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예술론에 대한 단상 1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모습이 형언할 없고 재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습관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시작하면 풍경은, 마치 우리가 어떤 집을 들어설 집의 전면이 사라지
듯이
일순간 증발해 버린다. 풍경은 아직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듯이,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로 과도하게
무거워지지 않은 상태다. 우리가 그곳에서 방향을 분간하게 되면 최초의 이미지는 다시 재생할
없게 된다.   <일방 통행로 , 유실물 >.


1.


어떤 인간이 새로운 인상과 풍경 속에서 관습적인 지각의 틀을 잠시 벗어나 어떤 비관습적인 지각,
무심히 생동하는 지각의 세계를 자기 앞에서 순간 체험하는 .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각의 변환을
통해 습관적인 자기 인식, 다시 말해 획일화된 자기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낯선 방문지의 풍경이
요동칠
, 요동치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제자리> 대한 감각이 아직 자리를 잡기 전에, 도로의
표지판에 새겨진 지시 기호에 대한 감각, 은행과 백화점의 위치에 대한 감각, 옥외전철의 노선과 자동차
들이
어디에서 어떤 방향으로 운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아직 자리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지각은 일시
적인
환각적인 상태로 잠시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포획된 지각이 습관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양상을
띄게 , 일상적인 각성의 경험, 관습화된 안에서 만들어 졌으면서도 그것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
흔히 <예술적>이라고 부르는 체험이 시작된다.   


2.


그러므로 예술은 우리가 일상적인 세계의 습관적인 지각 토대 속에서 사물이 특수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
그리고 연결이 비일상적인 지각 속에서 포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술에는 원형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다. 습관적인 지각의 틀에 아직 덧씌여지지 않은 <최초의> 이미지 , 이미 형성된 지각과
인식의
방향에 따라 사물과 세계에 대한 세부적인 구획이 잡히기 전까지, 사물의 멂과 가까움이 동시적인 무질서의
그림
속에서 서로 공명하는 - 원형의 이미지에 대한 비인습적인 지각이, 바로 벤야민이 아우라라고 부르는
특수한 예술적인 체험의 근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원형적인 이미지의 지각에서 세계와 사물의 상태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에서 도구적으로 포착될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소유적인 객관성의 가상을
부단히
무너뜨리는 , 다시 말해 사물과 나와의 거리를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사물을 멀리
보내고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까이 보내는, 특수한 지각 속에 존재하는 지속적인 부정과 환치의 안에서 존립하는
것이다
.  


3.


미학 (Asthetik)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상이 예술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의 지각
자체라면, 아우라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일상 속에 혼재하는 비일상적인 지각들의 존재 양식을
규명하는
것이 미학의 우선적인 과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여기서 걸음 나아간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지각 자체가 지각 자체를 수용하고 전달하는 매체 기술의 발전에 의해 종속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발전사적으로 - 규정되기 때문에, 인간의 지각의 토대가 고정 불변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화하는
지각의
토대 위에 존립하는 예술의 역사적인 진행 경로 역시 발전사적으로 규정될 밖에 없다. 여기서 시각을
확대하면, 바로 그러한 매체 기술의 발전의 조건은 바로 사회 내부의 계급과 계층들의 사회 정치적인 역학 
관계들, 그리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들간에 벌어지는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 관계들에 의해 규정된다. 예술 관념
자체의
변전을 가져온 구체적인 예술 장르들 시각 예술과 청각 예술, 촉각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 전개
과정이
점진적이지만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바로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인간의
지각과 세계를 매개하는 매체 기술의 역사적인 발전 과정 하에서 조망될 때에만, 그리고 나아가 매체
기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사회 정치적인 힘들의 역학 관계가 드러날 때에만 비로소 만족스럽게 설명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매체 기술의 발전과 그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지각의 매체들 영화와 사진 같은 것들
통하여 예술의 영역 안에 어떻게 새로운 예술 장르가 만들어 지게 되었고 그것이 예술의 관념 자체에
, 간접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 왔는가에 대한 물음은 예술 사회학, 나아가 미학 일반에 대한 물음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된다. 미학이 아름다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인간의 변화하는 지각 자체에 대한
물음이듯이
예술의 관념에 대한 물음 역시 바로 인간의 변화하는 지각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술의
변화하지 않는 <본질> 대해 묻는다면 그것은 예술에 대한 하나의 견고한 허위와 가상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그러므로 물어져야 것은 <사진이 과연 예술인가?> 아니라 <사진이 (혹은 영화가, 혹은
여타의
다른 새로운 지각 매체들이) 예술의 관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질문은 예술에 대한
물음
속에서 이미 시대의 예술관에 뿌리를 박고 있는 특정한 지각- 아우라적인 지각- 토대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지만
, 후자의 질문은 다양한 지각의 가능성들을 포괄하여 검토해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4.


이런 맥락에서 벤야민이 현대 예술의 발전사적인 징후를 <아우라의 붕괴>라고 규정할 경우, 그러므로 진술은 크게
가지 맥락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아우라적인 사물의 붕괴. 이것은 대량의 복제가 가능해짐으로서 <사물로서의 예술 작품> 대한 아우라가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복제 기술을 통해 예술 작품으로서의 진품성, 사물로서의 예술의 권위가 붕괴된다. 


둘째. 아우라적인 지각의 붕괴. 아우라적인 지각의 붕괴는 또한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는데, 하나는 매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아우라적인 지각을 대체하는 새로운 양식의 지각이 등장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적인 힘들 속에서 개인적인 지각이 아닌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지각에 예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흐름
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경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자기 침잠의 신비한 관조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만들
었던
, 아우라적인 지각에 토대를 예술관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이 점점 존재 의의를 상실하고 아우라적인
지각이
보다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각성에 기초를 초현실주의적인 지각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셋째 아우라적인 관계의 붕괴. 예술가와 사회, 혹은 예술가와 대중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와지게 되며 예술가가 자기 자신
예술 작품에 대해 취했던 입장은 예술가와 대중간의 비평적인 관계로 대체된다. 예술품은 이상 예술가의 잔여물로
간주되지
않는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품에 대해 특권적인 지위를 빼앗기고 신비로운 존재로 남지 못함으로서 예술은
급진적으로
상업화하거나 전위화 한다.

 

아우라의 붕괴에 대한  테제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후술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