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는 1976년에 출간한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약 나와 같이 여러분도 개인들이 공공 선을 위해 너그럽고 비이기적으로 협동하길 바란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는 거의 기대할 것이 없음을 명심하자.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너그러움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하자. (The Selfish Gene, 3, 많은 경우 출간된 한국어판과 번역이 다르다)

 

만약 인간의 도덕에 대해 끌어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타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타성이 생물학적 본성의 일부라고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The Selfish Gene, 139)

 

내가 직접 이 구절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어떻게 유전자 수준의 “이기성”이 개체 수준의 이타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런 책에서 책 전체의 테마와는 정반대 되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만약 자연 선택에 의해 친족애, 우정, 부부애, 양심, 죄책감, 정의감 등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만약 이런 것들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 아니라면 “개인들이 공공 선을 위해 너그럽고 비이기적으로 협동하길” 바라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다. 모든 인간이 사이코패스처럼 진화했다면 도대체 어떻게 비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인간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라고 했는데 “인간이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가 상징하는 것만큼 이타적이지는 않다(인간은 천사가 아니다)”는 뜻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이타성이 생물학적 본성의 일부라고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무한한 이타성이 생물학적 본성의 일부라고 기대하기 힘들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헛소리에 불과하다.

 

 

 

다행히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30주년 기념판(2006)에 붙인 머리말에서 이 구절에 대해 자기 비판을 했다.

 

이것은 특히 1장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너그러움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하자’라는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너그러움과 이타성을 가르치는 것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기적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오도적이다. (The Selfish Gene, ix)

 

 

 

도킨스가 이전에 단순히 말실수를 했으며 그것을 교정함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일까?

 

아니다. 도킨스는 30주년 기념판에 붙인 머리말에서 이런 말도 했다.

 

우리의 뇌는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을 일으킬 만큼 진화했다. 우리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은 피임 수단의 사용이다. (The Selfish Gene, xiv)

 

반면 1982년에 쓴 『확장된 표현형』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문외한인 비판자들은 부적응적으로 보이는 현대 인간의 행동들입양과 피임을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해보라’고 도전장을 던진다. ... 입양과 피임은 읽기, 수학, 스트레스에 의해 유발된 질병과 마찬가지로 유전자가 자연 선택된 환경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사는 동물[인간]의 산물이다. (The Extended Phenotype, 36)

 

피임에 대해 도킨스는 한편으로 “반란”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로 설명한다. 먹을 것이 부족했고 육체적으로 많이 움직여야 했던 과거 사냥-채집 사회에서 진화한 인간의 지방 축적 기제와 식욕 조절 기제가 먹을 것이 풍부하고 육체적으로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비만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진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로 생기는 부적응적 결과”다.

 

생물은 자신이 진화한 환경과 판이하게 다른 환경에서 살면 부적응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있다. 물고기를 땅 위에 올려 놓고 잘 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맨몸인 인간을 망망대해 속에 빠뜨려 놓고 잘 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로 생기는 부적응적 결과”라는 말은 진화 생물학을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라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도킨스가 말하는 “반란”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냥 시적인 표현이니까 꼬치꼬치 따지지 말아야 할까? 이 글에 인용된 구절들을 다 고려해 볼 때 그냥 시적인 표현이라고 넘어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도킨스는 『확장된 표현형』에서 “입양과 피임”을 비슷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그 둘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것들은 심지어 유전자의 독재에 반란(rebel)을 일으켜 예컨대 자신들의 능력이 되는 대로 많은 아이를 가지기를 거부할 정도다. (The Selfish Gene, 59)

 

우리는 대부분의 입양을 (그것이 아무리 감동적으로 보인다 해도) 내장된 규칙의 오작동(misfiring, 불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The Selfish Gene, 101)

 

피임에 대해서는 “반란(rebel)”이라는 딱지를, 입양에 대해서는 “오작동(misfiring)”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오작동”의 의미는 진화 생물학계에서는 명백하다. “친족애(예컨대 자식 사랑)를 위한 심리 기제가 오작동해서 애완 동물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라는 식의 설명을 들으면 진화 생물학자나 진화 심리학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한다(여기에서는 이런 설명이 옳은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이 진화할 때 자식-사랑 조절 기제는 자식을 잘 돌보도록 만듦으로써 유전자 복제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제가 자연 선택될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애완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발현되는 것이 바로 오작동이다.

 

수십 만 년 전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애완 동물을 기를 일이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개를 잘 구분해서 작동할 만큼 자식-사랑 조절 기제가 정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나 다른 동물을 애완 동물로 기르는 일이 많은 사회로 환경이 바뀌었다. 이런 과거와 현재의 환경 차이가 부적응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TV도 컴퓨터도 없었던 사냥-채집 사회에서 진화한 남자가 모니터 속의 벗은 여자를 보고 발기하는 현상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모니터 속의 여자와 실제 여자를 구분해서 후자의 경우에만 발기하도록 할 정도로 정교한 발기 조절 기제가 필요 없었다.

 

 

 

2003년에 출간된 『악마의 사도』에 있는 「악마의 사도」란 글에서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사도」는 이전에 발표된 적이 없는 글로 이 책에 처음 실렸다. 따라서 2003년 경의 도킨스의 생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T. H. 헉슬리는 1893년 옥스퍼드 대학의 로먼스 강연에서 ‘진화와 윤리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사회의 윤리적 발전이 우주의 과정을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에서 달아나지 않는 데에 있는 것도 더더욱 아니며, 그것과 맞서 싸우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하자.

그것이 바로 지금 조지 윌리엄스가 충고하는 것이며, 그것은 내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내 첫 저서를 끝맺으며 쓴 문장이 진리임을 언제나 확신해왔다. “우리, 지구에서 오직 우리만이 이기적인 복제자들의 독재에 맞설 수 있다.

피임법을 쓴 때마다 우리는 뇌가 다윈주의의 계획을 훼방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악마의 사도』, 27쪽 이하)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인간의 또 다른 독특한 점은 순수한, 사심 없는, 진짜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The Selfish Gene, 200)

 

 

 

여기서 “순수한, 사심 없는, 진짜 이타성”은 문맹상 친족 선택, 호혜적 이타성 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타성 즉 유전자의 이득을 초월한 이타성을 뜻하는 것 같다.

 

만약 인간의 이타성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라면 꼭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동물들도 그런 한계보다 더 이타적일 수 있다.

 

그것은 돌연변이 유전자 때문일 수도 있고, 유전자 표류(genetic drift, 유전적 부동) 때문일 수도 있고,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돌연변이, 유전자 표류,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자연 선택은 완벽하지 않아서 때로는 부적응적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그 부적응적 행동의 방향이 순수한 이타성을 향할 때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의 독재”와 “유전자의 독재에 맞서는 반란”의 의미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은 유전자의 독재에 순종하고 인간만 유전자의 독재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보는 이분법은 뭔가 이상하다. 부적응적 행동은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적응적 행동의 방향이 순수한 이타성을 향하는 것도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만 해당되도록 “반란”이라는 말을 쓸 수는 있을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서기로 의식적으로 결심한 후 행동하는 것을 “반란”이라고 부른다면 지구상에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콘돔 사용은 반란이 아니다. 콘돔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 “나는 이기적 유전자의 복제에 거스르기 위해서 콘돔을 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몇 %나 될까? 그냥 원치 않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 콘돔을 쓰는 것이다.

 

“원치 않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도 결국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어떤 심리 기제에서 나온 것이다. 성적 욕망과 자식-사랑 기제도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도록 하는 모종의 심리 기제도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끼리 티격태격 한다면 그것을 이기적 유전자에 맞서는 반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도킨스는 성욕, 친족애와 같이 자식을 낳도록 하는 심리 기제는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라고 보고, 골치-아픈--피하기 기제나 도덕성 기제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가정하는 것 같다. 그런 암묵적 가정 때문에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골치-아픈--피하기 기제나 도덕성 기제도 성욕 기제나 친족애 기제만큼이나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다. 따라서 양심 기제를 억누르고 싸가지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라면 (별 위험 없이 강간을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성욕 기제를 억누르고 여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도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 법칙에 맞설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늘을 나는 헬륨 풍선은 중력이라는 물리 법칙을 초월한 것이 아니다. 부력(결국 전자기력)이 중력보다 세기 때문에 뜰 수 있을 뿐이다. 부력도 물리 법칙의 일부고 중력도 물리 법칙의 일부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기성도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이고 인간의 이타성도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이다. 또한 도덕성 즉 양심, 규범, 죄책감, 도덕적 분노 등도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다. 적어도 일부 진화 윤리학자들은 도덕성과 관련된 심리 기제들이 자연 선택의 직접적 산물인 적응(adaptation)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성욕이 없다면 성욕과다(nymphomania)가 생기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도덕성 기제가 없다면 도덕성과다(moralomania?)도 생기기 힘들다.

 

성욕과다가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라면 도덕성과다도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다.

 

 

 

도킨스는 자연 선택에 너무 집착한다는 비판을 듣고 산다. 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볼 때에 도킨스는 적어도 나보다는 자연 선택에 덜 집착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남몰래 기독교적 세계관(인간은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선하기 때문이다, 도덕성은 자연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다)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도킨스는 좀 더 다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도킨스는 그런 기독교적 세계관을 잘 비판해왔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라는 테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자신이 했던 말과는 다른 생각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 인용한 도킨스의 말을 전투적(?) 진화 생물학자인 도킨스의 체면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그런 해석에 도전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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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