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

 K그룹과 L그룹이라는 두 회사가 있다. 이 두 회사는 같은 업계의 경쟁자이나, 물량 공세와 정부와의 연줄을 이용해 시장을 독점하려드는 L그룹에 맞서 K그룹은 겨우겨우 버티고 있다.

 K그룹의 회장이 은퇴하며 자신의 유산을 사회환원해서 '사회적 기업'을 만든다. 이 회사의 최대 주주는 K그룹이지만, 회사는 K그룹 혹은 K그룹 일가의 사유물이 아닌 주주 모두의 소유라는 것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이사진 및 경영진은 소액 주주들이나 외국인 주주, 기타 다른 주주들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것이 방침이다.

 어느 날. 이사 한 명이 참신한 이미지를 내세워, 주주들과 이사들의 지지를 얻어 이 회사의 월급사장으로 취임한다. 창업주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K그룹 일가나, 대주주, 경영진 및 이사들이 횡포를 부리는 일이 가끔 벌어졌었다. 신임 사장은 그것을 타파하겠다고 호쾌하게 선언했다. 덧붙여 신임 사장은 L그룹 출신이었다. 하지만 K그룹 회장의 인품과 비전에 반해 이 회사에 몸을 담기로 했다고 말하고 다녔고, 사장이 되면서는 회사 개혁과 함께 L그룹과의 화해를 약속했다. 주주들과 이사들, 사원들은 오랜 앙숙이었던 L그룹과 화해할 수 있다는 희망에 젖었다. 

 헌데, 취임 얼마 후 사장이 깜짝 선언을 한다. 회사 이름을 바꾸고 K그룹 색채를 최대한 지워버리겠다는 거다. 취임 전 주주 총회나 이사회에서는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주주들과 이사들이 사장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되려 사장과 그가 영입해온 경영진들이 반문한다.
 "이 회사가 K그룹 사유물인가효?" 
 맞는 말 같지만 어째 찜찜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주주 및 이사들은 사장과 경영진의 말빨에 눌려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건, 처음에는 회사 주식이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사장의 진짜배기 폭탄선언이 터진다.
 "L그룹과의 경쟁이 모든 것의 문제다. 이 회사가 K그룹의 사유물이 되는 것도 막을 겸, L그룹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이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 주려고 한다."  
 L그룹은 '그딴 허름한 K그룹 자회사 내가 가져서 뭐함? 주가도 바닥을 기는데ㅎ 꺼지셈ㅋㅋ' 이렇게 말하며 비웃는다. 주식 시장은 패닉하고, 악의 화신으로 매도된 K그룹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오냐, 우리 없이 L그룹이랑 잘 해봐라' 하면서 회사 주식을 엄청나게 팔아버린다.
주가는 바닥을 기고. 경영 상황도 악화된다. 

 주주와 이사들은 사장에게 찾아간다. K그룹과 화해하고, 예전 간판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사장은 (당연히) 묵살한다.
 "내 제안을 무시한 L그룹이 잘못된 거고, K그룹도 L그룹에 대한 악감정과 기득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잘못했다. 내가 영입한 경영진들이 삽질하는 것처럼 보여도 잘 하고 있다. 난 잘못한 거 하나 없다. 언젠가는 나도 뜹니다."

 거두절미하고, 회사는 망했다. 남은 주주와 이사들이 K그룹에게 돈을 꿔서, 옛날 간판을 다시 걸고 회사를 재건했지만, 자본금 다 까먹은지라 악전고투하고 있다. 사장은 은퇴했고, 그가 영입한 인사들은 스스로 '폐족' 선언을 했다. 그런데, 이 자칭 '폐족'들은 아직도 이놈의 회사가 K그룹 소유물이냐 우리 L그룹 출신들이 다 먹어야 회사의 사유화를 막을 수 있다 운운하며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은퇴한 사장은 L그룹의 모략에 의해 비리와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었다. 원래 성격이 깐깐했던 그는 억울함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회사의 이사회와 주주총회에서는 그 사장에 대한 재평가를 시작했다. 아주 못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업적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회사 사원들이나 소액 주주 중 일부는 사장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불안해한다. 이를 기회삼아 자칭 '폐족'들이 회사 경영을 장악하고, 또 회사를 국밥에 말아먹을까봐.


(원문링크: http://sevengods.egloos.com/2455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