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ttered with. SexyDolphin

1. 인간은 회의하는 존재다라마라,
    회의하는 존재가 인간이 되었으니


단 한 번이라도 회의(懷疑) 해본 적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회의할 수 있겠는가?

의식이 존재에 선행함의 달콤한 유혹, 관념론을 끊어내는 순간부터 비로소, 진정성이 녹아든 회의가 시작된다

ref 1 : http://theacro.com/zbxe/?mid=BulletinBoard2009&search_target=user_id&search_keyword=sexydolphin&document_srl=155448
ref 2 : http://theacro.com/zbxe/?mid=BulletinBoard2009&search_target=user_id&search_keyword=sexydolphin&document_srl=151654



 
회의는 존재가 의식에 선행함의 중립적 고통 즉, 과학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 방법론은 곧, 밝혀지지 않았던 존재를 밝혀내므로써 의식의 전환, 新패러다임의 창출을 이루어낸다



2. 그 누가 아리오

 사실 우주는 그 누구에게도 불공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공평하지도 않다. 우주의 초개성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 초개성에 가장 가까이라도 다가설 수 있겠는가?

 의식에 기대말고 존재를 희구함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수 있냐 땅치며 질질 짜길 멈추고, 그럴수 없는 존재를 밝혀내는 것이다
 (특히, 이는 1:1 인간관계에서조차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계발의 기쁨을 제공한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출현만큼이나 진보의 역사 역시, 우연의 산물이다. 나와 너의 삶, 만남 그리고 이별, 죽음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란 모두, 기성(旣成) 의 우주에 갓난아이의 형상으로 슬쩍 끼어들었을 뿐이기에

 모든 인간이 태곳적부터 불멸하였다면 진보의 역사란 필히, 필연의 산물이다. 그렇게 말해도 된다. 충분하다. 그러나
 슬쩍 끼어들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인권 개념이 인간 본성의 발로라 결코, 믿지 않는다. 인간 본성은 종교적 교리가 주장하는 신성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 본성의 논리는 곧, 정의를 전제한 채 사례를 통해 증명하려는 계몽주의적 방법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누군가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비과학적, 비합리적 진리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의식에 기대말고 존재를 희구함이란 계몽을 버리고 계발을 취한다
 계몽은 소수의 특권이나
 계발은 만물의 권리다



 어쩌면 멀고먼 미래에, 오늘날의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사회/ 자연 환경이 조성되면 민주주의 역시, (고대 문명의) 한때의 삶의 양식으로 잊혀져 갈지 그 누가 아리오



3. 인간이 회의, 욕망하는 것은 계발이다
    계발은 곧, 진보의 신호탄이다

 아테네의 인간관과 스파르타의 그것은 너무나 상반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테네를 찬양하여 스파르타를 경멸하지 않는다
 감히 그 누구도 역사를 가정하지 못한다. 역사는 곧, 초개적 진화이자, 우주의 순리이기에. 구체적으로 풀어내자면,

 무수한 존재들이 머물다 간 ‘어떻게든 사람이 살았던 현장의 컬렉션’ 이다. 그렇다, 회의의 대상은 오직, ‘밝혀지지 않은 존재' 에 한하여,
 역사는 허용하여 관용을 베푼다



 합리란 정당화된 논리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다

 민주주의 논리도 정당화되는데 독재 논리라고 정당화되지 못할 근본적인 이유란 애초에 없다. 다만,
 국민이/ 시민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길 합리적으로 원한다면 응당, 합리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야 한다 굳이 떠들지 않아도 나아가게 되어있다
 
 합리적 존재들이 머무는 곳의, 그들만의 삶의 양식이 곧, 진보이며 역사는 이를 의식적 진화의 수레바퀴로서 구를 영광을 하사한다



 ‘논리’ 는 과잉된 자아를 절제하여 다듬어가는 지극한 사적 과정 그, 자체이며,
 ‘합리’ 란 무수한 논리들이 존재들의 계발을 통해 ‘공적 광장’ 에 유입되어 마침내, 역사로부터 선택된 ‘그들의 최선/ 정당’ 이다

 진보가 엄숙해야 할 유일한 하나란 바로, 그러한 ‘그들의 최선/ 정당 즉, 합리’ 다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우주의 순리에 동기화함으로, 계발에 이르고,
 계발된 합리적 존재들이 ‘공적 광장’ 에 모이고 모인 사회는 더 이상, 만물의 권리 '계발’ 을 비합리적으로 강탈하지 않음으로써
 그 누구도 의식적 진화로부터 소외, 계몽되지 않게끔 이끈다. 구체적으로 풀어내자면,

 의식적 진화는 존재가 계발되면 자연히 발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오히려,
 존재를 계발하기보다 의식적인 진화를 유도함에 집중하는 진보를 위한 진보는 소외, 계몽의 퇴보/ 모순만이 그 숙명이다



 만물의 권리 '계발' 을 강탈하지 않도록 합리에 엄숙하는 과정 그, 자체가
 ‘광장의 구체적 회의-진보론’ 이다. 진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광장에 뛰어들어 진보人 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 이 아닌 ‘그들’ 에 참여하여 비로소, ‘그들’ 이 ‘너’ 에게 말을 걸어 ‘우리’ 가 될 때,
 ‘우리’ 가 ‘우리’ 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광장의 구체적 회의-진보론’ 이자 진보 人 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독재가 만물의 권리 '계발' 을 강탈한다면, 합리적 존재들이 공적 광장에 모이고 모인 사회에선 응당,
 독재 논리를 외면하고 민주화 논리를 회의하게 되어있다. 강탈된 계발의 권리는 곧, 공적 광장의 붕괴로 현상화되기 마련일테니. 즉,

 이 명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유별난 진화적(초개적) 속성이, 인간은 타 종(種) 에 비해 유독,
 '계발을 욕망하는 사적 자아’ 가 열렬한 덕택에
독재 논리가 강탈하는 타인의 계발 권리를 곧, 본인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밖에 없음이다

 인간의 계발은 언제나 '공적 광장' 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너가 계발해야 나도 계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가 욕망해야 나도 욕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동일시가 바로 ‘우리’ 가 ‘우리’ 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진보의 첫 번째 관문, ‘공적 광장’ 을 통해서만이 집약되는 인간의 ‘합리’ 다



 지겹게 반복하자면, 독재 논리가 ‘나쁘고 틀린’ 것이었기에 ‘좋고 옳은’ 민주화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독재 논리가 민주화 논리만큼 계발이 지고 피는 공적 광장의 합리를 충족하는데 실패했기에, 우주의 순리는 ‘민주화 논리’ 에
 의식적 진화의 영광을 선사했을 뿐이다. 비단 초.개.적.으.로.



4. 회의, 욕망으로부터의 계발을 터부시하는 진보는
    오늘부터 찌질이 퇴보다


 나는 분노의 진보를 외치면서 회의의 진보를 망각하는 자들의 진정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진보는 결코,
 ‘우리의 합리적 연대(連帶)’ 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합리적 연대’ 에서 출발한다면 결코 분노할 수 없다

 광장은 분노하는 자들의 배설창구가 아니다 오히려,
 연대를 갈구하는 자들의 계발창구인 것이다

 연대란 분노 따위를 통해 형성되지 않는다. 분노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선악구조, 아군/ 적군 대립 구조 인식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으로서,
 그 구조 자체에 대해 외면하는 연대보다, 합리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을 뿐이다. 즉,

 분노는 진보의 탈을 쓴 독재 논리를 은닉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하다

 1:1 인간관계에서도 착한척, 희생자 논리에 집착하여 징징댈수록 오히려, 잔인하게 이용되어 버려지듯
 분노의 삯은 오직, 공적 광장으로부터의 퇴출 뿐이다
 


 진정한 진보는 결코,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직,
 밝혀지지 않은 존재를 향해 묵묵히 어제처럼 걷고 또, 걸어갈 뿐이다

 대한민국에 묵묵히 어제처럼 걷고 또, 걸어갈 진보정당을 기대하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