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간 중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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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L. 루이스라는 사람이 지은 『신의 용광로 - 유럽을 만든 이슬람 문명, 570~1215』인데요, 이 책에서는 일반 이슬람 관련 서적들에서 무시하고 잘 설명하지 않는 이슬람 이전 시대(자힐리야)와 이슬람 태동기 직전 주변 세력 동향(동로마-사산조 페르시아 전쟁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을뿐더러 이슬람 자체의 역사도 상당히 밀도 높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쪽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다만, 번역의 질이 탁월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책 소개는 이쯤 하고.. 일전에 이덕하님의 자게 글('이슬람교에서는 여자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나요?')에 제가 짤막한 답글을 단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이 글이 생각이 나서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슬람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는 동시대인들에 비해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슬람교 자체도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종교였는데(현대에도 꾸란 등을 근거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왜 역사적인 이슬람 국가들 혹은 현대 이슬람 국가들은 저 따위인가, 하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확실히 좀 힘이 듭니다.

이에 대해 복합적이며 정교한 해답을 내놓는 것은 제가 아랍지역학이나 이슬람 연구자가 아니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이슬람을 받아들인 종족들의 기층 문화에 의한 영향력이나 여러 역사적인 이유들, 투르크와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강해진 전통의 강조 등, 수많은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니, 제대로 파고들기 위해서는 먼저 아랍 부족들의 역사와 전통에 관해서부터 해박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고, 이슬람 초기 역사에서 나타난 '낙타 전투'라는 사건에 국한해서 살펴 보도록 하지요.

낙타 전투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그 측근들이 만든 종교적 최고위직인 칼리파("계승자")직의 승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 중 벌어진 전투입니다. 칼리파 중 초기 아부 바크르(1대), 우마르(2대), 우스만(3대), 알리(4대)의 네 칼리파는 무함마드의 집안 사람이었다는 뜻으로 '라시둔 칼리파'라고 불리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4대인 알리는 젊은 시절부터 유능함을 인정받고 있었고, 무함마드가 가장 귀여워했던 딸인 파티마의 남편이었던 데다 최초의 남성 개종자(***)였기 때문에 2대나 3대쯤에 칼리파위를 받을 수 있었는데도 20년이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지지자들은 꽤나 불만이 쌓인 상태였지요. 더구나 알리의 칼리파위 승계 시기에는 급격한 팽창으로 인해 유입된 부와 권력으로 아랍 세계가 뒤숭숭해져 있었는데, 알리는 좀 안 맞게 이상주의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칼리파의 권위에 대해 도전이 일어났고, 결국 알리는 후에 우마이야조를 일으키는 무아위야와의 내전 끝에 암살당하고 맙니다. 다만 내전 초기에는 알리가 승기를 잡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내전을 일으킨 것은 무함마드의 세 번째 아내인 아이샤가 구심점이 된 알리 반대파였는데, 이들이 낙타를 타고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때 벌어진 전투는 '낙타 전투'라 불리게 됩니다. 이 전투와 그 귀결은 이슬람 여성 배제사의 상징적이자 역사적인 기원으로 평가되는데요, 자세한 건 아래 인용문을 보시지요.

 집안의 반란이 먼저 일어났다. 무함마드의 세 번째 아내인 아이샤는 알리를 몹시 싫어했다. 알리의 죽은 아내 파티마가 예언자의 총애하는 딸이기는 했지만, 아이샤는 자신 역시 예언자의 총애하는 아내로서 누구에게도 권위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이샤는 하디스와 꾸란의 문제와 관련하여 칼리파를 가르치려 들었다. 그녀의 뛰어난 기억력도 예언자의 언행을 회상하는 데 한몫했다. … 아이샤가 알리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는지 혹은 알리에게 반대하는 예언자의 측근들과 공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알리의 통치에 반발하는 자들이 벌인 전투에 낙타를 타고 참여했다. …

 아이샤의 전투 의지는 확고했지만, 결국에는 알리의 부대가 남부 이라크에서 벌어진 '낙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반란의 주모자인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왐과 탈하는 처형되었다. 생포되어 모욕을 당한 아이샤는 알리의 사면을 받아서 메디나의 한 주택에 가택 연금되었다. 바스라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내전의 시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슬림 남자들이 공공 업무에서 여자들을 배제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젠더의 역할에 대하여 상당히 개명된 생각을 가졌다. 이 때문에 꾸란은 여성을 폄하하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과는 구별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 여성의 권리를 강조한 예언자의 사상은 그의 종족, 지역,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슬람 운동 초창기에는 무슬림 여성들도 남자들과 나란히 전투에 참가했다. 그들의 외침과 포효는 때때로 적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디자, 힌드, 합사 같은 능력 있는 여자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서히 전통과 제도의 무게에 눌리기 시작했다. 명예와 전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아랍 남성들은 여성을 배제하는 전통과 제도를 수립했다.

- 143~144쪽에서.



*
사족 하나. 당시 동로마-페르시아 전쟁은 서로 상대 국가를 거의 끝장내기 직전까지 몰고 갔기 때문에 양국 국력에 엄청난 공백을 가져왔습니다. 처음에 페르시아가 서진해서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 등을 점령한 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데까지 이르러 거의 동로마 멸망 직전이었는데,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뛰어난 군사적 지도력에 힘입어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어 이번에는 동로마가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결국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우 2세가 그 아들에 의해 퇴위되고 휴전 협정을 맺은 후 전쟁은 끝이 나지요.

이런 상황에서 변방의 듣보잡이었던 아랍 무슬림들이 갑자기 총공세를 펼쳐서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양쪽을 모두 먹어 버립니다.(리비아에서 캅카스까지, 그러니까 페르시아의 전체, 동로마의 8할 정도) 아마 이 전쟁이 없었더라면 현대에 조로아스터교가 기독교 비슷한 세를 누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페르시아의 민족 서사시인 『샤나메』에 다음과 같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위 책 125쪽에서 재인용)

이 빌어먹을 세상, 빌어먹을 시대, 빌어먹을 운명
저 무지몽매한 아랍인들이 나를 무슬림으로 만들어 버렸구나!


참고로 제가 아는 바로 말씀드리면, 요즘도 이란 사람들은 아랍인들은 무식하고 문화를 모른다고 동격 취급하면 기분나빠한다고 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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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둘. 아랍인들 중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고전 아랍어식인 무함마드 외에도 모하마드, 메흐메트, …) '예언자 무함마드'라고 구별해 주는 게 좋습니다. 또는 '알라의 사도 무함마드'(라술 알라 무함마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렇게 쓰면 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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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이슬람교 개종자는 무함마드의 첫 부인인 하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