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관련 북한개입설등의 유언비어에 대한 반박은 다음 글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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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왜곡에 대한 반박
http://80518.egloos.com/2433926


1. 5.18 첫 희생자,첫 발포

5월 18일 집으로 가던 김경철씨가 계엄군에 구타 당한다. 결국 5월 19일 4시 청각장애인 김경철 계엄군 구타로 사망

5월 19일 군의 최초 발포로 조선대 부속 고등학생 조경찬씨 부상.

5월 20일 광주역 앞에서 m16 발포

2. 과잉 진압

5.18 당시 7공수 부대원으로 참가 했고 아직도 현역인 9명 중 8명이 과잉진압이란 것을 인정.

여자를 길거리에서 옷을 벗기고 구타.

길거리에서 군인들을 환영하던 시민들도 구타.

한 밤 중에 민가에서 무고한 청년들을 연행.

상점,학원에 난입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구타하고 연행.

노인들에게 “이 새끼”, “저 새끼” 등 욕설 사용.

구타하고 70cm 물푸레나무 진압봉으로 머리를 가격하며 대검으로 찌르고 부상자를 트럭에 던지고 끌고 감.

대검에 의한 자상이 확인 된 부상자만 해도 남자 106명,여자 3명으로 106명

"부산 마산하고 다르네. 전라도 새끼들은 다 죽여야 한다" 고 폭언

결국 5.18 민주화 운동 기간 15명이 구타에 의한 타박상으로 사망하고 4~6명 정도가 대검에 의한 자상으로 즉사. 5.18이후 상이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더 많다.

3. 비무장 시위대,양민 학살

전남대 앞에서 발포하여 임산부 사망. 전남대 앞 진압 도중 4명 사망.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도청 주변의 빌딩 위에서 올라가 조준 사격으로 시민 30~50여명 사망
 
21일 부터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를 점거하며 지나가는 차량과 시민에게 발포하기 시작함. <광주 외곽도로 봉쇄 작전>
<광주 외곽도로 봉쇄 작전> 중에 시민들이 학살 당한 사례는 많지만 몇몇 주요 사건들을 찾자면 다음과 같음.

광주-화순 도로에서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하여 17명 사망, 지역 주민에게 총격을 가하여 3~4명 사망.

광주-나주 도로에서 버스 4대 탑승자 몰살.

광주-담양 도로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바로 옆에 있음)에서 주둔한 계엄군이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발포.
그 중 일부를 교도소 습격이라고 발표.

송암동,진월동 일대에서 계엄군이 지나가며 사격을 하여 중학생,초등학생,50대 여자,청년 3명이 사망. 20~30분 후 양민 학살한 계엄군과 효천역 부근에서 매복한 계엄군 간의 오인 사격으로 인한 전투가 벌어짐.

광주변전소 확보 작전 중 3명 사망.

국군통합병원 진입 통로 확보 작전에서 무차별 발포로 민가에 있던 양민 8명 사망

<도청 재진입 작전>에서 26명 사망.

광주교도소,상무대,주둔지 뒷산,녹동마을 화약고 등에 50여명 암매장,가매장


계엄군의 작전이나 시위 진압 도중에 계엄군이 마구 발포하여 총격으로 부상 당한 숫자는 499명이다.(남 456명,여43명).

5.18 기간 동안에 돌아가는 분들은 200명 정도이고 5.18 이후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만 해도 약 400명.

4. 계엄군 사망 원인

계엄군 사망자 23명 중 13명은 2차례 계엄군간 오인사격으로 벌어진 전투로 죽음. 야산에 매복한 계엄군이 발포하여 발생한다.

그외 1명은 28일 오발 사고, 1명은 계엄군 차량에 의한 교통사고로 죽었다.

23명 중 15명의 죽음은 광주 시민들과 무관하다.

5. 광주 시민 중에 시위대 무기인 카빈에 맞아 죽은 사람이 더 많다?

보안사,안기부에서 발표문을 보면 카빈에 죽은 사람이 무려 88명이나 되며 이를 시위대 내의 자체 피해로 발표하였다.

이 것은 잘못된 자료인데 5.18 왜곡하는 사람들은 자주 언급하고 있다. 보안사에서 인용한 검시 자료에서 조차 카빈 사망자 숫자는 매우 적다.

당시 보안사의 검시에 참여했던 원광대학교 문형배 교수와 목사 2명 등의 증언에 따르면 m16에 맞아 죽은 사람은 폭도로 분류되어 연좌죄에 연루되고 정부에서 주는 사망자 보상금 400만원을 받지 못하였다.

그 사정을 알고 있는 검시에 참여한 의사와 목사 2명은 m16 사망자를 20명 까지 줄였다.

오히려 군에서 폭도의 숫자가 적다며 m16 사망자를 36명까지 늘렸다.

보상금과 연좌죄와 관련 없는, 광주검찰청이나 보안사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자료는 m16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5.18 검시 자료는 광주시,광주지검,보안사 등의 검시 결과가 있다. 각 자료 별 카빈 사망자 숫자는 다음과 같다.

광주시청 검시자료 - 12명
광주검찰청 -26명
보안사(기무사) 505보안부대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 21명

각 자료 별로 카빈에 의한 사망 여부가 엇갈려서, 다음 3자료에서 모두 카빈으로 공통적으로 인정 된 사람은 8명 정도이다. 물론 이 8명 정도 남짓한 인원 중에도 카빈으로 사망한 것이 맞는 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시신들이 부패하고, 부검 절차가 복잡하여 정식 부검을 거쳐 작성된 자료는 아니라는 것도 문제다. 사입구보다 사출구가 크면 M16에 의한 총상,사입구와 사출구가 비슷하면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하였다. 그렇기에 자료 마다 카빈 사망 여부가 엇갈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가까이서 총격을 받았는가 멀리에 총격을 받았는 가에 따른 차이도 있기 때문에 완전히 정확한 자료는 아니다. 그렇지만 5.18 검시 자료들이 워낙 없기에 그나마 신뢰할 만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6. 북한군 특수부대 침입설에 대해

5.18은  5월 17일 오후 9시 신군부가 중앙청을 수경사 병력으로 포위하고 통신선을 끊은 상태에서 대통령을 위협하여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국회를 무력으로 해산한데 항의하여 발생한 일이다. 5월 17일 오후까지만 해도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사람들 조차 5.17비상계엄 확대를 알 수가 없었다. 전두환과 측근들이 4월 말 부터 비밀리에 준비한 내란 음모 과정인데 북한과 내통하지 않는 이상 북한이 5.18을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다.

공수부대원 2천명 20사단 5천명 상무대 1만 2천명 등 계엄군 2만명이 광주를 포위하고 도로 위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광주 시내로 들어 가고 나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계엄군은 북한의 침투를 대비하여 전국 선박 통제를 지시하고 해안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므로 평시보다 해안 경계가 강화된 상황이었다.
 
탈북자 말대로 침투가 가능하였다고 쳐도, 탈북자 주장을 보면 남파 여부,침투경로,침투인원,철수방법들이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80,90년대 귀순한 탈북 군인인 강명도,최주활,이덕남씨 등은 대규모 특수부대 파견 자체를 언급한 적이 없거나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으며, 몇몇 고정간첩이 광주에서 평양에 상황 보고 하는 정도 였다고 한다.

2006년 임천용은 북한군 450명이 침투했다고 했고 그 후에 600명으로 바꾸었다. 2006년 기자회견에서 또 다른 탈북자는 300명만 침투했다고 주장함. 2006년에는 2개 대대가 모두 서해를 통해 왔다고 주장했으나 2008년에는 1개 대대는 서해, 1개 대대는 동해로 왔다고 말을 바꿨다.

잠수함을 통해 침투했다, 전원이 공해상에서 남한 배를 갈아타 침투했다, 휴전선을 넘어 왔다 등등 탈북자들의 발언 때 마다 침투 경로가 모순된다. 침투 장소도 백암(한국에 없는 지명),목포,포항,경기도 부근 등등 탈북자들의 발언 마다 말이 다르다.

2006년에는 계엄 하에 있기 때문에 육로로 침투가 전혀 불가능했다고 했지만 2008년에는 봉쇄되었다던 육로로 70명 정도가 철수 했다고 하여 모순된다.
3분의 1사망설, 3분의 2사망설, 절반 사망설을 제시하는 등 발언 때마다 광주에서 북한군 사망자의 숫자가 다르며, 그들의 말 대로 최소 3분의 1가량이 죽었다면 북한군 백명 이상의 시체가 나와야 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탈북자들이 최근에 쓴 책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를 보면 80년 5월 북한 방송에서 광주 상황을 실황으로 방송했다고 한다.

20일 mbc,kbc가 방화된 상황이라 광주에는 TV 방송이 끊김. 게다가 중계 시설도 파괴됨. 그러한 상황에서 방송 장비 없이 광주에서 평양까지 실시간 방송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북한 통신망을 감청하던 국군에도 방송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탈북자들은 평양의 방송에서 진압군이 여자들만 골라 죽여서 다리에 매달고, 임산부를 죽이고 배를 갈라 시체를 갈랐다고 하며, 여자의 유방을 베고 난도질한 것을 봤다고 한다. 계엄군이 약을 먹고 흥분하여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것도 봤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발견되는 시체 중에 여자는 극히 드물며, 유방이 베이거나 배가 갈린 시체는 단 한구도 없다. 계엄군이 약을 먹은 적도 없다.
북한에서 북한 주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북한 내에서 일부러 잔인한 장면을 연출하여 자작 방송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몇몇 탈북 군인들이 잔인하게 죽이고 찍은 사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5.18 이후 검찰에서 찍은 사망자 검시 자료 사진을 오용해서 왜곡하는 것이다.  탈북 군인이 한 검시 사진을 놓고 2006년 북한군 시체 사진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곧 바로 5.18유족회가 계엄군 총에 맞은 방위병 손광식씨를 부축하던 고등학생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탈북 군인들은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였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검시 자료에도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리 총상자의 사진을 왜곡한 것이다.

7. 최초 시위대 무장 시점.

계엄군 발포 이후인 21일 오후 2시 30분에 처음 광주로 무기 반입했다.

20일 밤에 광주 세무서에서 탈취된 카빈 17정은 실탄이 없었으며 경찰의 설득으로 반납되었다. 광주 내의 모든 실탄들은 향토 사단인 31사단으로 옮겨져 보관되었기 때문에 실탄이 없었던 것이다.

19일 상무대에서 탈취되었다는 주장이나 나주 예비군 무기고가 털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된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하며 군 기록에서도 전혀 없다.

나주 예비군 무기고가 19일 털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광주 항쟁 사적지 2호가 나주 예비군 무기고라는 것이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광주 항쟁 사적 2호는 광주에 있는 광주역으로 전혀 다른 곳이다.

8. 그밖에 꼬투리 잡는 의문점에 대해

장발을 한 상태로 시민들을 꿇어 앉치는 계엄군들의 사진을 북한군이 계엄군으로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5월 27일 일부 계엄군들은 장발과 민간인 복장을 하고 위장한 상태로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행함. 시민군은 머리가 짧은 사람들을 특히 경계하였기 때문임. 96년 12.12,5.18 재판에서 정호용이 내란목적살인죄를 받을 때의 증거 중 하나는 광주 재진입 작전 전에 가발과 민간인 복장을 제공하여 부대원들을 격려했다는 것임.

얼굴에 수건을 두른 장면을 꼬투리로 잡는데 광주의 아주머니들은 시민과 군인에게 물수건,김밥,식수등을 제공하였음. 시민들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수건을 두르기도 하였으며, 당시 계엄군은 시내에서 연막탄,최루탄을 마구 발사하였기 때문에 물수건을 두른것임. 그리고 계엄군이 21일 도청을 철수하며 방석모,철모 등을 버리고 떠났는데 시민들이 그 것을 착용하기도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