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그러니까 1987년 대통령선거 때, 그때도 이번 지방선거시 야권단일후보 추진과 비슷하게 재야 및 시민사회 단체 등에서 아주 대대적으로 DJ와 YS 사이의 후보단일화를 적극 추진했잖아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대학가에서도 DJ와 YS 양자간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을 만큼 후보단일화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요, 당시 후보단일화와 관련하여 뭐 주워들을 정보 없나하고 총학생회 사무실 드나들며 선배들 꼬드기면서 정보를 캐내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총학생회 간부인 선배 하나가 이런 일화를 들려주더군요.


재야 및 시민사회단체 간부들이 모여서 야권대선후보 단일화 관련 협의를 하는데, 정말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영남권 출신 재야인사들은 YS로의 후보단일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호남을 중심으로한 비영남권 재야인사들은 DJ로의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는데, 그 두 진영 사이에 도저히 바늘 하나 들어갈만큼의 틈도 없어서 이건 뭐 타협 자체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고요.


특히 당시 재야의 원로인 문익환 목사가 주로 회의주재를 하면서 사회를 봤는데, 이 분은 내심 DJ쪽으로의 단일화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한성깔하던 YS 지지파 이재오가 한번은 자기보다 스무살은 연상인 문익환 목사에게 엄청난 험담을 퍼부으며 말그대로 책상을 뒤엎는 난동을 부리고 영남권 재야인사들 데리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마음에도 ‘자기들 스스로 지역감정에 찌들어있는 자들이 무슨 권한으로 두 후보에게 단일화를 요구할 수 있겠나’라는 생각과 함께 후보단일화는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나름 준엄한(?) 예측을 내리게 되더군요.   


뭐 직접 목격한 사건은 아니니까, 저 상황이 얼마만큼 진실에 부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분명한 것은 소위 민주화운동을 한다며 폼잡고 다니며 입바른 소리하던 인사들이 알고보면 일반 유권자들보다 훨씬 더 찌질한 지역감정의 노예들이었다는 것이고, 결국은 그들이 운동권으로 살아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지역정서에 기대어 권력의 한 귀퉁이라도 얻어보겠다는 욕망뿐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겠죠. 


강현욱이라는 정치인이 1990년대에 전북에서 신한국당 간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이 있었죠. 


당시 언론에선 이를 엄청난 화젯거리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 물론 일회성 사건이긴 했지만, 결국 유권자들은 자기 지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있는 정치인이라는 판단을 한다면 지역당의 이해관계를 얼마든지 뛰어넘어 표를 던져줄 용의가 있음을 이미 십수년전부터 정치권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민주당도 노무현이나 김중권, 김정길 등 지명도 있는 후보들을 영남권에 공천할 경우 당선까지는 아니어도 3-40% 이상의 아주 유의미한 지지율을 얻은 적이 많았었잖아요.


실제로 호남이나 영남에 사는 사람들하고 선거 얘기하다보면 이런 주장들 많이 합니다. “자꾸 우리보고 무조건 민주당, 무조건 한나라당 찍는다고 뭐라 하는데, 솔직히 영남권의 민주당 후보들, 그리고 호남권의 한나라당 후보들 면면을 보라”구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죠?


너무도 성의없고 경쟁력없는 후보들을 공천해놓고는 안 찍어주면 그걸 다 지역주의에 찌든 유권자들 탓으로 돌린다는 아주 ‘이유있는’ 항변들입니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호남권 광역단체장 후보로 정운천과 정용화 등을 공천했는데요, 예전의 ‘듣보잡’ 후보들보다는 나름 지명도 있는 후보들을 내세우니 두자릿수 이상의 의미있는 지지율을 얻은 것만 보아도, 성의있는 공천이 선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시민의 낙선을 두고 서프같은 데선 ‘호남비토론’ 가지고 싸우고 있는 모양인데, 유시민, 그리고 한명숙의 낙선을 부른 가장 큰 이유는 호남비토 때문도 아니고, 노회찬의 완주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유시민, 한명숙 두 후보가 서울이나 경기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유권자들이 내린 냉정한 판단이 두 후보 낙선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경기 외곽지역에서 한나라당 자치단체장들이 많이 당선된 결과를 두고 ‘농촌지역은 아직 민도가 낮아서 그렇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 경기 외곽지역에서 공천받은 야당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본인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후보의 경쟁력이 한나라당 후보에 비해 일방적으로 처지거나 또는 아예 민주당에서 공천조차 하지 않은 지역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이번 지방선거는 무슨 민도의 차이나 지역정서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 것이 아니라, 표심을 얻기 위해 각 정당들이 얼마나 경쟁력있는 후보들을 성의있게 공천했느냐가 좌우했다는 것이고, 정치공학적인 꼼수에 의존하지 않고 유권자들이 납득할만한 공천을 한다면 지역정서마저도 뛰어넘어 얼마든지 선거에 이길 수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정치판에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선거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