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원의 만행과 5.18 유언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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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전국 곳곳에 군인들을 진주 시키던 시절, 유일하게 광주 시민들만 용기있게 나서서 신군부에 맞섰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정권 장악 계획을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에게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잔악한 행위를 보며 분노하여 신군부에 맞서 싸웠다. 광주 시민들은 5.18 민주화 운동을 통해 신군부의 부당함을 알렸지만, 한편으로는 수 많은 광주 시민들은 가슴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현재 5.18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5.17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일어났다고 복권된 상태이다. 검찰의 조사를 통해 신군부의 집권 야욕이 드러났으며 그 결과 1997년 법원이 신군부 세력을 처벌하였다. 12.12 5.18이 구국을 위한 결단이라던 신군부 세력의 항변은 설득력을 잃었다. 5.18에 참가한 광주 시민들은 명예를 되찾았다.

대다수 국민들은 이러한 신군부 세력 단죄와 5.18 명예 회복에 찬성하지만 일부 극우 세력들은 못 마땅하고 있다. 현재 그 들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지역감정과 편견을 이용하여 5.18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군부 집단이 80년대 왜곡하던 자료들이 객관적인 자료인양 인용하고 있다.

80년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10호, K공작계획을 도태로 언론을 장악하였고,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왜곡 보도를 하였다. 또한, 신군부는 5.18이 진압된 후에도 국민들에게 5.18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계엄사와 신군부의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보면 광주 시민들 입장에서 시위에 참가한 동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신군부는 일부 좌익 세력과 김대중 추종자가 ‘유언비어’를 퍼뜨려 광주 시민들을 선동하여 시위를 벌였다고 하였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유언비어라는 한 가지 요인으로 광주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극우주의자는 호남 사람들이 선동에 잘 넘어간다는 어처구니 없는 지역적 편견까지 들며 합리화 한다.

신군부와 신군부를 추종하는 극우주의자들은 광주 시민들이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에 선동되었다고 주장한다. 1.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 2. 여학생이 대검에 가슴에 찔렸다. 3. 택시 기사가 살해되었다. 4. 공수부대가 술을 먹고 투입되어 사람을 죽였다. 5. 임산부가 살해되고 낙태되었다. 관점에 따라 유언비어 한 개 한 개를 보면 상당히 자극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극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단순히 5.18은 유언비어에 의해 확산된 것인가? 대체로 5.18이 확산된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비인간적인 과잉진압이다.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벌였던 만행들은 언어로 표현되거나 전달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였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현지 기자들부터 “필설로 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를 받았다고 하였다. 뉴욕타임스 스트로크 서울 특파원은 “1415년 어진코트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육군 병사들이 착검된 총을 가지고 인간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500년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 하였다. 동아일보의 김충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기자로서는 이같은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만행, 폭거, 무차별 공격 등의 단어는 너무 밋밋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는 ‘인간사냥’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씨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찟어 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이렇듯 제대로 설명이 불가능 할 정도로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광주 시민들은 ‘유언비어’를 통해서라도 일말의 진실을 전달하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외부인이 보기에는 ‘유언비어’라고 취급 될 수도 있지만 유언비어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알려줄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모든 언론들은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침묵을 하거나 5.18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하던 상황이였다.

유언비어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되는 점은 공수부대가 대검 사용했다는 것이다. 조갑제는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서  “27명을 사살하는 것보다 27명을 찌르고 때려죽이는 것이 시민들의 동물적인 분노심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광주 사태의 한 원인은 총구가 아니고 몽둥이와 대검이었다.”라고 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한 원인으로 곤봉과 대검 사용을 들고 있다. ‘유언비어’는 주로 5.18 민주화 운동 초기에 퍼졌다고 하는데, 21일 이후 일어난 총격전과 달리 초기에는 공수부대와 시민들이 직접 몸을 맞부딪히며 싸웠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확하게 규명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검을 실제로 사용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자료들은 몇 가지 있다. 전교사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5. 18. 20:15 대처상황 중 수습 및 작전에는 “7空輸隊 銃劍鎭壓”라고 적혀 있다. 안기부에서 1985. 작성했던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으로 기술됐다.. 대검을 M16에 착검한 사례는 사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도망가는 시위대원을 착검한 채 쫓아가는 사진 속의 주인공은 7공수여단 서◯◯ 중사임을 확인했다. (국방부 진상규명 3호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3호 73쪽)

19일 공수부대원들이 대검까지 사용하여 진압한다는 보고를 받은 정웅 소장은 대검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19일 밤 11시 산하 부대장들에게 유혈 진압을 ‘31사단 작전 명령 제 3호’ 하달하면서 “사단은 광주시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강경진압으로부터 무혈진압으로 전환해가지고서 시위를 진압한다. (중략) 절대 피를 흘리는 작전을 하지 마라. 너희들이 대검을 자꾸 사용하는데 대검 사용하지 마라” (작전 명령 제 3호, 15쪽~16쪽). 
 

(시위 진압 중 착검 장면, 5.18 당시 사용된 대검 사진)

1. “술먹은 공수부대원이 사람을 죽였다.”는 유언비어는 사실일까?

당시 7공수 33대에 속했던 최영신 중사는 ‘최영신 중사의 그날, 그 기억’이라는 글에서 “평소 많은 부대원들이 술을 좋아해 수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술을 먹고 작전에 투입된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7공수 군의관 위계룡씨는 “진압과정에서 술을 마셨을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훈련만 나가면 먼저 챙기는 것이 술이었으니까. 그것은 남자들이기 때문이지 꼭 의도적으로 술을 마셔서 과잉진압을 하도록 지시하지는 않았다” 라고 대답하면서 공수부대원들이 진압 과정에서 술을 먹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하였다. (조사일시 : 1989년 7월 조사.정리 장옥근)

광주 시민 김현채씨는 “18일 오후 조대앞 철도 건널목 부근을 친구와 함께 지나고 있었다. 공수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공수들이 너희들 어디 가는거냐라고 물어와 현상소에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친구가 제대로 제대로 답을 못하자 꼬투리를 잡았다는듯이 주먹과 발길질을 해댔다. 총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찍고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공수들은 술을마셔서인지 눈이 충혈돼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시던 공수 중위가 그만 두라고해 간신히 도망쳐왔다” 라고 증언했다. 이 증언에 따르면 술을 마시던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던 시민들을 때린 것이다.

이 밖에 여러 시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원이 술을 먹는 것을 보고 “근무 중인데 술을 먹어도 되냐”고 묻자 공수부대원들은 “밥을 안 줘 배가 고파서 대신 술을 먹는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신군부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의도적으로 술을 먹이고 투입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최소한 공수부대원들의 잘못된 음주 습관이 5.18 진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술에 취한 공수부대원이 시민을 살해했다는 유언비어는 사실일까? 국방부 과거사위에서 전교사의 김ㅇㅇ 준장과 백ㅇㅇ대령은 국방부 과거사위의 면담에서 술에 취한 공수부대원이 연행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증언을 하였다.

5월 22일 경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ㅇㅇ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ㅇㅇ 대령 등이 목격했다고 국방부 과거사위 면담과정에서 증언했다. 김ㅇㅇ 전투발전부장에 의하면 그 부상자는 헬기로 곧바로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며, 몇 시간 후 병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자신에게도 대들었으며 술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사망한 사람은 전재서씨로 밝혀졌다. 전재서는 보안사가 작성한 「검시참여 결과 보고」에 5. 22. 21:30에 앰뷸런스로 통합병원에 도착한 후 5. 23. 05:20에 사망했다고 기록됐다. 그의 사인은 우측 두부(귀 뒷부분)의 자상과 총상이 같이 적혀 있다.

2. 여학생이 대검에 가슴에 찔렸다, 공수부대원이 여학생의 가슴을 베었다는 유언비어

먼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여자들에게 벌인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해 잠깐 언급해보겠다. 5.18 당시에 공수부대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폭행을 벌였다고 한다. 공수부대원들이 진압하는 도중에 가장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킨 행동은 여자에게까지 시내 한복판에서 성희롱을 하며 사정없이 폭행을 가했다는 것이다. 굳이 유언비어가 아니라도 공수부대원들의 도착적인 행동은 지켜보는 광주 시민들의 공분을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금남로 3가 카톨릭센터  바로 앞이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0명이 넘는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채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네 열로 줄지어 선 젊은이들. 나중에 필자가 좀더 가까이 다가가 세어보니 어떤 줄은 7명, 어떤 줄은 8명이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못했으나 이 가운데 여자는 10여명쯤으로 짐작되었다. 거의가 20대의 젊은 사람이었고, 두어 명쯤 30대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의 신발은 굽이 높은 하이힐이 많았다. 특히 여성들의 곤욕스러움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당하지 않고 눈으로 보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숙녀가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 길 복판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들이 어디서 붙잡혀 왔는지는 모르지만 출근하던 월급쟁이들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앞에 벗어놓은 옷들은 말쑥했었다.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지나가던 숙녀가 붙잡혀 차량 위로 끌려 올라왔다. 포장이 씌워지지 않는 트럭 위에서 23세 가량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여성으로서는 차마 당하지 못할 치욕을 당하고 있었다. 하얀 투피스 차림의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쳐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반나체 상태였다 옆에서는 '좋다'며 희롱하는 공수부대원도, 무어라고 악을 쓰는 공수부대원도, 킬킬거리며 웃어대는 공수부대원도 있었다 (김영택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39~40쪽)

위의 유언비어와 관련 해서, 실제로 5월 19일 최미자씨가 대검에 의해 가슴을 찔렸다고 한다. ‘대검에 가슴찔린 19세 소녀 치료했다’(광주일보 1989/01/14)라는 기사에서 5.18 당시 전대흉부 외과의사 오봉석씨는 “가슴부위와 등을 대검에 찔린 최미자양(당시 19세) 이 실려온 것은 19일 오후라고 생각됩니다. 최양이 찔린 정확한 부위는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로 계엄군이 젖가슴을 목적으로 찔렀는지는 이 상처부위만 갖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슴을 목적으로 찔렀다고 볼 수는 없더라도, 광주 시민들 입장에서는 공수부대의 그러한 만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보안사와 광주시청이 작성한 ‘부상자 실태 조사’라는 문서를 보면 최미자씨의 부상 부위는 기흉이며, 입원 예상 기간은 4주라고 되어 있다.

 

 (부상자실태조사표 전남대병원 NO.80)

시내에서 관련 유언비어가 퍼지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보안사(기무사)가 작성한 검시참여결과에서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에서 사망한 손옥례씨의 시신에 좌유방부자창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23일 오전 11공수부대는 주남마을에서 17명의 광주 시민을 살해했다. 미니버스가 광주 외곽으로 나가려고 하자 차량 통행 금지 명령을 받은 공수부대원들이 집단적으로 버스 한 대에 발포한 사건이었다. 총격 사건에서 17명을 사살한 후, 확인 사살 까지 이루어 졌다. 확인 사살 도중에 손옥례씨는 가슴을 찔려 죽었다.

3. 임산부가 살해되고 낙태되었다는 유언비어

19일 오후에 광주역에서 시위 진압을 하기 위해 배치되었던 3공수부대는 20일 오전 2시에 주둔지인 전남대로 철수 하였다. 3공수부대는 2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전남대에 배치되었다. 3공수부대는 전남대 정문을 두고 시위대와 밀리고 밀리는 접전을 벌였다. 3공수부대는 오후 1시 경 집단 발포를 하였는데 이 때 임산부 최미애씨가 공수부대원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10:00 - 16:30 - 전남대학교 정문 4만, 전남대학교 후문 1만과 대치, 일단 폭도들의 차량과 특공대에 의해 정문이 돌파당했으나, 3개 대대의 역습으로 격파됨.  피해 : 없음 (특전사 전투상보)

당시 검찰이 작성한 사망자에 대한 자료를 보면 최미애 (여·23·주부)는 중흥동 주거지 앞(전남대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중 M16 총상을 입었다고 적혀있다.

최미애씨의 남동생 정구씨는 “누나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식구들이 뛰어 나갔을 때 머리에 총을 맞은 누나는 이미 뇌와 피를 땅바닥에 쏟아 놓은채 죽어 있었다”며 “누나를 집으로 옮겨 놓으니 뱃속의 아기가 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죽은 임신부의 배가 거세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그만 고개를 돌려버릴 수 밖에 없었다.”라고 증언하였는데 3공수의 발포로 태아와 산모가 모두 사망한 것 이였다.

4.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유언비어

공수부대원들은 시내에서 택시 기사가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피신시킨다는 이유로 택시 기사를 폭행하였다. 택시, 버스기사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하여 19일 무등경기장에서 모여 차량 시위를 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기사들은 20일 밤부터 택시와 버스를 이용한 차량 시위를 벌였다. 그 이전까지 광수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차량 시위를 통해 처음으로 공수부대에 공세적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보안사 3부 2처에서 작성한 [광주사태 전말보고] 54쪽에도 ‘학생 수송 택시 운전사 제재’로 적혀 있다.)

다음은 공수부대로부터 폭행당한 택시 기사들 중에 한 명인 정영동씨의 증언이다.

19일 청년 3명을 태우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을 지나는데 공수들이 달려들어 차를 세웠다. 그들은 청년들을 차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나를 향해 '이 자식도 데모하고 다니는 놈들을 실어다주니 똑같은 놈이다'면서 상스런 욕을 내뱉고 곤봉으로 후려쳤다.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 병원이었다. 상처를 치료받은 후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갔다. 동료기사들이 한쪽에 모여 공수들의 만행을 이대로 보아넘길 수 없으니 우리들도 힘을 합쳐 시위를 하자고 했다. '내일 무등경기장에서 기사들이 모여 대대적으로 차량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으니 모두 참석하자'고 말했다.' (구술 : 정영동, 협상대표를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 No 1022, p. 241)

이와 같이 공수부대원들의 택시 기사에 대한 행패가 벌어졌는데, 20일에는 택시기사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5.18 당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씨는 이와 관련해서 비망록에서 “시내에서 계엄군에 몰린 한 대학생이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버리자 지프를 타고 뒤쫓아온 계엄군이 분풀이로 택시기사를 대검으로 목을 찔러 즉사시켰다고 한다. 이 소문이 확산 되면서 대대적인 차량시위가 일어났다. 라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광주 지방검찰청이 사망자에 관해 작성한 자료인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을 참고하여  인적사항, 직업, 사망원인을 맞추어 보면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살해하였다는 택시 기사는 민병열씨로 추정된다. 영업용 택시 기사 민병열씨 (당시 31살)는 교도소로 연행되는 중 뒷머리에 대검으로 추정되는 흉기를 맞아 머리가 부서진 채 사망하였다. 민병열씨의 시신은 광주교도소에 암매장된 상태로 있다 5.18이 진압된 이후 광주시 공무원의 암매장 시신 발굴 작업에 의해 발견되었다.

5.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는 유언비어

극우주의자들은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 혹은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라는 말을 5.18 당시 떠돌았던 대표적인 선동으로 꼽고 있다. 상식적으로 볼 때 한 지방 출신 군인으로만 부대를 채우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한 부대가 경상도 출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구체적인 물증이 남지 않는 사례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확인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몇몇 조사 자료에 따르면 공수부대원들이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대표적으로 80년대 5공이 발표한 국방부 발행 ‘광주사태의 실상’에서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라는 유언비어는 ‘몇몇 경솔한 하급지휘관들의 특유의 언동에서 비롯되었다고”라며 일부분 인정을 한다.

1980년 6월 군종 신부 일행 광주사태 확인 방문 결과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5월 18일 충장로 조흥은행 앞 모 다방에서 공수부대 중위가 데모 학생 7명을 잡아놓고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겠다'고 폭언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조사자 :육본 군수참모부 운영차장 박춘식, 1군 군종참모 대령 김계춘,군수사 군종장교 중령 김육웅)

701보안부대, 「선무활동 귀대후 언동사항」(1980. 5. 24),  177쪽을 보면 5공병 여단 중령 장○○은 최초 11공수단이 군중들에게 몽둥이로 과격하게 때리고 군홧발로 밟아서 “전라도 새끼들 다 때려 죽인다”고 하여 자극받은 것이 크게 확대된 원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평민당이 87년 12월14일에 발표한 ‘광주의거의 진상’에서는『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계엄군의 언동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이 됐다』고 자료를 열거하고 있다. 하사관급 지휘자가 전라도놈들 몰살시켜버리겠다, 중위계급을 단 지휘관이 데모학생 7명을 무릎 꿇려놓고선전라도 놈들 씨를 말리겠다고 특유의 사투리로 폭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갑제는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서 “광주 사태 때 3여단 장병들은 『우리는 부마사태를 진압했던 부대다』고 시민들에게 겁을 주기도 했었다.”라고 적었다. 3여단 장교 중에 한명은 '부산 마산과 다르네. 전라도 새끼 다 죽여야 한다"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공수부대원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점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논문 :사랑과 폭력의 변증법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70,80년대 군대 내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군대 내의 경상도 우대, 호남 차별과 경상도~ 관련 유언비어를 연관 짓고 있다.

무엇보다 지역차별이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자행되던 곳은 군대일 것이다. 오랫동안 군대는 모든 영역에서, 장교들의 진급에서 사병들의 내부반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히 지역차별이 이루어져 왔던 곳이다. 군대에 갔다 온 광주시민들은 호남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공공연히 차별당하고, 모욕당하고 구타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경험을 가진 광주시민들은 ‘경상도 군인이...’ 또는 ‘경상도 병력만 골라서...’ 등의 이야기를 현실로 느꼈을 수도 있다.(중략) 공수부대의 대부분의 장교와 병사들은 호남의 심장부인 광주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은 일반적이었을 것이며 호남 출신 병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명령에 복종하고 분위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극단적인 예의 하나로 5.18 당시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만행을 주도하던 공수부대 장교 하나는 후일 호남 출신으로 밝혀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군대에서는 경상도 말 이 ‘표준말’이며 호남 출신이 경상도 말을 배우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이 장교는 개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명령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과감히 경상도 가면을 쓰기로 선택한 경우일 것이다.

이렇듯 5.18 민주화운동 도중에 생성된 유언비어들은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설사, 유언비어가 정확하게 맞지 않다 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상황이 있었다. 광주 시민들은 유언비어 같은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분노를 하였고 시위에 참여를 하도록 자극되었다. 극우주의자들 말대로 유언비어를 통해 광주시민들이 선동되었다면 자신들의 정권 장악 계획에 따라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낸 신군부와 시내 한복판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공수부대원들부터 먼저 탓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