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간이 이성의 도움으로 자신을 둘러 싼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을 뛰어 넘어 사고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성의 한계는 인간의 이성 자체가 물질세계의 반영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고 능력의 불완전성과 정보 입수의 불완전성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위인전에나 등장하는 위대하고 날카로운 이성의 소유자들이 '인간이 인간을 소유해서는 안된다' 와도 같은 현대 사회의 너무도 당연하고 보편타당한 명제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우리는 조선시대 최고의 도덕군자 이황과 이이조차 양반들이 노비들을 소유하고,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현실에 이상함을 느끼거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터럭같은 깨달음조차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 뿐인가? 노비도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너무나 간단한 도덕적 판단조차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이함을 느끼기도 한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노비들에게도 역지사지와 측은지심이라는 유교적 원리를 즉시 실천했으리라.

그렇다고 그것은 이황과 이이의 책임은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탐욕스럽고 포악해서도, 이성적 판단능력이 허술해서도 아닌 것이다. 인류 역사 수천년 동안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들이라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었을리가 없다. 그들 역시 차원의 벽에 갇힌 것처럼, 이성의 힘만으로 물질적인 조건을 뛰어넘을 수 없던 사람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21세기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마르크스같은 위대한 선각자들이 있어 인류의 미래상을 희미하게나마 들여다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 이르는 구체적인 경로와 모습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현재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는 것들이, 미래의 후손들에게는 우스꽝스럽고 기이하다 여겨질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따라서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 자본주의를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체제라고 주장하거나,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이르는 방법을 놓고 온갖 머리를 싸매던 선조들을 향해 어찌 그리 멍청하고 바보스러웠냐고 비웃을 지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좌파연 하는 사람들이 자나깨나 머릿속에 그려보는 궁극의 목표이다. 이것은 아마도 마르크스가 평생에 걸친 고민과 연구끝에 내놓은 명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간의 모순' 이 궁극적으로 해소된 상태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혹 어떤 뛰어난 천재가 정교한 탐구를 통해 그런 상상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의 구체적인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마치 이황과 이이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교 사회 궁극의 목표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할지라도, 그 구체적인 모습이 현대의 민주공화국임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목표는 어쩌면 현재 우리 발 밑에서,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던 모습으로 현실 속에서 무럭 무럭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사회화된 생산수단의 원초적인 형태는 이미 우리 사회에 다수 존재한다. 가령 어느 농촌 마을의 주민들이 공동의 노동으로 건축한 저수지가 있다면, 그 저수지는 농업용수를 생산하는 사회화된 생산수단이다. 저수지에 담긴 농업용수는 건축에 참여했던 마을 주민이라면 그 누구라도 필요한 만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이다. 저수지를 건축하는데 누가 더 많이 노동했는지 아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저수지에 담긴 물을 시장에서 거래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 소유할 필요도 없고, 좌우의 이념으로 나뉘어 다툴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만큼 소비하는 생산 양식이다.

그러면 예시로 든 저수지는 너무 원시적인 형태가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럼 근사한 현대식 아스팔트 도로는 어떨까? 도로는 '더 빠르고 쾌적한 교통'이라는 재화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이자 생산수단이 맞다. 단지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서, 도로 역시 생산수단임을 까맣게 잊고 있을 뿐이다. 그 도로를 하루에 수십번을 사용하든, 평생 단 한차례도 사용하지 않든 누구도 시비걸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로는 그렇게 누구라도 필요한 만큼 무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사회화된 생산수단인 것이다. 오히려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어 통행료를 받는 유료 도로가 특이한 형태로 취급 받는다. 저수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저수지는 마을 주민들의 공동 노동이라는 원시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고, 도로는 노동을 화폐로 변환하여 납부한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차이밖에 없다.

그것 말고 또 없을까? 바로 우리 눈앞에, 공론사이트 아크로가 있다. 아크로 역시 공론이라는 재화를 생산하는 사회화된 생산수단이자 기업이다. 아크로 역시 사적 소유도 없고, 공론의 소비에 있어 자본주의적인 시장 경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루에 열개씩 게시물을 올리던, 평생 눈팅만 하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아크로의 소유 형태에 대해 누군가가 좌파적이니 뭐니 칭송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살펴보면 사실 저수지나 도로나 아크로가 모두 똑같은 형태의 사회화된 생산수단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똑같은 공적 소유라고는 하지만, 그 소유 형태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저수지는 오로지 마을 주민들만의 공동 소유이며, 도로는 정부나 국민 전체의 소유이지만, 아크로의 소유에는 그마저도 없다. 회원들 모두의 소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크로를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의 소유도 아니다. 아크로 운영진의 소유는 더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소유인가? 그것 역시 말이 안된다. 그럼 대한민국 사회의 소유인가?  미안하지만 아크로의 서버는 대한민국이 아닌 외국에 있다. 그럼 눈팅들의 소유인가? 그것 또한 아니다. 그럼 아크로에는 소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 역시 아니다. 아크로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동전처럼, 아무나 줍는게 임자라는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대체 뭘까? 그 누구에게도 소유권은 없지만, 소유 자체는 존재하는 이 괴상망측한 소유의 형태를 지닌 아크로를 대체 뭐라고 불러야 옳단 말인가? 

한 때, 생단수단의 사회화는 곧 국유화인 것으로 믿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국가의 소유로 하는 혁명을 벌였고, 70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어라? 이 길이 아닌가벼... 하면서 돌아선게 바로 현실사회주의이다. 좌파적 사민주의 국가들이 남발하던 국유화조치도 현재 민영화라는 대세에 밀려 악전고투중이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란 어쩌면 국유화를 뜻하는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시행착오의 댓가는 컸다. 

그러나 그동안 자본주의가 가만히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공적 소유의 개념이 절대로 침범할 수 없다고 여기지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일반 기업들에게도, 사회화의 물결은 서서히 스며들었다. 전세계 규모 좀 된다는 대기업들의 소유권은 거의 다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주주들에게 조각 조각 쪼개져 나눠 졌고, 그 취득 권리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오로지 소유권은 이사회나 CEO에게 위임의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이미 자본주의 기업들에게도 느슨한 형태의 사회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그 대기업들이 사회화된 생산 수단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저 현재까지 진행된 것은 딱 고기까지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진행 방향은 여전히 막연한 안개속에 쌓여 있으며, 누구도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기업들이 그 저수지처럼, 그 도로처럼, 지금의 아크로처럼 운영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높은 생산력으로 인류에게 풍요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극대화된 사회를 선물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좌파들에게 절대적으로 옳아보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목표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매 순간 그 목표를 향해 아주 작은 개선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전진해 갈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은 늘 오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과는 맥락이 다른 말이다. 현재 실천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과학이 허락하는 것들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미래의 것들은 겸손하게 역사의 손길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그런 진보주의자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