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론 소고
- 맹목적 과학, 서양의학 신봉은 불행을 초래한다 

이 글을 통해

당신은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 생각이 어떻게 인간의 행.불행에 영향을 미치는가?

- 나아가 왜 마음이 만병의 원인이 되는가? 

- 결론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개개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 조건이 보장해야만 한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행복추구권은 모두에게 천부인권적인 권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 이런 보편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면 그 사회는 아직 덜 민주화된 혹은 개화되지 않은 사회인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잘 보장해주는 것이 사회 또는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생명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소한 의식주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사상의 자유를 누리면,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공동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할 것이다. 어느 사회, 국가를 막론하고 이렇게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행복의 조건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행복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행복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인간 존재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야 한다. 인간인 이상 동일한 상황에서 모두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떤 상황에서 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또한 행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만일 어떤 한 사람에게 행복할 수 있는 필요 조건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행복의 원리를 알아야만 한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행복은 결국 인간인 우리가 느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느낌 혹은 감정의 세계이다

행복이나 불행은 느끼는감정이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인간 행위 중 느끼는 행위인 것이다.  느낌은 느끼는 시간과 정도에 따라 무수히 많이 나눌 수 있겠지만 크게 긍정적인 느낌과 부정적인 느낌으로 나누자. 그 중에서 긍정적인 혹은 기분좋은 느낌을 행복이라 하고 부정적인 느낌을 불행이라 하자. 그렇다면, 행복하려면 긍정적인 느낌을 잘 느끼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주어진 동일한 조건하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배움 혹은 연습을 통해서든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러나 실제는 유감스럽게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유롭다고 해도 느끼는 행복감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행복의 어려운 점이 있다. 어떤 행복론을 보면 하나의 조건을 행복의 보편적인 원천이라고 간주한다. 또 다른 책은 다른 조건을 행복의 원천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행복조건은 그 사람이 느끼거나 발견한 행복인 것이다. 보편적인 행복이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행복의 조건을 열거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행복을 얻게 된 원리를 밝혀야만 하지 않을까. , 행복을 긍정적인 느낌, 혹은 감정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보자.  

 

행복을 느끼는 주체인 인간 존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 한다

도대체 왜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만일 행복이 사람마다 다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라면, 모든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길 원한다고 해도 사회가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책임 하에 행복의 기본적인 조건을 제공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행복의 필요 조건을 제공하는 데는 사회적인 비용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만일 행복 조건을 제공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선에서만 충족시켜주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근본적으로 다 같은 인간 존재인 이상 같은 상황에서 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원리를 규명하고, 그 방법을 제시한다면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 존재를 알고, 너 자신을 알라

서양의 위대한 현자,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언제 어떻게 불게 될지 모르는 바람처럼 변덕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인간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 한다. 그래서,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온전히 알고 제어하여 보편적인 인간 존재로 자리매김하지 못 한다. 도대체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로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에 능한 서양인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동양에서는 수양과 치심을 가꿔야 할 덕목으로 삼기 때문에 훨씬 더 자기 절제가 잘 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서양 문명에 많이 물든 오늘날에는 그렇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보편적인 인간으로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인간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일한 조건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누구나 건강한 신체와 무한한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뇌를 갖고 있다.  그것의 사용법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같은 생각, 느낌, 행동을 구현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더 잘 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단순하게 가정해 보자. 어떤 지역의 사람들이 A상황에서 행복을 느끼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B상황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자. 양측 다 A, B의 상황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행복은 배가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복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배움과 자기 규율이 필요하고, 또 약간의 연습 혹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배움이나 연습을 통해 더 능동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인간 존재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주 간단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생각은 생각하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느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생각은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벌써 군침을 돌게 하며 느낌으로 연결되고 또 냉장고를 열어 꺼내먹는 행동을 연결된다.

 

생각이 느낌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하루에 6만 번이나 생각한다고 한다. 생각이 창조하는 느낌은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생각으로 머물 수도 있다. 대게 자신의 경험이 엮이지 않은 순수한 사고는 아마도 느낌보다는 그저 정보로 머무를 수가 있다. 이처럼 생각은 대부분의 경우 느낌 혹은 감정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느낌일 때는 행복이고, 부정적인 것일 때는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잘 해야만 한다.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도 느낀다

느낌은 물론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 얻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키스라는가, 섹스라든가 하는 직접적인 신체적 접촉은 즉각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 근본적으로는 뇌에서 재빠르게 해석을 한 후에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켜서 하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즐거운 감정보다는 오히려 기분 나쁜 감정으로 느껴질 테니깐 말이다. (과학적인 실험 결과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그렇다면 결국 신체적 접촉도 생각을 촉발하고 그 생각에 의해서 느끼게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생각에 의해서 어떤 느낌이 일어나게 된다. 느낌의 정서를 감정 혹은 감성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생각에 의해서 느낌이 좌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감정은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생각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상상, 기억, 추상적 사고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가 있을 것이다. 

 

행동도 느낌으로 연결될 수 있다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도 감정을 일으킨다. 어떤 행동이 직접 감정을 초래하기도 하고, 다음 행동과의 연계 혹은 비교에 되어 2차적인 느낌을 창조하는 정보가 되기도 한다.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 신체를 자주 많이 움직이는 것도 육체에 부담이 되거나 스트레스가 된다. 즉각적인 반사작용을 제외한다면 행동도 결국은 생각이 근본 원인이 되어 일어난다고 하면 생각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생각에 의해 좌우된다 

이상과 같이 인간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존재할 때, 생각이나 행동이 결국은 느낌으로 귀결된다. 생각은 물론, 행동도 생각으로 전환되어 감정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 관계로부터 생각이 행복을 좌우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생각을 잘 해야만 행복을 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 사고 작용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생각, 사고, 관념, 마음, 기억, 정보 등은 생각의 형제 혹은 친구, 아니면 친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뭉뚱그려 생각 덩어리라고 즐겨 표현한다.

 

생각을 잘못 한다 

생각이 이렇게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흔한 잘못을 저지른다. 선과 악이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도 고정불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악, 미추, 고저, 장단 등등은 절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다만 비교에 의해서 가치판단이 일어나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이렇게 상대적인 조건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세계인 것이다. 절대 선이란 없다.

 

습관적으로 생각(비교, 판단)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늘 비교 판단하는 삶을 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자동적으로 비교하게 된다. 예쁜 여성 혹은 멋진 근육질 남성이 더 아름답고 멋진 사람 앞에서 얼마나 쉽게 형편없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가. 또 생각도 습관으로 굳어지기 마련인데, 비교하는 습관이 들면 늘 좋고 나쁜 것을 가리거나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게 된다. 통상 비교는 판단을 일으킨다. 어떤 것이 더 좋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이 서면, 더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 시시비비를 가리게 되면 옳지 않은 것은 버리거나 퇴출시키거나 추방을 해야만 한다. 공존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거치게 되는 자연스런 사고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의식적으로 조정을 하거나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비교하고 판단하고 퇴출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하나의 신념으로까지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크고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습관이 들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좋다고 주장을 한다. 예를 들면 서양적인 것이 동양적인 것보다 우월하거나 좋다고 생각을 한다. 왜 그런지 정확한 논리적 근거도 갖고 있지 못한 채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절대적으로 옳은 학문 방법이라고 생각을 한다. 과학이나 과학적 방법론이 왜 직관 혹은 다른 사유 체계보다 더 좋은 것인지 그 이유도 불분명 한다. 어떤 것에 시간을 많이 쓰고, 자기와 가까워졌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한다. 당연한 결과로서 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것이 다른 것보다 좋고 우월하다고 느슨하게생각을 한다.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학 자체가 어떤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과학 기술에 의해서 어떤 제품의 생산량이 많아졌다고 치자.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인간의 사고 작용일 뿐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관념인 것이다.

 

분명 과학이 인간의 삶에 유용하게 쓰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선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잘못 활용되면 인간 세계를 파괴하는 데에도 쓰일 수가 있으니깐 말이다. 과학이 인간에게 항상 유익하게 쓰일 때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과학 혹은 과학적 사고가 더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리에 가깝다던가 더 객관적인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과학적 방법이 체계적이고 멋진 아이디어라고 해도 더 우월하다고 여겨질 수 없다. 그런데 과학이 과연 진리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일까? 어쩌면 물질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순수 과학에서는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서는 과학을 적용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비교, 판단하는 것의 문제

과학이 인간을 대상으로 할 수가 있는지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를 짚고 넘어가자. 어떤 기준 하에서든 과학만이 올바른 지식이라고 생각하면, 혹은 더 우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판단일 일어나게 된다. 하나가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되면 다른 것은 몰아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없애야 한다. 그래서 과학 혹은 서양의학이 더 우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한의학 혹은 다른 치료 방법은 퇴출시켜야만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타협 혹은 공존은 없다. 선악의 이분법적 구분은 이런 폐해를 낳는다.

 

과학 그리고 서양의학은 무엇인가?

, 이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보고 넘어가자. 과학 혹은 과학적 사고방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완전히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세계일까?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사고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 혹은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서 어떤 지식이나 지식체계가 현실세계에서 구현된다고 해도, 그리고 그러한 지식에 의해서 어떤 대상이나 물질이 제작되거나 창조된다고 해도 그런 과학은 하나의 관념인 것이다. 인간의 사고 혹은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만질래야 만질 수도 없고 볼래야 볼 수도 없는 추상적인 세계인 것이다. 그러한 관념 또는 생각이 현실세계에 구현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 이제 과학을 하나의 관념의 세계라고 한다면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떤 경우에라도 옳은 절대 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것에 비하여 좋고 우월한 것이기에 그것을 떠받들어야만 하는가? 비록 그것에 의해 창조된 물질이나 제품 혹은 서비스가 인간 세계에 더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그래서  이상과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한다면 잠정적으로나마 어떤 과학자의 글에 기대어 보고자 한다. ^^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도달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본질적으로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건 생각의 조각이고 추상적인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스크랩] 죽은 사람은 사람인가. http://blog.daum.net/myinglife/15966916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과학은 하나의 지식이거나 지식 체계 혹은 관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완고하게 과학적인 것만이 좋다고 주장을 한다. 여기에서 끝나면 좋다.

 

서양 의학 맹신주의자들의 오류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서양의학이 과학적인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그것이 과학적이지 않은 한의학보다 우월하다고 주장을 한다. 그들에게 실제 서양의학이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 더 뛰어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치료 효과가 좋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은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데이터, 혹은 주장을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 문제는 서양의학이 우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느 것이 옳으면 다른 것은 그른 것이 된다. 그른 것은 내쳐야만 한다는 당위성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한의학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 무식한 논리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나 냉철하게 사고하지 못하는 지성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 혹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서양의학은 한의학(그것이 정신세계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면)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치료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훌륭한 것을 내치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학을 옹호하는 이들이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이러한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힘의 논리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것을 방지하는 방법은 한의학 측에서도 물리적인 힘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는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다. 물질 세계는 힘이 지배한다. 이제 우리는 선한 것이 패하는 것을 더는 묵과해서는 안 된다. 옳지 않은 것에 힘을 실어주면 절대 안 된다. 악용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그것을 규제하고 견제할 힘이 따로 필요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훨씬 더 높고 고상하다고 해도 양보와 배려만을 미덕으로 삼을 게 아니라 힘으로 싸워서도 이길 준비는 해두어야 한다. 사랑하고 배려하고 이해할 때 하더라도, 확실히 고삐를 틀어쥐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세계가 드높아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학은 하나의 지식 체계일 뿐이다.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관념이다어떤 관념이든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관념계의 일정한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그것의 가치는 판단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유일한 판단 기준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하냐는 점일 것이다. 한 개인에게 진정 유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에게도 유리한 것이어야만 한다. , 서양 과학이라는 관념이 내(인간 김선욱)게 유리한가. 어떤 이익을 주는가. 내게는 그냥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물론 다른 이에게는 좋은 관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관념이든 절대적으로 옳은 관념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고 했다. 생각에 의해서 (행복한 혹은 불행한) 느낌이 좌우된다고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잘 해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이 진정 인간에게 이롭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느낌을 창출해야만 한다. 과학 혹은 서양의학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편협한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느낌을 낳을 수가 없다.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기분을 낳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고정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잘못된 생각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더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자면,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몸은 부정적인 생각의 영향을 즉각적으로 받는다대게 삶의 습관이 그렇듯, 생각도 습관화된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든 사람은 늘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쉬지 않고 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습관이 들어있기 때문에 거의 매 순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육체는 그러한 나쁜 영향을 받아 어느 샌가 병들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생각, 혹은 마음 중에서 좋은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감정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생각은 불멸의 진리인 셈이고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은 우리 몸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마음이 만병의 근원이라고 정의한 근본 논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정적인 감정은 몸에 엄청나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분노의 감정은 세포에 2년간 기억이 된다고 (정확하지는 않다.) 하는 과학적(?ㅋㅋ)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몇천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한의학의 배경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 덩어리 음양오행이라는 것에 의해 이뤄졌을 지도 모른다. 그 근본을 정신 혹은 마음의 세계에 둔 것이라면한의학 등 동양 의학은 위대한 생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인간은 하루 6만 번의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중 95%는 쓸데없는 고민 혹은 걱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많이 부정적인 생각에 노출되는 것인가. 그만큼 몸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스 셀리에 박사가 스트레스 이론에서 밝혀놓았듯, 성격이 인간의 질병에 커다란 영향을 끼지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을 잘 못하거나 나쁜 생각을 하면 질병에 걸리는 것이다. 즉 생각을 잘 못 하거나  마음을 잘 못 다스리면 몸이 병들어 불행해지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인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만일 육체를 인정한다고 해도, 마음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이라는 하인과 하인의 주인인 정신이 일체화된 존재인 것이다.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인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물리학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면 육체 또한 정보체이다. 결국은 정신이라는 말이다. 또한 정신은 파동이요 빛이라는 물질이라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몸과 마음은 결국 새로운 차원의 물질인 셈이다. 결국 인간 존재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의학은 이러한 위대한 존재인 인간을 물질로만 간주하고 수술을 하고 약으로 다스리려고만 한다. 과연 이치적으로 맞는 것인가. 정신적인 존재를 약이라는 물질로 치료할 수 있을까? 그것도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더는 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생각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 느끼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보다 먼저 잘 생각하는 능력을 갖춰야만 하는 것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행복한 생각을 하며 보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일년을 나아가 평생을 행복을 잘 느끼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영위하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이처럼 간단하고 쉽다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은 이처럼 의외로 쉬운 것이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기존의 잘못된 생각, 관념, 사고를 뿌리 채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을 잘 해야만 한다. 더 바르고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할수록 더 많이, 더 자주 행복하게 느낄 수가 있다. 이 마음 혹은 생각 다스리기가 바로 명상이다. 그러므로 명상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

 

명상이란, 혹은 묵상이란?

명상을 잘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세상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와 우주에 대해서 가장 논리적으로 잘 밝혀놓은 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이다. 공부를 해 보면 안다. 이걸 모르면 서양의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는 평생을 가도 행복을 제대로 깨우칠 수가 없다.   조견오온개공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보다 인간 존재의 삶을 더 명확하게 밝혀놓을 수가 없다. 오늘날의 심리학으로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 지식(체계)에 가깝다. 비판하려면 먼저 불교의 유심론, 유식론을 공부해 보라. 이러한 이치를 잘 깨닫게 되면 우리는 불필요한 번뇌를 하지 않게 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평생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사는데, 이런 고민 걱정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깨쳐야만 완전한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

 

명상은 또한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생각을 하지 않고 관념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생을 제대로 관조하게 된다. 이때 일체의 것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인생의 참 진리에 대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열반, 혹은 해탈이라는 참행복에 들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이다.

 

만일 생각을 하려거든 최고의 생각 혹은 마음인 사랑만을 생각하라. 누가 매 순간 사랑만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는 늘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하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비를 베풀라고 했다. 그것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마음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인간 최고의 행복감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쪽에서 바라보고 설하신 것이다. 고로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치밀한 논리와 예수님의 직관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한형제 한몸임을 깨닫는다면 다툼과 이기심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인간은 한마디로 가능성의 존재이다. 이런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저런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짐승 같은 하찮은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분들이 진실로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너희도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들이다. 하나의 모범이 되신 것이다. 서양에서 그리고 동양에서. 각자 적합한 방식으로, 적절한 생각의 표현으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외쳤던 '너 자신을 알라'는 이제 우리가 기존의 고정관념을 떠나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도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참 진리인 것이다. 이제 당신은 알 것은 다 알았다.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어떤 존재이든 자신이 원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신의 종으로 남던지, 아니면 신과 같은 위대한 존재가 되던지.

 

 

 

2010. 5. 11.    21:33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고서

선욱

 

 

 

<덧글> 이 세상 모든 것이 관념이라고 하면 신은 관념이 아닐까?

 

 

 

[출처]: http://www.myinglife.co.kr/bbs/bbs.htm?dbname=B0092&mode=read&premode=list&page=1&ftype=&fval=&backdepth=&seq=32&num=27



인간과 신경과학 (or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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