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입헌혁명 이후 2차 대전기 태국의 전략적 판단에 관해 좀 아리송한 국면이 있습니다. 바로 태불전쟁(1940년 10월-1941년 5월)인데요(19세기의 프랑스-시암 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프랑스-태국(타이) 전쟁 혹은 줄여서 태불전쟁이라 합니다), 이 전쟁은 태국이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 국경문제를 놓고 협상을 진전시키지 못하다가, 국경에서의 소규모 충돌을 계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가만 놓고 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군의 파리 점령 이후 비시 프랑스의 출범 시기가 1940년 7월이었고, 태국-일본, 일본-독일 간 관계는 전통적으로 상당히 긴밀했지요. 또한 비시 정부는 사실상 독일 제3제국의 괴뢰 정권이었으니, 대략 태국과 비시 정부 간 관계도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쟁쟁한 열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별 볼일 없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태국이 아무리 그래도 아직 광범위한 해외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전통 강대국인 프랑스에 개겼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좀 어렵죠.

어쨌든 이 전쟁은 별다른 대규모 전투 없이, 본국에서의 사태로 지휘계통이 혼란된 프랑스군에 대해 태국군이 일관되게 전략적 우위를 점하다가 일본의 중재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 중재안의 결과만 놓고 보면 태국이 명백히 이득을 봤죠.(콩 강 주변의 라오스 북부 영토 회복) 이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먼저 태국은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시암 전쟁(태국 1939년 이전 국명이 '시암', 이후 국명은 '타이'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등을 거치면서 좌우의 영국-프랑스 세력에 영토를 잠식당해 온 역사가 있었습니다.

ThailandWithFlags.gif(출처 : 위키미디어 공용 자료)

위에서 노란색으로 칠해진 'Siam'의 부분이 현재 태국의 강역과 거의 일치합니다. 이 영토가 약 51만 3천 제곱킬로미터인데, 남쪽의 말라야 지방과 서부 연안에서 영국에게 빼앗긴 영토가 샨 주(위쪽 그림에서 샨 주는 원래 태국의 역사적 연고권이 별로 없는 전통적 버마 영향권이었습니다) 제외 약 5만 제곱킬로미터, 동쪽에서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토(나중에 북쪽의 라오스와 남쪽의 캄보디아로 각각 독립하게 되죠)가 467,500 제곱킬로미터입니다.[1] 통틀어 상실한 총면적은 518,000 제곱킬로미터[2]이지요. 즉, 태국은 당시 제국주의 확장기를 거치며 영토가 반절이 되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던데다가, 당시는 영토주권 회복의 기치를 내건 민족주의의 기운이 강해지면서 강경한 범-따이(따이tai는 타이thai족과 현재 라오스에 살고 있는 라오족 등을 포함한 보다 넓은 민족 개념)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피분송크람(이하 피분) 수상이 마침 집권해 있던 시기였습니다. 강권적 국토 회복 운동이 한 번쯤 일어나도 얼마든지 이상할 게 없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 상황에서 태국이 태불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서 현재의 라오스 북부에 해당하는 영역을 프랑스로부터 일시적으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때만 해도 아직 태국은 독일 제3제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추축국 편에 완전히 가담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태국으로서는 타이밍이 상당히 좋았던 셈이지요.(일본은 태불전쟁 발발 1개월 전인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3자협정을 체결합니다) 이후 원래 친일본 성향이었던 피분은 중립정책을 취하면서 실리를 얻으려 하다가 일본이 약간 강압적인 제스처를 취해 오자 반강제로 1941년 12월에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추축국 편으로 명백히 돌아서게 됩니다.[3]

이런 추이를 보면 대략 원래의 의문에 답이 그려지는데, 당시 아마 태국의 수뇌부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일본에 의해 영속적으로 와해되거나 적어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자기네가 건드리지 않았으면 일본이 먹었을 것으로 판단해, 일본의 팽창에 빌붙어 떡고물이라도 건지려 한 것이겠지요. 비시 프랑스는 굳이 태국이 때리지 않아도 우방인 일본(인도차이나 할양)과 독일(1942년 본토 재공격;;;)에게 맞고 사는 동네북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식민정권의 허약세를 틈탄 태국의 전략적 판단은 일단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설사 추축국이 지더라도 자기가 공격한 건 추축국의 괴뢰 프랑스지 연합국 측의 프랑스가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을 할 수 있는 극히 절묘한 타이밍이었고요.

하지만 태국은 전쟁 직후에 추축국으로 가담하면서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데, 거기서 일본 중재안으로 라오스 영토만 좀 회복하고 피분의 중립 정책이 유지되는 것이 태국의 실리를 위해서는 최선이었기 때문이죠. 나중에 연합국이 전승하자 전쟁 중에 태국이 얻었던 영토들을 전부 도로 토해내게 됐으니.. 그렇다더라도 일본군이 진격해 오는데 태국 군사력으로 버틸 수는 없겠고 하니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래도 태국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기할 정도의 외교력을 발휘해 결정적인 실책은 피해 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당시 장기적으로 일본이 미국에 이기기는[4]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힘입어, 뒷문으로는 쁘리디 파놈용 등의 반일 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자유 타이 운동[5]을 벌였거든요. 이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이거라도 안 했으면 다른 추축국들의 전쟁 직후 상태와 비교해 볼 때 영토의 추가 할양이라도 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저 자유 타이 운동이 태국의 진심이었는가 하면 그렇게 보기도 힘든 게, 친일 정권을 이끌었던 피분이 나중에(비록 별 지지는 얻지 못했지만) 군부의 쿠데타로 1948년에 다시 복권되어 수상직에 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_-;; 당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건 대체로 자유 타이 운동 세력이었지만, 어쨌든 정치적 영향력면에서 피분은 건재했거든요.[6]



[1] 김영애, 『태국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2, 252쪽.

[2] 같은 책, 201쪽.

[3] 같은 책, 258쪽. 이 동맹 조건에는 일본이 버마를 침공하여 샨 주와 남부 말라야 실지(失地)를 태국 것으로 회복시켜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한 비밀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태국 입장에서는 사실상 일본의 꼭두각시 수준으로 추락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빼먹을 건 빼먹은 거죠.

[4] 일본군의 태국 진공(1941년 12월 8일)이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7일)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일본-미국 간 전쟁은 태국 진공 당시 이미 실현된 상태였죠.

[5] 쁘리디를 중심으로 태국 국내 및 해외(주로 미-영 등의 연합국)에서 일본의 침략행위 규탄 및 반일 지하활동을 벌인 일종의 독립 운동. 전후 미국의 지지는 얻었지만 식민지 영토를 빼앗길 위험에 처했던 영국의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죠.

[6] 참고로 피분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4년 7월에 일단 퇴진합니다.(같은 책, 262쪽) 이 인간도 참 잔머리 굴리기는 잘 한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