠..
이어서 하비루 부분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대충 요약하면 처음에는 하층계급(하비루)이었다가 이게 민족개념(히브리)으로 발전했는데 결국 이게 적당히 믹스되다보니까 나중에 히브리라는 민족개념이 어떤때는 계급개념으로도 쓰인다 머 이런 야그로 들리는데 맞는지 모르겠네여.
다음은 이집트 재앙이야기인데요. 과학적으로 그게 가능한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신 것을 잘 봤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성경 속의 역병들이 당시 이집트의 최대 도시인 나일강 하구 삼각주의 피-람세스(Pi-Ramesses)에서 발생했다고 믿는다. 이 지역은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인 기원전 1279년부터 1213년까지 파라오 람세스 2세의 통치 기간 중 이집트의 수도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떠나면서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역병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건기 때문에 나일강이 ‘피의 강’으로 변해
람세스의 통치 기간, 이집트의 수도 피-람세스의 기후는 따뜻하면서도 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후가 갑자기 건기로 바뀌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환경물리학연구소의 고대 기후학자인 아우구스토 마기니(Augusto Magini) 교수는 “파라오 람세스 2세는 매우 유리한 기후의 기간 동안 통치했다”며, “그가 통치할 당시 이집트에는 상당한 양의 비가 내린 덕에 번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기는 몇십 년만 지속된 후 그치고 말았다. 마기니 교수는 “건기가 찾아 들면서 식량 생산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됐다”고 지적했다.]
위 이야기에서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이집트 재앙이야기는 람세스 치하 즉 13세기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여지네요.
[산토리니 섬 화산폭발 화산재 이집트로 이동
인류 역사에서 가장 컸던 화산 분출은 지중해 산토리니 섬의 일부였던 테라(Thera) 섬의 화산폭발이다. 이 산은 약 3천500년 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면서 하늘을 가릴듯한 많은 양의 화산재를 공중으로 분출했다.
독일 대기 물리학연구소의 나딘 본 블롬(Nadine von Blohm) 박사는 당시 어떻게 해서 일곱 번째 역병인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형성되는지에 대한 실험을 수행했다.
그 결과 블롬 박사는 화산재가 공중에 떠서 이집트 상공으로 이동하던 도중 뇌우(thunderstorm)를 만나게 됐고, 충돌과정에서 우박을 동반한 엄청난 폭풍이 발생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트레비사나토 박사는 “화산재들이 무더기로 떨어지면서 날씨가 변칙적으로 변하는 이상기후가 연출됐다. 화산재로 인해 강수량이 많아졌고 습도도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이 메뚜기의 수를 엄청나게 증가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아홉 번째 재앙, 어둠에 대해 언급하면서 “지중해에서 이집트로 이동한 화산재가 하늘을 가려 태양빛을 차단했고, 이것이 이집트를 3일 동안 칠흑으로 가득 차게 한 어둠의 역병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메뚜기는 기후변화, 어둠은 화산재가 햇빛을 차단했기 때문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과학자들은 “역사 기록상 어떤 화산활동도 없었던, 이집트의 유물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냉각된 화산 용암으로 만든 부석과 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돌을 분석한 결과 그 성분이 산토리니 화산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산토리니 화산분출로 인해 생긴 화산재가 이집트 해안에 도달하였다는 물리적인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마지막 역병으로 이집트 사람들을 괴롭힌 장남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남의 죽음은 햇곡식을 중독시킨 곰팡이 때문
첫째 자식의 죽음에 대한 이유로 과학자들은 독성이 강한 곰팡이류(fungus)를 들고 있다. 온난화로 생긴 곰팡이들이 농작물에까지 침투했다는 것이다.
장남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풍습 때문에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처음에 곡물을 수확하면 햇곡식으로 만든 요리를 장남에게 우선 먹였다. 결국 독이 강한 곰팡이 균을 먹게 된 장남들은 식중독에 걸려 죽게 됐다는 주장이다.
화산재가 뇌우를 만나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발생
구약성서의 역병에 대한 책을 쓴 캐나다 생물학자 시로 트레비사나토(Siro Trevisanato) 박사는 여덟 번째 역병인 메뚜기들 또한 떨어진 화산 찌꺼기들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일련의 재앙은 화살폭발과 관련된 재앙이네요. 그런데 이 화살폭발은 BC1500년 경인것 같아요. 그러면 이건 15세기설이 되어 버리네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컸던 화산 분출은 지중해 산토리니 섬의 일부였던 테라(Thera) 섬의 화산폭발이다. 이 산은 약 3천500년 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면서 하늘을 가릴듯한 많은 양의 화산재를 공중으로 분출했다.)
다만 아이퓨어 파피루스의 경우는 1800~1600년 사이로 보거나 아니면 아에 그보다 더 이른 시기로 보는 것 같아요. 전에 창조과학회 어떤 글에서는 이걸 근거로 제 12왕조시기에 출애굽이 있었다고 주장했던 것 같기도 하던데 성경자체에 근거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급격한 기후변화라는게 여러번 있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나아가 화산폭발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반복될 수 있구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발해도 사실 갑자기 쇠퇴한 이유 역시 화산폭발이 그 원인이라고 하잖아요. 다만 BC1500년 전에 아이퓨어 파피루스에 나오는 일련의 재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또 화살폭발이 있었는가를 따져볼 필요는 있을 듯 싶네여.
우선 이 부분은 여러번의 급격한 기후 변화 가능성 그리고 여러 번의 화살폭발 가능성 그리고 아이퓨어 파피루스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아침112님이 링크하신 내용을 토대로 보면 15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장기간을 설정해야 이 시나리오가 구성이 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모세라는 인물이 실제하고 실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연재해를 일어날 것을 경과하고 나아가 홍해를 가르는 일을 했는가는 믿음의 영역이겠지요. 다만 그나마 사실의 영역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뒷받침해 줄 수 있는건 2세기에 걸친(15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자연재해로 인해 이집트에서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하비루라는 집단이 나왔다는 정도는 인정이 가능하겠네요. 그 과정에서 영웅적 지도자로 특정인물을 띄우기 위해 그 당시 유명했던 사르곤의 탄생설화를 가져다 쓰고 나아가 2세기에 걸친 자연재해를 단축해서 일련의 사건으로 묘사하기 위해 아이퓨어 파피루스의 내용을 가져다가 썼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 경우 성경에 나오는 15세기설과 13세기설이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다만 이 경우 성경에 나오는 일련의 자연재해가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과 역사적으로는 배치가 되네요. 즉 2세기에 걸친 자연재해를 아이퓨어 파피루스에 나오는 것을 가져다가 설명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뭐 화산활동이 한번만 있었던건 아니었나봐요..
제가 읽은 책에서는 이집트에 영향을 끼친 산토리니화산의 폭발이 BC 1613년 늦여름부터 1612년 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 책이 당장 손에는 없는데 다른 분의 독서후기에서 책내용요약을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
중기 청동기 시대—탄소 동위원소 연대 측정 및 지질학적 조사 등 과학적 분석으로는 BC 1613년 늦여름부터 1612년 봄까지— 에게 해의 남쪽 산토리니 섬의 화산이 대규모 폭발을 일으켰다.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계속 분출되고, 이것은 그 분화구 800km 남쪽 나일 강 삼각주 지역에도 낙진으로 떨어졌으며, 햇빛을 가리고 기후에 변화를 가져왔다. 즉
〇 화산재 구름이 나일 삼각주 지역을 덮치고, 화산재는 나일 강물을 붉은 핏빛이 되게 하였으며, 물고기가 떼죽음을 일으키고 물에서 심한 악취가 나서 물맛이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재앙)
〇 또 화산재는 강한 산성이었으므로 강물이 오염되어 양서류인 개구리들이 대 탈출을 일으켰고 그것들이 뭍에서 대량으로 죽어 악취가 나고(둘째 재앙),
〇 각종 해충들의 유충이 개구리와 동물의 사체에서 부화되어, 사람과 가축을 괴롭히고(셋째와 넷째 재앙),
〇 돌림병으로 가축이 죽고(다섯째 재앙), 악성 종기가 창궐하며 가축들이 죽고 사람들이 고통당하며(여섯째 재앙),
〇 공중의 부유하는 화산재는 해를 가리고, 기후에 변화를 주어 우박 폭풍을 일으켜 가축과 나무와 채소를 치고(일곱째 재앙),
〇 높은 습도로 메뚜기 떼가 급증하여 남은 것 곧 식량 채소 나무마저 먹어치워 사람과 가축이 아사하였다.(여덟째 재앙)
〇 거듭 화산재가 해를 가리어 세상이 흑암에 덮이고(아홉째 재앙),
〇 히브리 인을 제외한 애굽 사람과 타민족들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희생물을 드리며 제사하였는데, 그들은 처음 난 자식 (장자)을 신에게 바쳤다.(열 번째 재앙)
〇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양을 바치고, 더 많은 희생물을 드리기 위해 광야 거룩한 장소에 가야만 한다고 파라오에게 주장 하였고, 이렇게 성경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 기사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라는 주장이다.
------------------------------------------------------------------------------------
=>
뭐 이런 주장은 또 세월이 지나면 다른 이론속에 덮여갈지는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복수의 과학자집단에서 이런 연구가 발표되고 있는것 같고.. 자연적 변화시뮬레이션에서 성경의 재앙보도와 순서까지 일치하는 방식으로 결과가 추론될 수 있다는 얘기인지라.. 흥미롭게 보고있는 이론입니다.
p.s.
"성경에 나오는 일련의 자연재해가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보신 대목은 일단 저 책의 저자인 시로 트레비 사나토박사의 연구대로라면 한 8개월간에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는것 같지는 않네요..
아무튼 성경의 기적은 초자연적이어야하는건데..하면서 갈등하지만 않는다면 상당히 재밋는 이론이죠.. ㅎㅎ.. ^^;
아.. 하비루이론은 흐르는강물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다른 근거들로 그 이론의 한계가 노출됐다는 얘기를 저도 들은적이 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가능한 하나의 이론으로 보시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레드문/ 하비루에 대한 이해는 레드문님의 정리가 맞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일정부분 구전되던 것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과정이 있던건 맞습니다.
다만 성서비평이 문서비평, 편집비평 양식비평, 서사비평으로 흘러왔는데 오늘날은 독자비평의 흐름으로 넘어갔습니다..
독서비평은 성서의 형성과정이나 양식 편집등이 어찌되었든 현재의 완성된 형태를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독자의 반응이 중요하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시나 소설이 원작자의 의도나 그런것과 상관 없이 현재의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각기 다르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시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역시 성경 자체는 성경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역사책 아니면 중동의 신화를 카피한 책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자들에게는 구원의 책 기적의 책이고 실제로 기적이나 인생의 변화를 체험하고 있지요
설화의 유사성만으로 단순하게 연대가 후대인 것이 카피했다라는 주장은 상당히 유치한 주장이지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키루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에 의해 버림받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중에 아버지를 극복하고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나 고대 이야기에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다 카피했을까요?
인생에 있어 역사에 있어 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인생의 여정을 겪는 일은 허다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비정규직의 이야기중 공통된 것은 얼마든지 있고 조선시대 하층민의 삶의 이야기가 지금도 재현이 되고 있습니다.
세모자가 자살한 이야기 같은 것은 조선시대에도 있고 아이를 유기하는 일도 신라시대에도 있고 말이지요
그렇다고 다 카피인겁니까?
그리고 칼이 모양이 같다고 용도가 같나요
중국집 주방장의 칼 외과 의사의 칼 생선장사하는 분의 칼 정육점으 고기써는 칼은 칼이라는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양이 각각 다르고 쓰임새가 완전 다릅니다.
생선과 고기 사람의 살 양파를 다지고 고기를 다지는 칼 이렇게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게 칼이니 생선다듬는 칼로 사람 수술하겠다고 덤비면 되나요
마찬가지로 수메르 신화와 성경의 유사성이 있다고하여 다 같이 취급하고 카피했다 라는 건 넌센스이고 지성인의 사고방식은 아니지요
그야말로 인터넷에서 떠드는 아해들의 중2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레드문님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
기독교나 성경은 엄연히 수천년 동안 정리되고 믿고 연구한 책입니다.
그리고 탈무드 미드라쉬 미쉬나등 파생되는 책도 만만치 않고요
아울러 당대 인간의 최고 지성을 기울여서 연구하고 정리한 신학이 있습니다.
그러한 신학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 배경 의도 내용 목적등을 정리했고요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러한 수천년의 역사적 문화적 신학적 바탕위에 믿음을 쌓아 올린겁니다.
그런데 그걸 계시종교라는 이유 하나로 기초되는 사실이 카피된 것 같다라는 것만으로 돌하나 빼면 무너진다라고 하는건 지나친 것이지요
112님의 말씀대로 신학적 사상이 있고 거기에 맞게 성경이야기는 기록이 되어있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우리 중국을 서구 사람들은 비슷하게 보고 중국의 아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같으면서 카피했으면서 분명 다른 고유의 것들이 많이 있지요
우리 조상들이 사대주의를 했으면서도 고유의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발전하고 일본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의 기적이나 열가지 재앙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은 자연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모든 이적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수천년전 일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과학으로 설명이 안되는 일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영역인 성경의 일을 과학으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에 종속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과학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 연구하는 일이고 종교는 자연의 법칙의 한계에 갇힌 인간들이 초월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걸 다시 과학으로 입증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의 이적들이 자연재해나 있을 수 있는 일을 기적으로 해석한 부분도 있고 정말 초자연적인 기적도 있고 어떤 메시지를 위해 동원된 것도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냥 성경이 말하는대로 기적은 기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항상 강조하는 말이 성경이 입증되던 아니든 결론은 선택의 문제라는 겁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이고 이것은 지적인 동의가 어느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실존의 문제 결단의 문제라는 것이고 그러한 실존적 결단은 인간 개인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떤 사건 어떤 계기 어떤 인연에 따라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 112님/
"성경이야기는 언제나 주변의 근동과 비슷해보이는 재료를 가지고 시작해서 종국에 가서는 전혀 다른 지향을 가진 결과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한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자신에 반대하는 족속에 대해서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여 그 가축과 그 소생까지 완전히 말살하라고 말하는 야훼의 성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구약의 신과 신약의 예수 이후의 기독교는 완전히 온전히 다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약의 야훼도 성경기 씌여진 연대를 거슬러보면 일개 부족의 신 - 즉 자기 부족과는 다른 개체에 대해서는 일말의 자비가 없는 국지적인 존재에서 - 점점 더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서) 좀 더 넓은 인류에 대한 박애적인 존재로 변해가긴 하지만요.
음.. 말씀하시는 내용에는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것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일단 신의 무자비함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려는듯 해서
비행소년님께서 가지고 계신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답하는 것이 필요할것 같은데요..
비행소년님께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고 생각하세요..?
p.s.
기독교인들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나가는 과정을 산을 오르는 과정으로 흔히 비유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낮은 단계의 이해에서 예수님의 오심에 이르러서 결정적인 국면이 시작됐다고 보죠..
얘기하는 방향은 다른것 같지만 어떤 면에선 비행소년님의 마지막 말씀과 조금 공명하는 느낌도 없지않네요..
성경에서 아이까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가나안의 첫성 여리고를 정복하는 여호수아 6장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은 항상이 아니고 특별한 경우의 예외적이며 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 못하였을 때는 모두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진멸이라는 단어나 바친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헤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학살이나 당시 근동지방의 전쟁인 전리품을 취하거나 상대를 말살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즉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이 말살하라는 경우는 그들의 죄가 너무 심해서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심판하여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속의 의미가 들어있어요
여리고성이나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학살을 통하여 남은 사람들이 죄를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하는 그런 역할입니다.
구약의 아사셀 염소나 제사의 희생양이나 다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하실때는 무서울정도로 심판하는데 가아안 사람을 심판할 때는 이스라엘을 사용하시고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나 바벨론을 심판합니다.
과수원에서 병든 가지나 잘못 자란 가지를 잘아 주어야 되듯이 의사가 병든 다리를 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미스 코리아같은 미인이 사고로 팔을 다쳤는데 팔을 잘라내지 않으면 죽기에 잘라냅니다
아름답고 예쁜 손도 같이 잘려져 나갑니다
팔을 자르는데 손가락은 살릴수가 없습니다.
죄없는 아이들이 왜 학살을 당하느냐고 하시지만 어떤 아이들은 아버지가 능력있거나 부자라는 이유로 터무니 없이 호사를 누립니다.
비행소년님도 만일 저 가난한 인도의 천만의 아들이었다먄 아마도 지금의 삶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적당한 가정에 태어나셨기에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비행소년님의 노력이 아닙니다
굳이 학살이 아니라도 어떤 아이는 미국등 선진국에서 어떤 아이는 북한이나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굶주리고 못배우고 자라나지요
이건 인간의 기본적인 운명인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이 잔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하나님께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봐달라고 하자 그렇게 하신다고하고 결국 10명까지 내려갔지면 10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요나서에 보면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에 말못하는 짐승과 아이들까지 12만이 넘는 사람을 어찌 함부로 죽일 수 있느냐고 기회를 줍니다
두번째로 계시의 점진성이 있습니다.
초등학생에게는 초등학생식 대학생에게는 대학생의 교육방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점점 인간의 자율에 맡기고 스스로 선택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비행소년님
비행소년님의 답변을 한번 기다려봤습니다만.. 답이 없으셔서..
그냥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제멋대로의 답을 달아볼까 합니다.
사실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라기보다는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판단을 내리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인것 같아요..
제가 주로 노는 곳은 한 사진사이트인데요..
사진찍기는 현실적으로 드물어졌습니다만.. 전 그냥 그곳말고는 눈팅이상의 활동을 하는곳이 없네요..
아무튼 한때나마 사진에 관심을 가졌던터라 사진의 경우로 말을 하자면..
사진가에겐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 카르티에 브레송이 자신의 사진집에 붙여서 유명해진 말입니다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뭐랄까.. 사진이 나타내려는 미학와 의미의 모든 것이 한 장면안에 모두 담기는 절정의 순간이랄까요.. 대략 그런 의미로 사용되곤 하죠..
저는 어떤 이의 사유의 근본적인 방향을 정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원초적인 판단을 결정할 정도로 삶의 모든 의미가 오롯이 그 안에 담겨져있는 그런 장면, 가장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할만한 대목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제게 있어서의 결정적 장면은 예수에게서 발견됩니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의 오심과 그분이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셨던 방식,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그분의 가르침,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 예수라는 존재와 삶 안에 불교도집안에서 태어나서 불교도로 살던 제가 신의 살아계심에 대해 생각을 바꾸게된 결정적인 장면이 모두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제 이해에 비추어보자면..
비행소년님께서 말씀하신 저 대목에 대한 비행소년님식의 그런 해석은..
그런 대목을 정말로 존재하는 신의 "선악"여부에 대한 진지한 이해의 대목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설픈 형이상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면 어떤 주어진 사실이나 일들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을 찾는 문제는 제가 볼땐 보기보다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되거든요..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만으로, 신의 선함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대해 결정적인 증거로 삼기보다는..
그 이슈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판단의 단초가 없는지를 찾아보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 그 대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반박을 굳이 하려면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기전에.. 비행소년님이 저런 식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전제의 타당성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비행소년님께서 저런 식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 너희들이 믿는다는 성경에 의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너희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전혀 지지해주지 못한다..라는 전제가 담긴 이런 방식의 공격에 대해서..
성경을 이용해서 기독교인의 하나님관을 공격하고자할때 기독교인들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신뢰할만한 말씀이다'..라는 의식에 도달한 이유 자체를 보셔야한다는 겁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할만한 기록이다..라는 의식의 시작은.. 먼저 그런 종류의 이데올로기가 스스로의 이데올로기를 순환적으로 자증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한게 아니라..
역사속에서 일어난 일들(히스토리에)을 놓고.. 그 역사적 일들의 의미(게쉬테)가 어떤 것이구나..라는 의식에 도달한 결과에서 파생된 것에 해당하거든요..
그래서 역사적 사실인 예수의 죽음은.. 결국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대신 죽어주신 사건이다..라는 제자들의 이해와 결합하면서 신에 대한 근본적인 '상'이 형성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해의 본질이죠..("극한 인간의 고통안에 동참하시고 인간을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해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의 죽음에 이어진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이미 살아있던 상황에서 예고한 부활이었다는 것을 기억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정체성와 가르침에 대한 최종적인 '상'을 형성하게 만들었죠..
바로 이런 전체로서의 예수의 '상'이야말로 기독교의 출발점이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상'의 내용이 채워지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성경에 대한 권위부여는 이런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방식의 충실한 보존을 위한 보호장치의 성격이 상당히 짙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모든 장면들에 대한 '해석적 가능성'이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계시-예수- 이상의 위치에 올라서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인거죠.. 역사적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성경의 판단위에... 비행소년님이 발췌하신 대목의 해석가능성-신은 악하다는 식의 해석-이 올라서는 일같은건 사실상 일어날 수 없다는 얘깁니다..
그런 성경의 역할을 감안하지 못한채 성경을 가지고 기독교적 신관을 공격해봐야..
그 결과는 결국 일종의 기세싸움 이상의 제대로된 기독교 자체에 대한 공격이 되기 어려운 거랍니다..
신의 선함에 대한 믿음이 역사적 예수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위에 근본적인 토대를 박고있는 이상, 다른 곁가지같은 해석적인 가능성으로 신의 선함에 대한 의미규정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시는것 자체가 너무 순진한 생각인거죠..
기독교인들이 신을 선하다..라고 보는 논리구조의 핵은 간단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의 선함과 악함에 대한 판단은 결정적으로 예수가 선한가 악한가에 달린 문제로 보거든요..
(기독교는 늘 가장 결정적인 신의 자기계시, 신의 얼굴은 예수에게서 발견된다..라는 믿음을 핵으로 하는 신앙이니까요..)
결국 이 예수가 하나님이시다..라고 보는 기독교 고유의 핵심교의가 무너지지 않는한
예수야말로 신의 가장 최종, 최고의 자기계시다..라는 관점에서 신의 선함은 '사실상' 난공불락이 됩니다..
현실적으로만 보더라도 현존하는 무신론자중 누구도 예수의 악함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바트어만..? 그냥 사본의 이문에 대해 일정정도 의구심을 부추기는게 끝이죠..
도킨스..? 요즘은 무신론자들도 내세우기를 조금 꺼리는거 같던데요.. 아무튼 제일 과격한 그룹인데 예수의 악함을 주장하는것에 대해서는 손도댈 생각을 못합니다..
샘 해리스..? 히친스..? 그나마 히친스가 성역에 도전은 하죠.. 테레사도 까고.. 그래봐야.. 종교적 성인들에 대한 비판은 원래 현대적 소구계층이 존재하는거잖아요..
예수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일단 그런 주장을 요구하는 소구계층 자체가 없죠..
무신론자들도 예수의 선함에 대해서는 감명받는다는 식만 존재할뿐..
결국 기독교신의 악함을 실질적으로 주장하시려면 역사적예수의 악함을 주장하셔야 기독교인들이 진짜 신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최종이미지를 상대하시는게 되는건데..
예수가 악하다는 주장을 하는 무신론자 자체가 없으니.. 결국 신의 악함에 대한 곁가지 주장만 반복하는 무신론의 공격은 날카로울 수가 없는거죠..
p.s.
일단 비행소년님 입장에서는 분명 날카로우리라 생각하실법한 그런 언술이..
왜 실제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전혀 날카롭지못한 느낌을 받게되는가에 대해서.. 이정도면 어느정도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화/예술/과학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