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음성음운론 책을 좀 읽으면서 심심풀이로 언어별 사례를 수집하다가.. 검색에 걸린 다음과 같은 요상한 칼럼을 보았습니다.

[삶의 향기] 한국어 잘 하세요? - JOINS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이 부분을 봅시다.

나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글은 세계의 다른 여러 문자와 달리 ‘발명’된 것이라고, 만든 사람과 만들어진 시기는 물론 그 원리와 목적까지 확실히 알려져 있는 유일한 문자라고, 게다가 발성기관의 모양 변화를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에 배우기도 쉽다고, 세상의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많은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고, 그 때문에 훈민정음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고(영어 실력이 부족해 이렇게 조리 있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일본 문자는 한자를 차용해 만들어진 게 맞다고 확인해 줬다).

외국인 모씨에게 한글의 제자 원리를 잘 설명해 준 것은 사실과 원칙을 존중하는 합리적인 한국인 A로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 이 분이 굳이 목소리를 높이실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군요.. 그 외에는 대체로 널리 퍼진 편견들만을 제시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저 외국인이 언어학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발언들을 들어 주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1. 한글은 만든 사람과 시기, 목적, 제자 원리가 알려져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 차라리 자질 문자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당장 타이 문자를 만든 람캄행 대왕이나 고 페르미 문자를 만든 스테판 페름스키를 죽이고 계십니다. 성 키릴로스는 신화적인 데가 있다고 쳐도 말이죠. 게다가 현대에 오면 이런 사례는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아지지요. 좀 더 많은 예를 보고 싶으신 분은 마쓰다 유키마사의 『제로』라는 책을 추천드립니다.

2. 한글은 세상의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많은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다?(**)(****)
→ 자음과 음절 구조까지 따지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가 되기 때문에 모음만 가지고 따져 보죠. 당장 한글은 영어나 프랑스어(***)의 모음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합니다. 단모음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모음은 최대로 잡아야 11개인데(ㅣ, ㅔ, ㅐ, ㅟ, ㅚ, ㅡ, ㅓ, ㅏ, ㅜ, ㅗ, ㅢ), 영어의 단모음은 13개(방언차가 있는데, 장단 구별 제외 대략 12-13개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어의 단모음은 16개(이 경우 대략 14-16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지금은 꽤나 원시적인 체계로 평가되는 존스의 18기본모음(cardinal vowels)조차도 한글은 제대로 표기하지 못합니다. 이중모음이 닫힌 체계를 이룬다는 것도 문제고요.

3. 한글의 우수성 때문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는가?
→ 링크로 대체하겠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에 관한 오해


* 참고로, 브라흐미계의 아부기다인 데바나가리 문자나 타이 문자도 어느 정도 음운 자질과 문자 간 형상적 대응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한글만의 특성은 아닙니다. 한글이 좀 깔끔하다는 정도죠.

** 현재 표준어식에 맞췄을 경우 한글로 표현 가능한 음절의 수는 2904개입니다.(참고)

*** 보다 명확한 예로, 덴마크어의 단모음이 16개라는 것을 지적하는 게 좋겠군요.

**** 확실한 반례를 들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서 당장 차상호, 『가장 알기 쉬운 태국어 회화』와 정환승, 『현대 태국어 문법론』을 가지고 타이 문자로 몇 개의 음절을 표기할 수 있는지 계산을 해 봤습니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는 태국어에 있는 성조는 고려하지 않아야겠죠.

이 경우, 성조법이 엮여서 늘어나 있는 태국어의 44개 자음은 구별되는 21개 음운만 고려하면 됩니다. 태국어의 단모음은 장단 구별 없이 9개인데, 장단 구별을 하면 18개이고, 복합모음(이중모음, 삼중모음. 사중 이상은 허용되지 않음)까지 포함해서 모음 음운의 수를 계산하면 40개입니다. 또한 초성자의 경우 2개의 자음이 겹치는 복합자음은 16종인데, 구별되는 음은 12종입니다. 또 종성음은 'n, m, ng, k, t, p, ?(성문 폐쇄음glottal stop)'의 7개만 허용됩니다.(l이나 r은 n으로 전성됩니다. y와 w는 복합모음에 포함시킴.) 마지막으로, 복합모음 중 16개는 반모음으로 끝나는 것인데, 이 뒤에 다른 자음이 올 수 없는 제약이 있으니 이 경우를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충 계산해 보면 타이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음절의 개수는 34 × 16 + 34 × 24 × 8 = 7072개이군요. 여기서 몇 가지 허용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다고 해도(잘은 모르지만 종성에서 성문 폐쇄음은 특수한 경우에만 발현되는 듯?) 확실히 현대 한글보다는 많아 보입니다. 참고로, 이 경우 역시 옛 타이 문자에서 사용되지 않는 몇 가지가 빠진 것입니다. 다만, 옛한글과 옛 타이 문자를 비교하면 옛한글의 표기범위가 넓은 것 같네요.

아참, 물론 태국어에 있는 5성조까지 고려하면, 저기에 5를 다시 곱해서 35360개를 얻습니다. 다만 성조법에 따른 발현 제약은 좀 있죠.
(위 수치들은 조만간 다시 제대로 태국어 문자와 성조법을 공부해서 정리한 뒤에 깔끔하게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