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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가 단지 기독교가 단지 계시종교라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주장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종교인 이슬람종교의 경우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보잖아요. 그외 대부분의 종교는 자기 종교만이 진리 나아가 계시의 유일한 독점성 나아가 무오류성을 주장하지 않아요.
일단 계시의 독점성은 기독교 전반의 흐름입니다. 무오류성은 기독교 내 일부 근본주의 흐름이구요. 사실 기독교 내에서도 요즈음은 무오류성은 함부로 주장을 못하고 있죠. 워낙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나 앞뒤가 맞지 않은게 많은니깐요. 다만 아직 개신교 내 복음주의권은 여전히 기독교 계시의 독점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알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특유의 이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다만 카톨릭의 경우는 요즈음은 조금 융통성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를 단지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원의 문제가 결정된다는 이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절대적 예정론은 기독교 신이 진정 사랑의 신인지 아니면 악의 창시자 내지는 폭군인지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많이 질문되고 있는 것 중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못하 지역이나 예수 탄생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를 알지도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진정 정의로운 것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흐강님이 한번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 계시의 독점성이나 무오류성을 기반이 되는 성경의 실제 형성과정을 보면 그게 독점성이나 무오류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계시를 신으로부터 실제 받은 것인지 자체가 오리무중이고 나아가 기존에 있던 여러 문서를 편집했다고 보는게 정설이라는 주장도 있구요. 모세오경의 저자만 보더라도 실제 모세가 아닌 바벨론 유수시절에 기존의 여러 문서들을 가지고 편집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잖아요. 설사 모세가 실제 야그 한 것을 후세 바벨론유수시대에 편집한 것이라고 해도 모세보다 더 앞선 사르곤왕의 이야기가 모세이야기의 원형에 해당된다는 주장이 있구요. 신약의 경우는 그 당시 무수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예수 이야기를 했고 각자 자유롭게 편집하고 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유파가 존재했구요. 그런데 이게 로마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특정 교리로 체계화되면서 교리에 맞게 정경을 채택하게 되구 말입니다. 정경이 기존에 있는게 아니라 교리를 중심으로 정경을 선택하는 그런 과정이 벌어졌다면 이게 계시의 독점성의 측면이나 무오류성의 측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지 의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불경의 편집이야기를 해봅시다. 불교에도 편집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이 다 인정하는 것인가는 의문이고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편집의 부분은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은한 논외로 할 수 밖에 없는거 아닌가요? 그리고 아침112님이 적극적으로 불교는 구전되었고 따라서 맘대로 변형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할려면 성경 역시 똑같다고 봐야죠. 그런데 이럴 경우 불교 자체는 꺠닫음의 종겨이므로 별로 타격이 없지만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므로 타격이 더 클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면서 불경이 편집되었을 가능성만 언급하는 것을 통해 불경과 성경의 유사성의 문제를 쉴드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거죠.
오히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구전되어 내려오지만 아직 성문화 되지 못한 여러 불경의 내용들을 가져다 하나의 단일적인 흐름으로 성문화하는게 위험부담이나 용이성에서 더 쉽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이미 로마황제라는 국가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타종교를 통제할 수 있는 건 기독교였구요. 반대로 이미 기독교국가에 의해 공인된 성경이 성문화 되어있고 그 당시 중국에 선교사까지 파송되어 있는 상태에서 기독교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가 불교경전 그것도 석가모니의 탄생과 연결시키는건 매우 위험한 것이죠. 나아가 그 당시 불교가 특정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암튼 이런 상식적인 의문 속에서 제가 아래에서 성경과 불경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발제를 한 것이고 기독교 계시의 독점성과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것과 연결시켜 질문을 한 겁니다. 그리고 자꾸 불교경전의 편집가능성을 물고 늘어지시는데 어느정도 있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불교일반의 공론인지 자체가 문제이고 나아가 그 수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합리적 의심으로 상식적인 차원에서 일단 문제제기를 한 겁니다. 입증책임의 문제에서 나아가 기독교특유의 계시의 독점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해 먼저 물어본 것이구요.
그리고 아래의 여러 주장을 한번 보십시오.
1. 창세기 -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 창세신화 짬뽕
2. 욥기 - 수메르 신화
3. 시편 - 수메르 시문학
4. 잠언 - 이집트 지혜문학, 페르시아 지혜문학
5. 노아 - 수메르 길가메쉬
6. 아브라함 - 수메르 케레트
7. 모세 - 악카드 사르곤, 수메르 점토판
8. 예수탄생, 죽음, 부활 - 조로아스터교 샤오샨트, 그리스신화 디오니소스, 미트라, 오시리스
9. 예수 가르침 주요부분 - 불교 법화경, 아함경 찔끔 찔끔 표절.
10. 예수 기적 - 불교 본생경 (석가모니 설화집), 디오니소스 신화
그리스의 목자, 술의신 - 디오니소스, 로마 바커스
11. 바울 - 영지주의자
12. 천국, 지옥, 천사, 악마, 선악 대립구도, 종말론, 메시아 사상 - 조로아스터교.
13. 엘로힘을 비롯한 엘로하, 엘샤다이 - 가나안 신화. 우가릿 점토판
14. 야훼 - 고대 셈족의 부족이름, 부족장. 고대 누비아신전에서 야훼 이름 발견됨.
15. 성모마리아 - 이집트신 이시스
16. 크리스마스 - 로마 미트라신 생일 12월 25일, 부활절 역시 같음.
대부분 태양 신 생일은 동짓날. 12월 25일.....
17. 예수 12제자 - 미트라교 12궁도
18. 안식일 - 유대인 안식일 토요일, 로마 미트라(태양신) 안식일 일요일
19.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베드로 계시록 - 조로아스터교 종말론
20. 삼위일체 -
조로아스터교 최고신 아후라마즈다, 스펜다마이뉴(성령), 샤오샨트(아후라마즈다 아들이며 구세주)
21. 모세율법 - 수메르 법전, 함무라비 법전
이 내용은 모 안티기독교까페에 나오는 건데 매우 축약해 놓은 겁니다. 안티바이블 pdf 찾아보시면 구체적인 야그가 나올 겁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순에 대해서는 제가 일일이 언급을 안해도 무수하게 언급이 되어 있구요.
이 중에 어느정도가 실제와 유사한지는 논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경전부터 신약까지 모두 이방종교가 먼저 있었고 그들의 일정한 모티브를 가져다가 자신의 것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의 어떤 일관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약은 수메르종교와 사르곤이야기와의 관계에서 그렇고 신약은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등과의 관련성에서 그렇습니다. 조로아스터교만 해도 이부분은 한신대 김경재교수의 주장도 있더군요.
이런 전반적인 관점에서 볼때 기독교 계시의 독점성과 무오류성이 진정 믿을만 한가에 대해서는 우선은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극적으로 믿을 수 있는 먼가가 주어진다면 또 모르겠으나 객관적인 텍스트를 놓고 볼때는 그렇습니다. 나아가 계시의 독점성에 기반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배타적 교리가 가지는 문제점을 또 언급할 수 있겠네요. 즉 예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진정 기독교의 계시만이 진리의 유일한 독점성과 나아가 거기다 무오류성을 가지고 있다는 객관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레드문님은 문제의식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가ㅌ습니다.
그 어떤 종교든 자기네가 주장하는 진리를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는 없고, 그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찾을 수도 엄씁니다.
다만 그 신도들으, 주관적 믿음으로 볼 때에 그것이 지ㄴ리라는 것이죠.
이건 비딘 무오류성이나 독점성을 주장하지 않는 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으면 좋은 말씀, 안 믿으면 개소리가 되는 것이 종교입니다. 약간 범위를 넓혀 보자면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에 대한 접근 자체를 바꾸심을 권해드립니다.
저야 무늬뿐인 가톨릭이고, 사실상은 범신론과 불가지론 사이 어느 지점에 저ㄱ당히 걸쳐 있으면서
인류학이나 민족지학, 신화학, 성서학 등을 조금씩 부끄러울 정도 접해본 입장에선 그렇게밖에 말씀드리기 어렵겠습니다
개개인이 그걸 그렇게 믿겠다는 것에 대해 제가 테클을 다는게 아니잖아요. 문제는 정교한 신학적 주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기들 교리외에 다른 교리나 다른 종교는 무조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렇죠. 그런데 그런 주장도 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그런 주장을 할 만큼 그들의 경전의 형성과정에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나 하는 것이죠.
종교에 대해서 저는 상당히 너그러운 편입니다. 굳이 과학과 싸울 필요 없다고 볼 정도로. 과거 유신진화론을 지지했을 정도로 기독교 신이 아닌 일반론적인 신의 가능성까지 인정했으니깐요.
문제는 특정종교의 경전의 객관적 형성과정과 그들의 계시의 독점성 무오류성 주장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매치될 수 있느냐의 하는 거죠. 나아가 그걸 타인에게 전도의 형태로 강요할때는 더욱 그렇구요.
레드문님/ 관점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레드문님은 그럼 성경이 경전으로서의 정합성이랄까 독창성이 있으면 지금 기독교인들 중 극단적인 분파들이 보이는 행태를 봐줄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전 절대 그렇게 못하겠는데요.
애초에 어떤 사람이 그 정도로 근본주의적이라고 하면 근거도 그닥 필요가 없습니다.
근거를 대 줘도 소용이 없고요.
무오류성 주장이건 유오류성 주장이건 다른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헛소리이고 자기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맞는 소리죠.
여기에 전제조건은 자기 종교의 교리를 100% 따른다고 가정할 때.
예를 들어 저같은 경우는 가톨릭이지만 교황무오설은 개소리라고 봅니다.
그건 무슨 경전 내용이나 신학자들이 틀려서 그런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개소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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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계시의 독점성과 무오류성이 진정 믿을만 한가에 대해서는 우선은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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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런 식의 의식에 대해서 좀 궁금한게 있는데요..
"계시의 독점성"과 "무오류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일때 진정 믿을만해지는걸까요?
전 그걸 잘 모르겠네요..
일단 저는 성경의 신뢰성은 다른 어떤 문서보다도 신뢰할만하다고 봅니다만..
아마도 레드문님의 성경관은 좀 저와는 다를것 같은데요.
혹.. 성경 자체의 문자적 진술에서 어떤 티끌만큼의 과학적 오류나 서술상의 미스가 있기만 하면 특별계시로서의 지위는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는거다..라는 종류의 믿음이 기독교적 성경이해라고 생각하시나요..?
소위 근본주의..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분들이 구축한 이해가 그런 식의 성경이해인데요..
기독교세계라고 하는 큰 관점에서 볼때.. 이런 관점은 전통적인 성경이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관점에 가깝습니다.
어린시절에 그런 식으로 성경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은 분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갑자기 빡 돌아가지고는 내가 알던 모든게 구라였어..이러면서 신앙을 포기하곤 하는데.. 여러모로 볼때 별로 권할만한 관점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것인가의 관점을 적절히 교육받기만 한다면 그것이 보여주는 놀라운 세계상이 있어요..
미술도 감상하는 소양이 필요하듯 성경의 가치도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때 그 가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가 하는 면이 있는데.. 대중적으로는 이런 감상포인트를 잘못 이해하는 통에 많은 오해와 불필요한 논란들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위에서 넘버링까지 하시면서 왕창 무더기로 적어놓으신 목록더비들 대부분(아마도 전부)은 그런 관점에서 적절히 가이드되기만 한다면 기독교신앙에 도달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할만한 킬러논증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생각한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성경에 나오는 그 인물들이 실제인물인 경우와 단지 문학적 주인공인 경우 그 차이는 아실 겁니다.
모세의 경우만 해도 모세이야기가 실제 역사속에서 이루어지고 그걸 회고하는 방식으로 실제 모세가 그걸 야그해서 전승된 경우와 그렇지 않고 다른 종교의 전승을 기반으로 자신들에게 맞게 편집해서 하나의 동화이야기로 만든 경우는 그 계시가 가지는 독점성의 면에서 다르다고 봅니다. 물론 모세가 실존했고 또 출애굽도 실존했지만 다만 모세의 배경이야기만 고대 영웅의 탄생설화를 차용해서 편집했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계시의 독점성은 어느정도 유지되나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반감될 겁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 나아가 기적과 같은 이야기가 후대에 누구에 의해 편집된 동화이야기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와 계시가 가지는 엄중한은 그것이 실제 있었을때와는 문명 다르니깐요,.
제가 보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http://www.youtube.com/watch?v=y51it5UmUyY 낸시랭의 신학펀치 "창세기 이야기는 왜 다른 신화와 비슷하나여"에 나오는 정도의 설명은 성경이 비롯 다른 종교의 모티브를 차용했음에도 그게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세 이야기나 예수의 행적이야기의 경우 그게 다른 종교의 모티브를 차용했다면 그 실제성의 문제와 연결되므로 계시가 가지는 독점성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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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이야기나 예수의 행적이야기의 경우 그게 다른 종교의 모티브를 차용했다면
그 실제성의 문제와 연결되므로 계시가 가지는 독점성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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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이야기에 대한 문제제기는 또다른 발제분량 하나를 채울만한 별도의 이야기이므로 다시 여기서 그 얘기를 섞어서 논의를 확장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것 같구요..
복음서의 예수묘사가 고대신비종교속에 나오는 신화속 인물들의 카피라는 식의 주장은 아차리아 S같은 19세기 아마츄어학자들이 제기한 이래로 한동안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학문적인 신빙성에 대한 결론은 명확히 내려진 상태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결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가 아니며 단지 엄밀한 검증능력이 부족한 대중들 사이에서 도시전설수준으로만 떠돌어다닌다고 보면 거의 정확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전문학자들은 이런 신비주의작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언제나 근거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지적하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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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대중작가들은 이러한 종류의 부정확함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들은 정보의 다양한 파편들로부터 최소한 바울시대에도 결코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보편적 신비종교를 만들어낸다.."
(Albert Schweitzer, Paul and His Interpret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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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빼어난 그 신비종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확정적으로 AD1세기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Gunter Wagner, Pauline Baptism and the Pagan Myster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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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빌려올만한 거듭남에 대한 기독교 이전의 교리는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기독교 이전의 신비의식들은 거듭남의 방식으로서 그들의 입문의식이라는 주장은 그렇게 지지할 수 있는 그 어떠한 현대적 증거도 없다.
그 대신에, 아주 후대 자료속에 발견된 하나의 관점은 초기의식들을 후대의 시각으로 역으로 읽은 것이다.
그러한 초기의식들은 입문자들의 '새로 태어남'에 대한 드라마틱한 묘사로 매우 불명확하게 해석되고 있다. 기독교 이전의 신비의식들이 실제용어로서 거듭남을 사용하고 있다는 믿음은 심지어 단 한개의 자료에서도 뒷받침될 수 없다.."
(Ronald H. Nash, The Gospel and the Greek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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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전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신들은 없다..
..
(고대신비종교의) 그 신화들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보고와는 매우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 신화들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대개가 식물의 계절적인 삶과 죽음의 순환에 관련되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의 부활은 반복되지 않는다. 또한 계절적인 변화와 연결되지도 않는다.. 죄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는 차원의 신들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근거는 없다.."
(Tryggve N. D. Mettinger, The Riddle of Resurr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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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신화들은 식물의 생장에 있어서 죽음과 재생에 대한 반복적이고 상징적인 묘사들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 중 그 어떤것도 구원을 제시하기를 의도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역사가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 같은 역사가들도 예수가 티베리우스 황제시대에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하에 있을때 죽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보고들도 매우 초기에 기록되었으며 목격자적 증언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Edwin M. Yamauc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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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나 그 종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디오니소스의 신비종교는 디오니소스적인 술취함의 환락으로서, 또 다른 세상에서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불안을 제거해 주었다.."
(Evertt Ferguson, Background of Early Christian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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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없다.."
(헬무트 퀘스터, 신약성서 배경연구)
=>아티스 부활흔적은 AD150년 이후부터 발견됨, 기독교형성기 혹은 그 이전에 발견되는 아티스의 부활흔적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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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초기의 미트라스 예배당은 AD2세기 초라고 볼 수 있다. 2세기 초로 볼 수 있는 소량의 비문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트라스 본문들은 AD140년 이후부터 나타난다. 미트라스교에 대한 증거로서 우리가 가진 대부분은 AD2,3,4세기의 것이다.
이것은 미트라스교가 초기 기독교의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론이 기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Edwin M. Yamauc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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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전적으로 미트라교와 다른 신비종교에서 그 내용을 빌려왔다는 것을 발견하고자 했던 역사가들의 열병은 이제 죽었다.."
<기독교신앙이 미트라를 비롯한 다른 고대신비종교로부터 차용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미트라 연구학회'[The Society for Mithraic Studies]의 "Mithras"지 학술발표,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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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흘러가는 분위기와 감을 잡는 것이 중요한데요..
지금쯤이면 대충 분위기파악을 하셨을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는 신화다]나 [시대정신]류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란 전문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이미 결론이 내려진 주장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명백히 학문적으로 결론이 난 사안임에도 다시 일부대중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처럼 유통되고 있는데요..
아마도 그 이유란..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대중들이 자신들의 반감에 적당한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해줄만한 컨텐츠를 찾고싶어한다는 그 욕구에 대한 시장적 필요성.. 그거 말고는 별다른 이유란 없는것 같아요..
조금 더 상위의 컨텐츠라면 도킨스, 데닛, 해리스, 히친스류의 컨텐츠일테고..
이런류의 컨텐츠는 하위이긴 하지만 나름의 재미는 있죠.. (저 잘난척하는 기독교인들의 낯짝에다 확 퍼부어주면 속이 시원해지는 뭐 그런 느낌의 컨텐츠랄까요..)
아무튼 요지는.. 이런 종류의 컨텐츠가 필요한 이들의 필요에 적합한 컨텐츠일뿐.. 그 주장의 근거와 합리성에 대해서는 애시당초 근거없음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주장이라는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조로아스터교를 빼셨네요. 신약과 관련되서 가장 중요한 건 조로아스터교잖아요. 미트라 종교의 경우 보통 서로 경쟁관계였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견해인걸로 압니다. 영지주의 자체는 기독교내 일부 분파이구요.
구약에서 수메르 종교 그리고 모세이야기, 신약에서 조로아스터 종교 그리고 아함경등의 내용 이런 게 사실 제가 제일 궁금한 부분입니다. 사실 나머지는 겉까지로 끼어 넣은 것이구요.
구약에서는 모세만한 인물이 없고 신약은 예수만한 인물이 없잖아요. 이게 비견되는 인물이 구약에서는 다윗 신약에서는 바울 정도구요.
모세는 유대교나 이슬람교 기독교가 모두 연결이 되는 부분이고 신약은 기독교만 관계되는 부분이지만요.

/이름없는 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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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창세기는 그 당대의 유대인들의 세계관 우주관을 반영한 신화적인 서술이고,
그러니 현대과학에 입각해서 보면 오류가 많은 텍스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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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생각해보세요..
우리시대의 과학적 우주론을 한 천년쯤 지나서 평가한다고 하면..
아주 가소롭게 생각할 대목들이 한둘이 아닐겁니다..
천년이후의 미래인들 입에서 "이 무식한 원시인들!" 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요..?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천년전의 원시인들이 이해하던 오류투성이의 우주론이라도.. 결국 그또한 세계이해를 위한 한 시대의 최선의 반영이라는 배경에서 봐야한다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할겁니다..
천년후의 인간들이라고 해봐야.. 이천년 삼천년이 지나서 보면 또 그때의 이해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허술한 오류투성이 이해가 될뿐이니까요..
결국 신이 스스로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내고자 한 인간의 마당은, 애초에 늘 세계이해의 수준이 변해가는.. 원래 이런 마당이라는 얘깁니다..
제 얘기는 그런 피할 수 없는 왜곡이 늘 일어나는 배경이라는 것은 감수하고 신의 계시가 이 세계속으로 들어왔다는 거죠..
원래부터 시대에 따라서 우주론적, 인식론적 이해의 확장이 펼쳐질것을 감수한 신의 절대적 계시의 역사적 개입이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3D인 지구를 2D의 지도로서 펼치고자 한다면 논리적으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왜곡현상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르키고자하는 올바른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는가의 차원에서 우리는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볼것인가의 실질적 차원이 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죠..
그래서.. 님의 말씀을 저는 이렇게 바꾸어서 이해한다면 서로 공감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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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창세기는 그 당대의 유대인들의 세계관 우주관을 반영한 신화적인 서술이고,
그러니 현대과학에 입각해서 보면 오류가 많은 텍스트에 불과하다..
=> 창세기는 그 당대의 고대인들의 세계관 우주관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계시받은 히브리인들의 신관이 펼쳐진 역사적 맥락속에서의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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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꾸어서 이해한다면..
서로간의 이해에 큰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요는.. 불완전한 이해의 세계속에서 완전한 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양상의 본질을 우리가 적절하게 캐치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원이 남아있다..라는 것이겠죠..
전 그런 점에 대해 긍정적이므로 기독교인으로 존재하는 것일테구요.. ^^;

/이름없는 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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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런 오류에 빠져있는 인간의 의식속에서, 또 철저하게 고대인들의 그런 경험칙에 기반하여 기술되어 있는 그 창세기(나아가 성경 전반)의 신화적 진술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는 말이 오늘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뭐냐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이 실증주의의 메스를 들고 나온 자유주의 신학의 십자포화 속에서 심하게 휘청 거렸지만, 결국 그것을 극복하면서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변증해낸 길은, 그런 신화적 진술들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포기하되 그 신화적 진술들 속에 숨어있는 신앙의 조상들의 영적인 숨결들을 그 당대의 세계관적 배경속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묵상하고 적용하고 그럼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끊임없이 재해석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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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깁니다만.. 저는 이름없는 전사님께서 저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진보적 신앙이해를 바라보시는듯 한데.. 저는 그분들의 견해와 전통을 존중합니다..
또 기독교적 전통안에서 그런 분들의 이해또한 한 흐름으로 존재한다는걸 당연하게 인정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이 대목..
"그 신화적 진술들 속에 숨어있는 신앙의 조상들의 영적인 숨결들을 그 당대의 세계관적 배경속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묵상하고 적용하고 그럼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끊임없이 재해석해야한다"..라는 이 대목에 대해서는..
그런 관점을 적용하는 흐름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실 필요도 있지 않나 싶은거죠..
이런 결론에 의해 파생되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하는거예요..
어떤 이는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를 역사적 의미는 완전히 배제된 신학적 시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역사성과 신학성이 혼재되어진 이야기로 보기도 하죠..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성경은 역사적 성격과 함께 편자의 신학적 사유가 함께 펼쳐지기 때문에 그 특성은 그 자체로 신중히 고려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역사적 오심과 그 죽음, 부활에 대해서도 그 이해의 스펙트럼은 수없이 다양하죠...
하나의 말로 짚어내기는 쉽지않겠지만..
하지만.. 대략의 그림에서 언제나 기독교전통은 역사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의 실제성과.. 그 결정적 드러냄이 예수에게서 있었다는것, 그 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실제성에 기독교의 신앙이해의 본질이요 많은 학자들 또한 그 이해에 동감하는 차원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건 다른 종교와의 만남이건.. 포용주의적 관점을 나타내는 관점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소수의 흐름인 완전한 다원주의적 관점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적자취급하는 태도는 뭔가 기독교의 흐름을 거꾸로 이해하는 왜곡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흐름은 기독교의 전체적 전통과 흐름에서는 소수의 흐름이라는 점에서
그런 흐름에 대한 객관적 위치는 분명히 하셔야할것 같아요..
p.s.
아 그리고 제 비유는 지동설쯤으로 반론할만한 얘기가 전혀 아닌데요..?
앞으로 펼쳐질 과학의 이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본질적 변화의 가능성을 늘 내포하고 있답니다.
지동설 얘기따위로 더이상의 변화는 없다는 식의 이해는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겨우 4%정도만을 이해하고 있을뿐이라는 과학자들의 관점만 보더라도 너무 허술한 이해세요..
하다못해.. 현대과학은 우리가 일종의 프로그램적 투사로서의 존재가능성 자체조자 실증적으로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인데요.. 현대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앙심은 건강한 과학이해를 위해서 별로 좋은 관점이 아닌것 같습니다..
과학은 주어진 모든 증거들 사이에서의 가장 좋은 설명으로 보시는것이 좋지..
그 자체로 절대적 진리취급을 하시는건 별로 좋은 과학이해가 아닌것 같아요..

/이름없는 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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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건 다른 종교와의 만남이건.. "포용주의적 관점"을 나타내는 관점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소수의 흐름인 "완전한 다원주의적 관점"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적자취급하는 태도는 뭔가 기독교의 흐름을 거꾸로 이해하는 왜곡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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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계를 분명하게 밝히질 못했나봅니다..
저는 포용주의적 관점까지는 기독교라고 봅니다.
하지만 완전한 다원주의적 견해에 대해서는 기독교로서의 관점이라고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좀 애매하다고 생각해요..
더우기 그런 다원주의적 견해가 그냥 소수흐름으로써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적 정체성 자체를 일종의 불교적 카피라고 본다던지..
고대신비종교의 카피라고 본다던지..
기독교에 대해 근거없는 주장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흐리는 주장을 펴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이 논리적 정당성이 있는지를 따져주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입니다.
일단 레드문님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도 전혀 아니고..
불교인의 입장이며.. 불경이나 고대신비종교라는 명백한 문헌학적인 근거가 부실한 논리로 기독교가 아이덴티티가 없지않느냐..라는 식의 주장을 펴신 경우인데..
그것에 대해서.. 꽉막힌 신자가 아니라는걸 보여주느라.. 그런 논리의 부실함을 지적하지 않아야되는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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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의 핵심은 (맞고 틀리고를 판단해야 하는 문제에서) 이미 과학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틀린 생각에 기반한 세계관 우주관 혹은 그런 인식들에 바탕해서 성경의 기자가 기록해 놓은 수많은 구절들은,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계시라는 권위를 아무리 입혀본 들 그게 맞는 소리로 돌변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얘기를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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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저와 생각이 다르세요..
오히려 현대우주론은 다시금 창조론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창세기가 틀린 과학사실에 기반했다는 것도 적절하지 않죠..
창세기는 그 당대의 수준에서 묘사할 수 있는 창조의 순간에 대한 아름다운 시죠..
하늘과 달과 태양과 별.. 모두가 고대의 신적숭배물들이고..
창세기는 고대근동인들이 섬기던 모든 위대한 신적숭배물들이 결국 하나님의 피조물일뿐이라는 저자의 유일신신학을 담아낸 글이예요..
애초에 그것이 담아내려는 글의 목적 자체가 전혀 과학적 사실의 전달이 아닌 신학적인 서술이라는 점에서.. 저는 애초에 틀린 생각에 기반한 세계관이라는 님의 말씀은 글의 신학적 담론의 특징을 자연과학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오류속에서 적절한 이해가 아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라면.. 우주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놀라운 미세조정은 신의 창조의 관점과 대단히 이례적인 정도로 잘 어울리는 느낌 아닌가요..?
문학적 관점을 자연과학적 시선으로 봐서 애시당초 틀려먹은 생각이라고 단정하는 님의 단정에 대해서..
망원경을 써야할 대목에 현미경을 들고 따지는 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없는 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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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은 기록된 성경말씀 안에 갇힌,이미 그 자체로 완결된, 내부로 향해 닫혀있는 폐쇄된 체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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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기독교 신앙도 어느정도 유연해져야 한다는 전략적인 태도를 취하시는 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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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게 님의 생각의 요지이신듯 한데요..
제가 알고 배워온 기독교의 세계이해의 상과는 좀 다르군요..
인간의 성경이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과 인식론적인 지평의 확장에 따라 계시에 대한 이해의 차원은 발전할 수 있다는 태도가 기독교인의 바른 이해라는 것이 복음주의 신앙의 토대에 해당하는 건강함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아무튼 저 혼자서만 이런 생각을 한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으실테니..
기독교적 세계이해의 차원이 닫혀있는지 발전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글을 통해 돌아가는 분위기를 한번 소개해드리는걸로 제 생각을 대신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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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는 이단의 본질을 연구한 유명한 책에서 결국 이단이 나오게된 여러 압박요인을 찾아냈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인은 터너가 아케이즘(archaism)이라 부른 의고주의(擬古主義)이다. 기독교 사상이 발전할 필요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터너의 논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게 하는만큼 무척 의미심장하다. 즉, 교회는 순전히 형식적인 차원을 제외하면 이전 공식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 사도적 교회와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시대마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도전이 떠올랐기 때문에 성경공식을 무조건 반복하는 일은 신앙을 지키고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저술은 면밀히 읽으면 이 논점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기독교 전통에 대한 충성은 사실상 혁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념들과 공식들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올바로 나타내기에 부적절하다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짐에 따라 아타나시우스는 신앙의 근본주제를 표현하는 참신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중대한 질문은 "기독교 신앙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어떤 구체적이고 새로운 교리형식이 필요한가?"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교리형식을 상상력없이 그냥 반복하는 것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살아있는 전통을 적절하게 또는 진실하게 전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지금은 트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을 막론하고 대다수 신학자가 교리의 발전이라는 사상을 널리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이상 특별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학자는 이제 이런 식으로 주장할 것이다.
"기독교회는 스스로 기존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지, 혹은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인지를 돌아보는 자기비판과 자기평가의 과정을 줄곧 밟아왔다"고 말이다.
..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후대가 선대로부터 이어받을때 그 표현방식을 존중하되 다시 검토하고 싶어하는 만큼, 기독교 정통이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한때는 긍정적이고 유익한 것으로 간주했던 어떤 접근법이 지금은 용납될 수 없거나 심지어 이단적인 것으로 배제되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p108-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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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독교회의 세계이해가 조금이라도 변하면 곧 그것은 기독교회의 정체성의 해체..라고 보시는 님의 생각은 기독교인들의 세계이해에 대한 정당한 이해로 보기에는 너무 협소한 이해의 틀인것 같습니다.
애초에 기독교적 세계이해의 발전의 개념은 이미 1700년 전의 아우구스티누스때 이미 이해되고 추진된 오래된 전통의 차원이 있답니다..
기독교회는 언제나 역사속에서 기독교회주변을 둘러싼 여러 도전속에서 예수로 인한 계시의 진정한 의미를 당대의 언어속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작업을 늘 해오고 있고 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조금이나마 님의 반론에 대한 어느정도의 답이 되었길 바라며.. 추가적인 반론이 없다면 저도 그만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저녁되세요.. ^^;
전사님 전사님의 아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반면 성경 자체를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로 전제하지 않고, 성경 역시 당대의 한계에 갇힌 인간적인 서술이요, 그러니 서술의 배경을 다각도로 검토해서 기록된 말씀에 깔린 다양한 한계들을 짚어내고자 비평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그 자체 부터가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고, 그러니 이로부터 재정의 되는 기독교 신앙은 결국에는 그 정체성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든, 케리그마의 하나님을 복원하는 신정통주의를 표방하든 세속의 공격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한발 뒤로 물리는 거고, 방향성이 그렇게 가게 되면 결국에는 신앙의 자기해체가 가속화 되어 기존의 정체성이 파괴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대신학의 다양한 논의들이 탄생하게 된 거고요. |
다만 성경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허무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입니다.
성경자체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속에서 일정부분 전사님의 이해와 같은 주장들이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지만 그건 대중을 직접 상대하는 사제들의 행위였고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각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도 있어왔습니다.
다만 극단 적인 문서비평이나 역사비평은 근대에 들어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 주장들 역시 한물간 시대의 유행이 되었고 그러한 주장에 대한 학문적 반박 역시 활발하니까요
성경이 40명 이상의 저자에 의하여 수천년에 걸친 시대를 다르고 오랜 시간을 통하여 형성되어 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고 그러한 성경을 통일성있게 일관된 메시지로 엮어 내는 것이 신학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성경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고 넓은 다양한 해석의 지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사님의 주장은 축자 영감설을 신봉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일반적인 이해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들은 설교에서 성경을 인용할 때 바울은 또는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큰 테두리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만 실제적으로 좁혀서 들어가자면 바울을 통하여 바울의 하나님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들 조차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런식으로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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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 교리외에 다른 교리나 다른 종교는 무조건 지옥에 간다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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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교안에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은 통상의 건강한 기독교권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일것입니다.
다만 예수라고 하는 계시의 차원은 다른 종류의 빛에 대해 상대적 우위로 설명하기보다는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빛과 진리에 대해 그 빛의 내용을 의미있게 만드는 본질적 존재다..라고 보는 것이죠..
즉 예수는 모든 형상이 그 자신의 형상일 수 있고, 자기 스스로의 의미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공급자같은 존재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예수의 자기진술은
오만이나 배타의 관점보다는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채워주는 충만과 공급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이해가 아니겠나 싶어요..
물론 이런 얘기를 해봐야.. 뭔 소릴하건 결과적으로 해석하면 다른 교리나 다른 종교는 무조건 지옥간다는 결론 아니냐고 요약해버린다면 소용은 없겠죠..
하지만 원 맥락과 취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봅니다..
'은혜'를 오히려 '저주'로 번역해버리는 식의 태도속에서 많은 것들이 왜곡되곤 하니까요..
그럼 예수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지옥행은 확실히 기독교가 주장하고 있는 바인가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카톨릭과 개신교의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을텐데요..
(일단 개신교는 워낙 여러주장이 난립하니 하나로 모아서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개신교의 교황이라고까지 칭해지면서 범복음주의진영에서 확고한 리더쉽을 인정받는 존 스토트의 견해로 살펴보죠..)
일단 퀴즈.. 다음의 문장은 옳을까요 틀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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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교회바깥의 구원을 부정한다.
하지만 카톨릭은 교회바깥의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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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위의 문장은 땡~~에 가깝지않나 생각하는데요.. .
로마카톨릭의 경우부터 살펴보자면 이렇네요..
지금 로마카톨릭의 구원에 대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문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과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선언'(DOMINUS IESUS)에서는 구원의 문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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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를 벗어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제시하는 해결책들은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신앙에 위배된다..
..교회의 변함 없는 선교 사명인 복음 선포는 오늘날, 실제적으로(de facto)뿐 아니라 원칙적으로(de iure)도 종교 다원주의의 정당화를 모색하는 상대주의 이론들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다.
..
전에 없이 더욱 유포되어 가는 이러한 상대주의적 사고 방식을 치유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결정적이며 완전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여야 한다.
..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제한적이고 불충만하며 불완전한 성격을 갖기에 다른 종교들 안에 나타난 계시에 대하여 보완성을 갖는다는 이론은 교회의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본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진리는 어떤 역사적인 종교를 통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도,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전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나지도 않으며 파악될 수도 없다고 하는 신념에 있다.
이러한 입장은 하느님의 구원 신비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고 하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앞의 주장들을 근본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교 신앙(theological faith)과 타종교의 신념(belief)에 대한 구별이 명확하게 있어야 한다. 신앙은 “우리가 그 신비를 올바로 꿰뚫어 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21) 계시된 진리의 은총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임에 반하여, 타종교의 신념은 인간이 진리를 찾는 과정에서 하느님과 절대자와 맺는 관계에서 취하고 행동의 바탕으로 삼아 온 지혜와 종교적 열망이라는 인간적 보화를 이루는 경험과 사고의 요약인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과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선언'(DOMINUS I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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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카톨릭에서 다른 종교전통에 있는 이들의 구원을 인정했다면서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이동했다고 여겨지는 얘기는 뭔가..?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희의 문헌인 [인류의 빛]이 그 의문점의 진원지인데요..
예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여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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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양심에 따른 충실한 생활을 하는 경우..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질. 수.도. 있.다.
('베풀어진다'라는 의미의 'do attain'이 아닌 'can attain'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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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걸 보면 로마카톨릭은 무조건 포용적이라는 통념과는 좀 뉘앙스가 다르죠..
아무튼 구원문제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판단은.. 다음의 몇가지 명제로 정리해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혹 틀린게 있다면 카톨릭신자분들께서 지적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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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의 구원관]
- 타종교에는 일반계시적 차원에서의 빛이 존재한다.
그러나 타종교에는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 복음을 들어보고도 거부한 이에게는 구원을 얻을 어떤 길도 존재하지 않는다.
-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개인들은 그들이 양심에 충실한 삶을 살 경우
예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can at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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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에 비교해서 개신교의 대표격이랄 수 있는 존스토트의 구원관을 살펴보자면 대충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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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 존 스토트의 구원관]
- 타종교에는 일반계시적 차원에서의 빛이 존재한다.
그러나 타종교에는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카톨릭과 동일)
- 복음을 들어보고도 거부한 이에게는 구원을 얻을 어떤 길도 존재하지 않는다.(카톨릭과 동일)
-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개인들은 그들이 양심에 충실한 삶을 살 경우
예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질 가능성이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은
이 질문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불.가.지.론.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출처 :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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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요약하자면 앞의 두 대목은 같고..
마지막의 대목.. 복음을 들어본적도 없는 이들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판단의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카톨릭은 그 비기독교인이 양심에 따른 삶을 살 경우 구원을 얻게될 가능성에 대해 "일어난다"가 아닌 "일어날 수도 있다"라는 차원..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판단을 유보한다"는 차원에서 발언합니다.
(존 스토트의 관점은 지식적으로 알 수 없다..라는 차원보다는 인간의 최종운명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의 판단에 일임한다는 차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것 같습니다.)
대략 요약하자면 기독교권에 있어서 복음이 인간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중요성에 대한 관점은 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어느쪽에서건 포기하는 쪽은 없다고 할 수 있고.. 통속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예수이름을 믿지않으면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지옥행을 말한다..라는 식의 이해는 좀 과장된 면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글쎄요. 이 부분은 어거스틴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예정론 즉 이중예정론이 머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부터 야그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아가 개신교의 경우 물론 신학적으로는 견해가 대립하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존 스토트같은 영향력있는 목사라 하더라도 구원론과 관련된 저 발언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판받았던 걸로 압니다. 즉 개신교의 주류는 여전히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 지옥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걸로 알아요. 그리고 존 스토트와 같은 경우도 사실은 그들 신학적으로 상당히 껄꺼럽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을 그냥 회피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반면 카톨릭은 바티칸 제 2공의회에서 그나마 정식적으로 상당히 변화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카톨릭의 경우 다른 종교 그 자체로 구원이 있다고 보지는 않아요. 제가 쓴 표현도 그걸 의미하고 쓴 게 아닙니다.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론을 염두하고 쓴 것입니다. http://blog.daum.net/dariaofs/4039
상대적으로 분명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지역이나 타 종교에 대한 태도에서 카톨릭은 전향적인 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게 다원주의를 인정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그들은 배타적 독점주의에서 배타적 포용주의로 이동했을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들의 구원의 유일성은 포기한 것은 아닌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카톨릭은 연옥교리가 있잖아요. 비록 이게 한때는 면죄부판매를 위한 교리를 악용되기도 했지만 나름 사후구원의 문제와 연결이 되니까 교리적으로 융통적인 면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로마카톨릭은 교회우위의 입장에 있다보니.. 성경이 강하게 말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라도 이성의 관점에서 어느정도의 발란스를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탄트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경향이 있죠..
그에 비해.. [오직 성경으로]라는 오랜 전통을 가진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이 강조하는 대목을 강조하되 성경이 강하게 말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기를 꺼려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존 스토트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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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같은 영향력있는 목사라 하더라도 구원론과 관련된 저 발언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판받았던 걸로 압니다. 즉 개신교의 주류는 여전히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 지옥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걸로 알아요.
그리고 존 스토트와 같은 경우도 사실은 그들 신학적으로 상당히 껄꺼럽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을 그냥 회피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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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 "껄끄럽기 때문에 회피한다는 느낌"이라는 레드문님의 이런 느낌은 저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데요.. (그의 주장을 지지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인한것일 수 있겠네요..)
아무튼 그가 어떤 문맥속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는가를 전체적으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듯하니 관련대목을 아래에 인용하겠습니다만..
일단 제 느낌부터 말씀드리자면..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하나님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요구한 바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18:25)라는 관점위에서 전개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신자에게는 두가지 태도가 요구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창조자는 본인이 스스로 계시하신 모든 사랑과 정의와 공정함의 기준에서 모든 일들을 처리하신다는 것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태도.
둘째는 계시로서의 성경이 분명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논리적 사각에 대해 합리적 추론은 가능하되 성경이 말하는 수준의 권위있는 주장으로 여기지 말아야할 태도..
제가 보기에는 존 스토트는 성경이 계시하는 공정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준에서 합리적 추론을 펴되 자신의 추론에 성경의 계시만큼 권위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자신의 추론을 성경위에 두지 않으려고 자신을 절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태도는 신자라면 누구나 요구받는 태도(위의 두가지 태도)에 대한 정당한 반응일뿐 레드문님의 말처럼 "껄끄럽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다"라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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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인의 구원에 대해]
"..노먼 앤더슨 경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종종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죄의식과 죄책감,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무능력에 대한 인식 등으로 그저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던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설령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을지라도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근거로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또한 주장했습니다.
이 제안은 두 가지 특별한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 단서 조항들, 그중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점과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세주시라는 점을 뒷받침해줍니다.
둘째, 그 제안은 약간의 성경적인 근거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자들은 비록 오실 그리스도에 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을지라도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먼 앤더슨 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유대인이 영접과 축복을 받은 이유는 그가 규정에 따라 바친 짐승 제사 때문도 아닐뿐더러 그의 회개와 하나님의 자비 앞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갈보리 십자가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 행하신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기독교와 세계 종교들>).
이제 저의 입장을 말하자면, 저는 노먼 앤더슨 경의 견해에 매력을 느끼며, 또 그의 견해에도 그렇고 다른 주장들에도 그렇고 그 속에 진실이 포함됐을 수도 있지만, 가장 기독교적인 입장은 이 질문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시고 대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셨습니다(눅 1:23-24).
실제로, 복음에 응답해야 할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주 엄중한 경고들이 여러 차례 반복된 반면, 복음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실지에 대해서는 계시돼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그분의 이런 성품들이 십자가에서 충분히 계시됐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5, 표준새번역)라는 아브라함의 질문이 바로 우리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존 스토트,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heiamoira&logNo=140180584899&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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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전사님
성경에서는 인간은 참 신을 언제나 알 수 있다고 봅니다.
하늘과 별과 자연과 그 속의 모든 생명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의 창조자인 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성경의 진술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는 모든 시대속에서 늘 자연 그 물적세계 너머의 존재를 향해서 섬기고 절하고 숭배하는 그런 역사적 종교현상이 전 역사속에서 있어왔다는 것을 알지않습니까...
결국 창조자가 누군지 몰라서 엉뚱한 석상에다 절하는 것이지 그 마음의 본질은 이 우주의 창조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담은 것이죠..
바로 그런 마음.. 신을 찾는 마음은 인간 내면의 보편적 심성이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성경이 관점은 그런 기본적인 신을 향한 마음이 언제나 올바른 신의 모습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지 못하고 엉뚱한 대상과 자연물들, 쓸모없이 사라져갈 무엇들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져서 인간이 창조된 원래의 풍성함과 기쁨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노먼 앤더슨경이 생각한 대목은 이런부분에 착안한 겁니다..
혹자의 경우에 엉뚱한 대상을 섬기더라도 실제로 그 사람이 섬기고자 했던 원래의 대상은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었다는 것이죠.. (불상앞에 절하는 불자가.. 나무덩어리를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듯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가 엉뚱한 대상을 섬기는 전통속에 있더라도
그 양심속에서의 정결함을 지킨다면.. 결국 그 정결하고자 하는 마음의 바탕은 참된 하나님을 향한 바탕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수도 있지않은가..하는 추론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대속적인 십자가죽음의 은혜가 그런 이들을 위해서도 적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전 이런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합리성은 또한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것도 사실이죠..
결국 하나님의 모든 주권을 인정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합리적 사고는 할 수야 있지만..
그런 합리적 사고가 신의 결정이라고 선포할 수는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모든 것을 사랑과 정의, 공정하게 처리하시는 신의 판단앞에서 입을 닫고 그분의 결정을 기다리는것이 인간의 마땅히 할 바가 아닐까 생각하구요..
명백하게 신이 스스로의 뜻을 밝힌 분명한 뜻은 인간을 위해 신이 준비한 유일한 준비란 신이 인간이 되어서 인간을 대신해 죽음을 당한 그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일때 신의 자비를 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신의 뜻이고 다른 논리적 사각에서 명백한 신의뜻은 없다는거죠.. 다 인간의 추측일뿐...
p.s.
기독교인이 신앙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말한 이런 이해에 모두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통해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니님의 모든 판단은 충분히 공정하시니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름없는 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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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정말 이해가 안가는 것이..무수한 자연물들에 신이 불어넣은 기운이 깃들어 있어 인간이 부지불식간 그 자연물들을 경배하는 행태를 보이는 거고, 그렇게 (알지 못하여)엉뚱한 대상을 향한 순수한 종교심이 발현된 것을, 바로 그 순수한 마음의 바탕만을 굽어살피사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으로 까지 인정해 주시는 거라면..애초에 성경에는 "우상숭배"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가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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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고대인들의 수준에서 신을 향한 본능적 마음과 그 표현사이에는 언제나 쉽지 않은 간격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예요..
결국 어떤 형상으로도 신을 삼지말라는 십계명을 받으러 모세가 올라간 틈에..
이스라엘이 했던 행동은.. 황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 황금송아지가 우리는 이집트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시다"라며 그 황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선언하는 일이었거든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준으로는 바로 그 황금송아지가 여호와처럼 느껴졌던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그 황금송아지보고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분이라는 식의 표현을 쓸 이유가 없잖아요..
결국 이런 참신을 향한 마음과 그 실제적 표현사이에서 어긋나지는 왜곡사이에서
하나님의 답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의 유일성이란 결국 인간안에 있는 종교심이 결국 참신을 향한 마음이라는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찾아주신다는 차원에서 보시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선포된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이라면 감안의 여지가 없겠지만..
선포된 경험조차 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순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감안의 여지가 있지않겠나..하는 생각을 저는 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생각과는 별도로.. 모든 것을 판단하실 권한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할 수 없죠..
결국 끝까지 가보면.. 누구는 구원을 받는다 못받는다 따져봐야 답은 없고.. 신의 선함과 공정함을 얼마나 깊이 신뢰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요..
신의 판단이 영 부실해보인다는 사람에게는 어떤 합리적인 설명을 해봐야.. 답은 없는겁니다..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예수라는 모습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공정하심에 대한 신뢰감속에서 매사를 보는 사람들일뿐이예요..

/이름없는 전사님
아.. 오해의 소지는 있군요..
하지만.. 황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사례는.. 신을 숭배하는 마음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지.. 이스라엘이 심판받지 않아도 좋을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죠..
왜냐하면 지금으로 보면 어떤 성직자도 일생에 단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한 기적들을 모두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을 여전히 배반한 경우로 봐야할테니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이들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노먼 앤더슨의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속에서 양심을 지킨 이들에 대한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 다른예는 서로 충돌하지 않죠..
제가 이스라엘의 예를 든 이유는 인간안의 종교심의 뿌리는 결국 신으로부터 근원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일뿐.. 이스라엘사람들이 신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경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한것 같네요.. ^^; )
뭐 오해의 소지를 드린듯 합니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을 섬기고 싶은 마음(종교심)의 뿌리는 신으로부터 왔다는 얘기는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그런 종교심이 즉시 타락의 경향을 띤다는걸 지적합니다.
결국 종교심에 의존한 양심은 그 자체로는 구원에 이르기에 전혀 적절한 모습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대목에서 성경의 판단은 분명하죠..
다만 저는 하나님의 공정하심과 자비하심이 예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회속에서 양심에 걸맞는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발휘되더라도 놀라울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하나님의 공정하심의 차원에서 고려해볼 지점이 있지않나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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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순수한 종교심의 발현으로 모르고 우상숭배를 한 사람들이 그 양심과 순수한 마음의 바탕을 굽어보사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는 추론은 최소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한에서 도무지 도출될 수 없는 결론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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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교회안의 어떤 분들도 님과 비슷하게 생각할것 같습니다만..
최소한 그것은 주어진 성경에 대한 일종이 추론이지.. 명시적으로 드러난 대목이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현대로 따지면 온갖 기적을 다 맛보고 배도한 경우라.. 사실 예수의 이름을 들어본적도 없는 이들에 대한 케이스와는 다르죠.
기독교적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위해 준비하신 완전하고 유일한 대답이 예수시라는 것이고.. 이 예수를 통해 인간은 진정한 창조의 원래적 목적에 걸맞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변신이야기죠..
논리적으로 못들어본 사람은 어찌되는가에 대한 사변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게 답입니다.
성경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물어보니 논리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추론하는 것이지 교회가 계시..라고 소중히 여기는 것 안의 이야기는 아니라는건 언제나 유효합니다..
레드문님 / 유대교나 기독교의 경우 주변 종교들과 유사성이나 표절주장은 이미 결론이 난겁니다
디즈레일리님 말씀처럼 문화나 생활양식 기타 등등이 사람들이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들듯이 그런 정도의 영향은 주고 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안티들이나 일부 맹목적 기독교 비판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체적인 사례등에서 유사성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거나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하여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제시하신 목록 역시 아래 제가 대충 반론했지만 의미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을 이야기하는데 이 문제는 다른 종교는 다른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데 기독교는 말한다는 차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입니다
종교는 탄생 삶 죽음에 대한 가장 치열한 고뇌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기위해 나름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사성제나 연기설 윤회등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으며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양립이나 타협이 가능합니까?
작년에 도법스님이 조계종 화쟁위원에서 아쇼카 종교평화 선언을 하려고 하는데 그 초안에 창조를 조금 인정하는 듯한 문구가 있어 내부 반발로 무산이 되었습니다.
개신교 지도자들이 좀 멍청하고 삽질을 해서 그렇지 가톨릭은 같은 기독교인 개신교에 대하여 세례도 성직도 인정안합니다
교회로도 인정안하는건 물론이고요
가톨릭은요 대내용과 대외용이 있습니다
즉 자신들의 고유 교리는 변하지 않지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주장은 변합니다
겉으로 보면 포용적이고 진보적인듯 하지만 여성성직 문제나 개신교 인정문제 교회밖 구원문제등 핵심적인건 다 보수적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라고 칭하여서 대외적으로 개신교를 인정하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개신교의 세례도 인정안하고 성직도 인정안하고 개신교인은 성찬식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하여 개신교는 이미 일제시대 천주교에서 세례 받은 사람은 입교식만 하면 되고 세례는 안받아도 되고 성찬식을 할 수 있습니다
성직 역시 인정하고요
1968년부터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위원회가 가톨릭과 개신교사이에 조직되어 서로 번갈아가면서 일년에 한번 기도회를 가지지만 예배나 미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측에서 개신교 목사가 집례하는 예배를 예배로 인정안하기 때문입니다
일치를 위한 담론에서 성찬식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회에서는 성찬식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부가 집례하는 미사에 개신교 목사나 신자는 성체를 영할 수 없기 때문이고 반대로 목사가 집례하는 예배에서 가톨릭 신부는 성찬식을 인정안하기에 성찬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는 이렇습니다
개신교의 근본주의나 복음주의는 선교에 치우친 나머지 지나치게 구원의 문제를 이분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에서 구체적으로 아무개가 천국간다고 인간이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믿음을 우리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정도 마찬가지로 누가 예정된 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구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하는 것 선인과 악인을 벌하는 것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를 구분짓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할 뿐이며 그 분의 약속을 믿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또는 선교사가 없는 곳 어린 아이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1. 로마서에 보면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판단받는다 ( 유대교인들)
2. 율법이 없는자는 양심이 율법이 된다 ( 이순신등 우리 조상들을 말할 수 있는데 양심으로 판단하는데 그 양심의 정도는 하나님의 주권 )
3. 어린 아이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애 맡깁니다)
어린아이가 무슨죄를 지었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라고 말 할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원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어린아이나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추실 것으로 믿습니다.
또한 로마서에는 자연을 자 세히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알려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예수님은 지옥에 보내려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전하러 오신 것이지요
따라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방점을 찍어야하고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옥으로 누구를 천국으로 보낼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앞에 겸손이지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부족함 불완전함 죄인됨 하나님을 모른체 한 이러한 것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에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에 달렸고 하나님이 사면할 길도 여전히 열려있다고 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안타까운 것이 한국 개신교가 너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말하므로 오히려 전도의 문을 막았다고 봅니다
신자가 할 일은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라는 복음을 말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지옥을 강조하는 목사들 치고 물질을 탐하고 타락하지 않은 목사가 드물더군요
대표적으로 김홍도 김성광 부흥사들이 있지요
어느 정도 배타주의와 독점주의는 좀 다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 종교도 다른 종교를 자신들과 완전 대등한 수준으로 인정하지는 않지요. 즉 배타주의적인 면이 있지만 거기서 나아가 자기 종교 외에는 일절 구원이 없다는 식의 독선주의는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고등종교는 그들 자신만의 구원관이 있지만 그 구원교리에 기초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느정도는 포섭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지요. 불교만해도 예수를 깨닫은 자로 보므로써 그런 문제를 해결하잖아요. 카톨릭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유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익명의 그리스도론을 통해 해결하고 있구요. 다만 카톨릭은 최근에 그런 경우이고 제 2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개신교의 전반적 분위기와 똑같았죠.
그런데 개신교 나아가 제 2바티칸 공의회 전의 카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 살아있을때 인격적으로 만나서 실제 믿은 경우만 구원을 인정함으로써 매우 협소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타 종교나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보지도 못한 모든 사람들은 다 지옥이다라는 식의 매우 독선적 구원관에 매몰되어 있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관을 기반으로 할 정도로 그들의 성경이 가지는 계시의 독점성이나 무오류성이 보장되느냐 하는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 사실 회의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안티바이블에서 주장하는 견해를 다 인정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토론과 논증을 통해 합리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정도입니다.
배타주의와 독점주의의 차이를 간단한 예로 설명해 봅시다. 신흥 종교에서 특정 교주의 말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런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런 경우 전형적인 배타주의를 넘어 독점주의가 되어 버리져.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그들의 가지는 계시가 역사성과 실제성을 갖는가 하는 걸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다 생각해 볼 겁니다. (나아가 상식적 수준의 합리성[완전합리성이나 제한적 합리성도 아닌 아주 기본적인 상식적 수준의 합리성임]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른바 초합리성을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는 바로 이런 류의 행태 즉 아주 초보적인 상식적 합리성도 통과하지 못하면서 거창한 초합리적 영역에 대해 말만 무성한 그런 행태를 치우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가 모든 이의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몇몇의 구원의 방주로 전략해서 배타적 독선주의가 되어 버렸다는 느낌 말입니다.
레드문 /어느 절에서 예수의 조각을 여러 부처들 사이에 모신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요
이게 과연 타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일까요?
아니면 모독하는 것일까요?
레드문님이 불교는 예수를 깨달은자로 인정하여 독점주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데 이건 말이 안되지요
님은 저 위에서 모세의 이야기나 기적이 실제적인 사건이냐 아니면 신화이냐 모티브의 차용이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그들이 깨달은 자로 인정한다는 말이 실제와 맞는지를 봐야지요
예수가 깨달은 내용이 뭡니까?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받고 자신이 하나님의 희생양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인데
이것과 석가모니의 깨달음이나 다른 부처 고승들의 깨달음과 양립이 가능합니까?
한마디로 이건 대중들에게 사기치는 것이지요
자신들은 이렇게 포용적이고 다른 종교도 인정한다는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지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섬기는 존재를 여서 부처들중 하나로 격하시키는 겁니다
결국은 불교우위의 배타적인 입장의 변형에 불과합니다
레드문님이 이런 트릭에 넘어가시다니 ㅎㅎㅎㅎㅎ
불교든 개신교든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차이는 딱 하나입니다
말하느냐 안하느냐
강하게 하느냐 약하게 주장하느냐입니다
개신교는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기에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차별화를 시키기 위해 공세를 통하여 차이를 부각시키는 전도 방식을 사용한 것이고
불교는 굳이 다투어서 이익이 없다고 보고 침묵한 것뿐이고 ( 불교발전의 역사가 주로 왕실에서 수용하고 국가에서 보호하는 형태이기에)
가톨릭은 기득권을 지켜야하는 입장에서 굳이 공세를 취할이유는 없고 제 2차 바티칸 이후 아시아로 진출이 활발하면서 타 종교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굳이 차이를 강조하면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포용주의적인 태도를 보일뿐인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시대 상황이 달라져서 과고처럼 배타적인 차이를 드러내서는 이득이 없고 반감이 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개신교에서도 우리나라역시 포용주의적 관점이 커졌습니다
흐강 / 이건 좀 아닌것 같습니다.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 나아가 석가모니도 모두 지옥에 가 있다는 소릴 공공연히 하는 개신교에서 예수를 법당에 모셨다고 화내는 것 이치에 좀 맞지 않잖아요. 그리고 불교에서 기독교의 문헌을 다 인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비록 기독교에서는 이단시하는 도마복음서를 근거로 예수를 깨닫은 자로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불교에서 예수를 흐강님의 신앙데로 하나님으로까지 대우해달라는 건 조금 무리한 요구인 듯 싶네요.
그리고 불교내에서는 민중신앙으로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부처지만 보살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하는 것도 있잖아요. 일종의 타력구원인데 현실적으로 스님들처럼 해탈을 위해 매진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중간단계로 보면 될 듯 싶네요. 그러나 대승불교가 가지는 특유의 지향성에서는 깨닫아 부처가 된 이후 다시 보살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자 역시 부처와 동급으로 봅니다. 예수의 경우도 결국 이런 보살들의 화신이라고 보는 듯 해요. 원효가 가르쳤다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결국 현세적 구원과 미래 해탈을 위해 타력구원을 간청하는 거구요. 일반 민중들은 현세에서는 스스로 해탈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미타불에 귀의해 나중에 극락에서 왕생해서 거기서 해탈한다 머 그런 시나리오. 결국 예수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현세에 내려와 그 당시 민중들에게 아미타불에 귀의를 가르치고 나서 다시 아미타불을 보좌하려 갔다 머 이런식의 이해가 되겠네요.
참고로 예수는 이슬람에서도 선지자 무함마드와 거의 동격 아니 선배급의 예언자로 존경한다고 하잖아요. 쿠란의 제19장에 마리아 장을 두어 예수의 잉태 과정과 성장, 공생애를 따로 언급할 정도이구요. 또한 쿠란에서 무함마드의 이름은 5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예수의 이름은 수십 번 언급된다네요.
다른 종교에서 예수를 나름 대우하고 있고 또 그 신도들에 대해서 딱히 불경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지만 당장 인터넷에서 개신교신자나 유명목사설교를 찾아보세요. 다 지옥에 간 사탄의 자식 머 이딴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그리고 기윤실인가한 여론조사에서 개신교가 신뢰도 꼴찌로 나온건 아시죠? 거기 보면 몇가지 이유가 나오는데 제가 본글에서 언급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3위인가 그래요
우리나라 개신교가 공격적이고 배타적이며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것 맞고 다원화된 시대와의 불화를 겪고 있는 것도 맞습니다.
제가 자꾸 이야기하지만 불교쪽에서 보자면 추기경이고 교황이고 유명목사들이고간에 그들은 해탈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이지요
실체가 아닌 허상에 사로잡혀서 미망에 빠져있으니까요
불교적 관점에서 기독교도 역시 늘 윤회를 하며 살 수 밖에 없고 불교식의 업을 닦지 않으니 내생에는 더 고난을 받게 되겟지요
물론 윤회도 방편으로 보기도 하지만요
저는 불교는 불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믿으면 됩니다
불교에서 불교 기준으로 기독교를 뭐라고하던 기독교에서 기독교 기준으로 불교를 뭐라고 하든 그건 종교간 경쟁 종교 자유의 영역입니다
종교 자유는 전도와 비판이 다 해당이 됩니다.
아 물론 같은 공동체속에서 평화를 깨지 않고 존중해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즉 교리적으로 귀결되는 것과 상대방 면전에서나 대외적으로 공격적으로 하는건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자체 교회나 단체내 수련회등에서 성경공부의 결론으로 그렇게 주장하는건 종교자유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교회가 멀티미디어 활용에 있어 앞서가고 안티나 자체네 진보세력들에 의하여 교회내 설교나 내부 행사때 내용들이 밖으로 공개되어 개신교에 비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까이는데 저는 이 문제는 개신교 자체의 신뢰성 문제도 있지만 우리 사회 정치와 종교 언론간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비대해진 개신교에 대한 견제필요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점에서 가톨릭과 불교가 연합하고 있고요
새누리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개신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언론 종사자들은 개신교의 긍정적인 면은 축소보도하고 불교나 가톨릭의 경우 의도적으로 고양시키는 경우를 모니터링해보면 압니다
그러던 저러던 개신교가 욕먹을 짓을 하는건 사실이고 지도자들의 정치성 멍청함 부패함도 사실이라서 욕먹어도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종교로서 불교 특히 조계종은 두얼굴로 행세를 안했으면 합니다
겉으로는 종교 평화와 포용 성탄절 축하 플랭카드를 걸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엄청난 견제와 발목잡기를 하고 배후에서 안티정서를 부추키는 일과 기관을 후원하고 있는데 이건 곤란합니다
발제가 성경의 무오류성 주장에 대한 내용을 담고있으니..
그 주제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간단히 적어볼까 하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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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오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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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성.경.의. 절.대.적. 영.감.성.을. 확.신.하.는. 기독교인으로서 저의 대답은..
"우리가 오류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오류는 존재한다"..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흔히 벽에 걸어놓곤 하는 세계지도를 생각해봅시다.
그 세계지도를 보면.. 그린란드는 거의 남극대륙만하게 표시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의 크기에 있어서 그린란드는 남극대륙보다 훨씬 작다는걸 알고있죠..
그럼 그런 '오류'는 왜 생길까요?
바로 실제로는 3차원으로 존재하는 구의 모습을 2차원인 평면에 기록하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그런 왜곡을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런 세계지도는 남극대륙보다 훨씬 작은 그린란드를 남극대륙만하게 그리고 있으므로 오류가 아닙니까?
이건 분명한 오류죠..
하지만... 그것이 어떤 가르키려고 하는 바의 진실의 전체적 양상을 어떤 한정되고 특정화된 방법안에서 가르키려고 할때(가령 3D를 2D로 표현하고자 할 경우처럼) 피할 수 없는 종류의 왜곡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우리는 그런 오류를 '오류'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받아들이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굳이 따져서.. 땅덩어리의 크기를 공정하게 비교해서 알려주는 것도 지도의 역할인데.. 그걸 잘못 전달했다면 오류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건 또 분명히 오류가 아니라고 할수도 없죠.. 오류맞습니다.
혹시.. 만약 우리가 2차원으로 지도를 사용하는 문화를 폐기하고 3차원 홀로그램같은 지도만을 사용하는 진일보한 지도문화가 되는때가 온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그때는 이전의 2차원의 왜곡된 지도문화에 대해서는 오류로 가득찬 지도였다고 추억하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동시에 3차원의 홀로그램의 지도를 사용하면서 오류로 가득한 2차원지도의 형편없음을 비판하는 상황이 된 문화속에서도..
그런식으로 사고하게된 세대들 또한 꼭 알아야할 것은.. 이전세대가 도달해있던 문화적 수준과 한계속에서 2차원지도는 나름대로 "목적한 바"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한 지리에 대한 진실을 그 당대의 세대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겠죠..
이처럼 성경의 오류에 대한 이런저런 논란은.. 표면적으로 성경 자체안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단선적인 명제속에서 먼저 기선을 잡아보려는 끝없는 공방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신이 자신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채택한 특정한 방식이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왜곡의 감수를 포함하는 차원일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사실 거의 이뤄지지 않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저는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서 정말 두말할것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만..
결국 그런 제 믿음은..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한 표현방식의 채택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왜곡차원의 한계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의 믿음인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까지 같이 고려하지 않은채..
그냥 명제적으로 오류로 우길 수 있는 내용만 확인되면 게임끝이라는 식으로 공격하는 쪽이나..
무조건적으로 오류을 부정하는 것만이 바른 성경관이라고 사고하는 쪽이나..
조금 더 진리의 특정화된 표현이 가질 수 있는 여러가지 양상을 같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지 권해보고 싶습니다..
아침 112님/
반갑습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요 몇일 아크로에서 정치 이야기해봐야 재미도 없고 짜증만 나고.. 어짜피 징계중이었지만..... 차라리 종교 이야기가 더 재미 있네요. -_-;;;
저는 무오류설 같은 것이 왜 생겨났냐라고 근본적으로 돌아가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깐 불가지론의 입장에서 돌아가서, 일단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신이 인간에게 신의 존재(또는 신의 자비 또는 사랑)를 나타낸다고 합시다. 이런 가정에서 보면 신의 자취는 당연히 여러가지 종교로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만물에 존재할테고, 신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영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을 알려고 하는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예수를 보더라도 초기 기독교 종파가 아주 여러가지 였습니다. 자 그런데, 게중에 성공한 것은 Orthodox입니다. 바울이 영지주의의 무서움을 경계하지만, 실은 영지주의라는 것 자체는 종교로서 성공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하면, Orthodox처럼 사제가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교회라는 체계(hierarchy)와 눈에 보이는 시설물이 있고 교권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즉 질서정연한 체계가 있는 것만이 종교화가 되어서 그를 따르는 일반 대중들을 거기에 따라서 살게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의 체계를 만든 바울은 자본주의적인 입장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해야 번성하는 지 설계한 천재라고 봅니다. 그의 업적은 말씀보다는 교회 구조를 만드는 방법으로서 당시에 가장 첨단 경영기법을 제시했다는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처럼 사제들이 있으나 마나한 - 즉 누구나 수행을 해서 예수처럼 죽는 경험을 한 사람은 부활을 할 수 있다 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 라는 식으로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해서 일대일로 전승하는 종교는 스타워즈의 제다이(Jedi) 같이 막강한 개인적인 영성을 같은 사람들의 연결체가 아닌이상 시대에서 메인스트림이 절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Orthodox가 교권을 잡고 체계를 만드는 이상, 그 권위를 만들 수 있는 실체 - 즉 성경 - 에 무소불위의 권위를 주어야 그 체계 자체의 존립이 오랫동안 성립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그 결과로 성경 무오류설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성경에 말이 안되는 모순된 부분이 발견되니 일반인이 보아서는 안되겠고 따라서 사제들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되고.... 그렇게 진행되어 온 것이 카톨릭이겠죠.
그러니깐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바른 성경관이 무엇이냐라고 싸우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 와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미입니다. 애초에 성경 무오류설이 어디서부터 왔을까를 생각해보는 것, (영지주의 문서를 포함한) 초기 기독교 경전을 들여다 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지도 이야기는 그럴싸하지만, 본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비행소년님
비행소년님의 이런 관점에 대해서 적절히 논의한 책으로 역사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몇줄을 인용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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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단과 정통의 구별이 지배권에 달려있다면, 당연히 동정심은 이단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관건은 옳은것과 그른것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자신이 사물을 보는 방식에 동의하게끔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단에 대한 교회의 논의는 어느 정도까지 권력의 이해관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일까?..
..
1세기와 2세기의 기독교회는 중요한 정치권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었고, 마음대로 정통교리를 강요할 수단도 전혀 없었다. 예컨대, 발렌티누스주의와 마르키온주의 같은 2세기 초의 초기이단들이 어떤 형태로든 로마교회지도자들로부터 로마의 신학적 규범을 따르게끔 강요를 받았다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
흔히들 초기 기독교를 규정할때 권력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하곤 한다. 예를 들어, 막스베버(Max Weber)는 어떤 텍스트든 정경을 확정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권력투쟁이라고 주장한다..
..
그런데 권력에 기초한 이런 분석을 원형적 정통이 형성되는 기간에 적용할 수 있는지는 무척 의심스럽다. 베버의 사상을 반영하는 발터 바우어의 접근법은 훗날 로마교회가 갖게 된 정치권력과 위상을 거꾸로 2세기에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p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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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정통이 형성되는 시기에 대해 권력적인 쟁투를 상상하는것은 후대에 로마카톨릭교회가 권력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이후의 관점을 이전으로 역투사해서 바라본 오류라는 얘기구요..
정통적 관점이 형성되는 시기까지 실질적인 권력의 비호나 권력의 쟁투같은걸 부릴 권력이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당연히 로마교회가 권력의 주체로 등장해서 교권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을 옹호하려는 관점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통의 관점이 형성되던 시기를 권력쟁투의 시기로 바라봄으로써 기독교적 정체성 자체를 권력적 성격으로 동일시하려는 시도에 대해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죠..
심지어.. 가장 유명한 정통과 이단이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립을 살펴보면.. 기독교정통에 권력적 성격을 부여하려는 쪽의 취향대로라면 황제가 아타나시우스를 비호했었어야 마땅하겠지만.. 역사는 대부분의 황제들이 아리우스를 비호하고 아타나시우스를 핍박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죠..
(물론 실제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콘스탄티누스같은 황제의 우선관심은 어느쪽이건 신학적 혼란을 교회가 빨리 종결지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차적 관심사였지만 양쪽가운데 선호하는 관점은 지금의 정통주의쪽이 아닌 아리우스쪽이 보다 더 유일한 황제의 지위를 돋보이게 해줄 것으로 보아서 선호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황제의 아리우스 선호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설이 원형적 정통의 관점을 더 잘 설명해주는 관점으로 선택해서.. 아리우스는 추방되었습니다만..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또다시 신학자들이 정통으로 선택한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아리우스를 정통으로 세워주죠..
로마황제의 거듭되는 아리우스 비호에 대해서 교회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를 신으로 숭배해온 원형적 전통의 관점에서 볼때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아리우스보다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아타나시우스의 견해가 보다 더 초기기독교회에서 이어져오던 원형적 정통의 계승자로 여겨졌던 것이죠..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여러 황제의 핍박속에서 5차례 17년간의 유배를 경험하게 되지만 결국 교회는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기교회가 고수해온 예수숭배의 전통은 아리우스보다 아타나시우스의 관점에서 더 좋은 설명이 된다는 점을 받아들입니다.
(두말할것 없이 이 시기는 교회가 황제에 대해 권력적으로 대립할 수 있던 시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권력과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믿고 있는 신앙의 정당성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을 추구해갔던 것이죠..)
아무튼.. 교회속에 정통적 관점이 확립되는 과정은 비행소년님께서 상상하시듯 권력의 비호아래 이단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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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바른 성경관이 무엇이냐라고 싸우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 와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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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싸우는게 아닌데요..? ^^;
워낙 성경의 오류를 확인했으니 게임끝났네 어쩌네 떠드는 분들도 많고..
어떤 분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펴는 분들도 계시는것 같아서..
성경의 특별함이란.. 성경안에 "오류"로 우기면 "오류"로 볼 수도 있는 대목에서 담판이 나는 상황이 아니라는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적은겁니다.

/이름없는 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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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이 압도적인 권위로 진리를 선포하는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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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체 이런 형식이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겠네요..
이름없는 전사님께서 어떻게 해야 이런 문장이 현실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건지 좀 설명을 해주셔야할것 같아요..
저는 "압도적인 권위로 진리를 선포하는 형식"이라는 이런 수사적이고 모호한 표현으로 이런게 없어서 '권력투쟁'이었던거라는 식으로 상황이해를 정의하는건 뜬금없는 말장난같구요.. 교회내의 권력투쟁이라는 상황이해를 정당화할만한 보다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제가 기독교인이라서 이런다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전 불교의 모임안에서 어떤 흐름을 정통으로 어떤 흐름을 비정통으로 규정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다짜고짜 권력투쟁이다..라는 식으로 정의하지는 않을것 같아요..
시대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다 정교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대립은 어떤 전통을 고수하려는 입장에서는 일상적인 도전들이거든요.. 그런 도전에 전통의 시대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입장확정 자체를 무조건 권력투쟁이라고 비판하는건 너무 도식적인 태도죠.. 자연적인 입장정리가 아닌 권력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그런 주장에 걸맞는 객관적 근거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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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성론이야 말로 당대의 일반인들의 상식에 잘 부합하는 얘기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했던 거고요. 반면 아나타시우스는 절박했죠. 단성론이 정론이 되면 자신을 비롯한 니케아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은 그날부로 밥을 굶어야 합니다. 그간의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이기고 드디어 좋은 세상을 만났는데, 로마 제국의 강력한 제도적 지원속에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는 이 호기를 맞아 예수=인간=선지자=유대교의 아류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게 되면 이 신흥종교은 그날부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간판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올테니까요. 그래서 그 절박함 속에서 통박을 굴려서 생각해 낸 것이 본질은 (신으로서)동일하되 위격이 다르다는, 성경 구석구석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삼위일체라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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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이런 말씀은 너무 웃기는 얘기 아닌가요..?
밥을 굶는다..? 결국 그때 모인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예요..
황제가 그 회의에서 결정된 이론으로 제국의 이념을 통일하겠다는 식의 태도위에서 회의를 하는건데.. 밥을 굶는다느니.. 간판을 내린다느니 하는 코메디같은 말씀은 그냥 개그치시는걸로 생각하면 적절할것 같구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이라는 말씀 자체가 기독교 세계이해의 발전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으셔서 무리한 사고를 하시는거같습니다.
기독교신학은 발전한답니다.. 다른 곳에서 이미 말씀드렸으니.. 재론은 안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새로운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고는 얼핏 되게 기독교적인거 같지만 별로 기독교적인 이해가 아니죠..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수에 대한 신적숭배의 전통은 이미 '동일본질'이라는 말 이전에 이미 1세기 중반부터 발견되는 폭발적인 현상이예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적 이해란 예수에 대한 절대적 숭배에서 그 새로운 숭배의 본질적 이해에 대한 발전적 고찰이라는 차원에서 이해가 깊어져가는겁니다..
애초에 기독교이해가 발전할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가 없으시니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것 같습니다..

왜곡 차원의 한계가 성경계시에 분명히 있다면 (엄밀히 말해서) 성경 계시가 "무류"하다는 말이 성립할 수가 없는 거겠죠. 성경이 무류하다는 말은, 그 말을 한 존재인 여호와 하나님 자체가 가변적인 인간 존재와는 달리 전지전능하고 영원불변한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 절대자의 절대성을 성경계시가 온전히 담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류하다는 말을 굳이 하고 있는 것이겠는데..만약 성경 저자의 편견이나 오류가 반영이 되어 그 하나님의 계시에 어느 정도 인간적인 오류가 묻어 있다고 하면, 전능자의 절대성이 한 갓 유한자인 인간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는 소리가 되니, 논리적으로 절대자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 거죠. 그러니 신앙에 투철한 근본주의자들일 수록 더 축자영감설에 집착하는 것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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