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ttered with. SexyDolp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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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념론적 존재는 숙명적으로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존재는 언제나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 초개적으로 널려있다



1. 다윈은 라마르키스트들을 대속(代贖) 한 과학계의 예수다

 자아, 지식, 지혜 따위의 관념론적 존재는 유물에 대한 관념론적 제어 그, 자체다.
 (물론, 관념론적 존재의 관념에 대한 관념론적 반영, 변형 또한 가능하나 본 글의 핵심은 아니다)

 한시라도 집중과 신경을 늦추면 공중의 바람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 관념론적 존재, 그들이다. 이를 바탕으로,

 굳이 유물론적으로 인간으로의 진화 계기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전이 인간의 ‘초개적 의식의 흐름(∈유물론적 존재)’ 이
 유물론적으로 전이 인간을 진화시켜 그들, 관념론적 존재들을 축적, 유용(utility) 할 수 있는
 ‘사회성, 문화성, 문명성’ 의 계발로 이어졌다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진화’ 의 결정인자에 대해 명확히 필자의 견해를 그리겠다

 철저한 유물론에 입각하여 진화의 결정인자를 고려하면 그 속성은 지극히 ‘초개적’ 이다 
 (직전 글에서 진화를 우주의 흐름 그, 자체라 간단히 정의했었다)

 즉, 환경에 적응하기 위함 따위의  (1인칭적) ’관념론적 존재의 생존/적응 욕구/필요‘ 가 진화를 결정했다는
 ‘용불용설적 비-초개적 진화’ 가 아닌 오히려 여전히,

 초개적 물질과 의식의 흐름이 ‘비-초개적 관념론적 능력' 에 대한 초개적 유물론적 진화를 결정했음이다

 용불용설적 비-초개적 진화의 문제는 진화의 결정인자가 무엇이든 간에 최소한,
 최초의 진화는 초개적 유물론적 진화이어야 한다는 데에 그 主명제와 근거 간의 극적인 괴리에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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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인간에게 있어 진화의 방향이란 그저 예측의 영역에 불과할 뿐, 영구적 법칙 따위를 신봉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측은 우주의 초개성을 그 근간으로 하나 진리는 인간의 비-초개성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윈은 라마르키스트들처럼 the Great Chain of Being 따위에 목매지 않았다
 사실, 해묵은 비판인 '그럼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의 진화냐' 식의 비꼼은 다윈에게 향했어야 할 화살이 아니었다

 다윈은 (후대의 닐스 보어와 같이) 그저, '자연이 그랬냐? 그럼 그런거지' 라 받아들이자 쪽이었으니
 (개인적 추측이지만 다윈을 추종하던 맑스에 대해 맑스가 자신의 '진화 개념' 을 라마르키스트들과 다르지 않게 받아들이는 점 때문에,
  다윈이 맑스의 다윈에 대한 학문적 흠모와 추종을 무심토록 거부한 것 같다)



 따라서 만약, 진화를 ‘정치적 진보’ 와 동일선상에서 혼용하게 된다면 이는 비-초개성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적 진보와
 초개성을 근간으로 하는 우주적 진화에 대한 불성실한/ 불완전한 이해(dis-cretion) 결과에 불과하게 된다 즉,
 맑스가 다윈에 대해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 실수는 현대에도 버젓이 반복되고 있다 :D)

 가끔 어설픈 과학뉴스들이 '현대를 지배하는 다윈주의' 라 떠들어대지만 실상,
 현대를 지배하는 것은 자아가 과잉되길 부추기는 '라마르키즘' 이다

 다윈 불쌍하다. 까일 놈이 까여야 되는데 말이니까



2. 유물론적 초개성이 진정 인간의 관념을 자유케 하리라

 자! 이쯤에서 다시 한번 유물론을 음미하고자 한다

 물질, 의식의 흐름 공히 유물론적 존재로서 의식의 흐름은 물질의 반영에 불과하다. 또한,
 의식의 흐름은 역으로 물질을 능동적으로 변형하기도 한다. 즉,

 유물론적 존재들끼리는 초개성을 그 근간으로 하기에 질량과 에너지가 초개적으로 등가이듯,
 물질과 의식의 흐름 역시 초개적으로 등가임이다

 그러나 의식의 흐름이 아닌 ‘자아, 지식, 지혜’ 따위의 비-초개적 관념론적 존재들도 의식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데
 이때의 변형은 의식의 흐름의 물질에 대한 ‘초개적(=능동적) 변형’ 과 달리 그저, ‘비-초개적 제어’ 에 불과하다. 예증하자면,

 자아, 지식, 지혜 따위의 관념론적 존재는 얼마든지 지금 당장, 밥을 먹고 안 먹고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자아가 노니는 의식의 흐름을 초개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아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배고프면 밥을 먹을테니 말이다 다만, 그 관념론적 존재가 노니는
 ‘의식의 흐름의 양, 속도‘ 따위의 운전 조건을 제어할 뿐이다. 그리고

 이 제어된 의식의 흐름은 곧이어, 물질을 간접적으로 변형시킨다 --------------- 명제 (가)
 (즉, 관념론적 존재는 의식의 흐름에 대한 운전 조건을 제어하여 간접적으로 물질을 변형시킴이다)



 그러나 밥 자체를 먹고 안 먹고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물질이 의식의 흐름을 또한 그 역으로,
 의식의 흐름이 육체의 물질을 초개적(=능동적) 으로 반영/ 변형시키는 것으로서, 비-초개적 자아로는 도무지 선택할 수 없는
 금단의 초개적, 유물론적 영역이다

 혹시 혹자가 ‘자살’ 따위의 ‘관념론적 존재의 비-초개적 선택’ 으로 밥 자체를 먹고 안 먹고를 선택할 수 있지 않느냐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자아의 소멸’ 이지 유물론적 존재인 ‘물질, 의식의 흐름의 소멸’ 이 아니다. 정체성이 소멸한다고
 그가 나고 자랐던 유물론적 존재인 물질과 의식의 흐름이 감히 꿈쩍이라도 하겠는가! 도처에 널리고 널린게 유물론적 존재들인데 말이다

 유물론적 존재들은 여전히 또다른 초개성을 향해 진화할 것이다

 지겹게 반복하자면 물질, 의식의 흐름 따위의 유물론적 존재들은 우주의 ‘순리’ 다
 ‘순리’ 라는 말은 ‘초개성’ 에 대한 보다 보편적 표현이다

 그러나 자아, 지식, 지혜 따위의 관념론적 존재들은 인간의 ‘진리’ 에 불과하다
 ‘진리’ 라는 말은 ‘비-초개성 곧, 관념적 아름다움’ 에 대한 보다 보편적 표현이다



3. 우리는 단 한번도 유물론적 시간계로 현재를 살아본 적이 없다

 분명 유물론적 존재들에 대한 최초의 인지로부터 생물학적 연쇄반응을 거쳐 도달하는 종착지로서의 최후의 인식을 고려하면
 관념론적 존재인 ‘자아’ 의 제어와 최초의 인지는 결코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다

 ‘자아’ 의 제어 대상은 ‘유물론적 과거’ 인 것이다. 그러나 ‘자아’ 는 이를 ‘현재’ 라 착각한다
 관념은 항상 유물보다 한발자국 뒤처지고 있음이다. 늘 범인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는 경찰과 같이

 구태여 타임머신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우린 현재의 허구 속에서 실재의 과거를 살고 있는데 말이다



 한편, 명제 (가) 를 좀 더 예민하게 뜯어보자면 자아의 제어 즉, 허구적 현재가 의식 흐름의 운전 조건 즉, 실재의 과거를 제어하고 따라서,
 제어된 의식의 흐름은 실재의 과거로서 같은 유물론적 존재인 물질을 간접적으로 변형시킨다

 물질이 반영되어, 같은 유물론적 존재인 의식의 흐름과 함께 실재의 과거로서,
 관념론적 존재인 현재의 허구 즉, 자아 따위가 노닐 수 있는 유체가 되어주고 있다

 즉, 허구의 현재는 실재의 과거 없인 존재할 수 없다
 (단, 여기서 실재란 절대적 존재에 대한 관념론족 존재, 인간의 상대적 표현이다)

 그러나 실재의 과거는 허구의 현재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허구의 현재에 의해 실재의 과거가 제어되어
 간접적으로 변형될 순 있다 즉,

 인간은 현재를 바꾸어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바꾸어 관념론적 확률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관념론적 미래의 또다른, 유물론적 실재의 과거를 개척하는 것이다

 어쩌면 결정론적 세계관의 참의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기껏해봐야 실재의 과거를 경험할 수밖에 없으니 숙명적으로 관념은 완전 결정론적 존재이며
 관념에 대한 자아의 제어가 있어야만 관념론적 미래 즉, 또다른 유물론적 실재의 과거를 개척할 수 있을테니
 잘해봐야 반(半 )결정론적 존재로서만 만족할 수 있을테니




 이쯤되면, 과거, 현재, 미래의 3분적 시간계는 철저히 관념론적 시간계임을 눈치챌 수 있다
 또한, 유물론적 세계 물질, 의식의 흐름에는 ‘시간계’ 가 그다지 의미있는 개념이 아님 또한 눈치챌 수 있다. 즉,
 ‘시간’ 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번 지겹게 반복하자면, 유물론적이라 함이 초개적이라 함의 또다른 표현임을 관념해야 한다
 그래야 관념론적 존재로 관념과 유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가 ‘유물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 에 끼칠 혼란을
 최소화 시킬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자아가 덧붙여져 유물론적 존재와 관념론적 존재가 함께하는 곧, 실재와 허구가 공(共) 하는 그것이다
 즉, 초개성과 비-초개성이 공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허구적 자아는 늘 실재적 유물 앞에서야 비로소 순리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회의’ 한다 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의 막강함에 대한 허구의 무력함, 무상함에 대해 소름끼칠 정도로 명료한 관념적 표현이다



4. 그렇다면 허구는 무시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허구는 분명 철저한 초개성에 근간하는 실재와 달리 비-초개성에 근간한다. 그 어느 인간도 허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초개성과 비-초개성이 공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꿈 같다 혼잣말 내뱉어 온 수많은 인간 역사 배우들의 마음에
 나도 어느새 허구적으로 공하고 있다. 실재적이라면 그 어느 글도 써재낄수 없을테니

 난 어느새 인생에 대한 인간의 초개적 태도 그 자체만을 포장하는 ‘척 샌님’ 들의 고차원적 허세에 질릴대로 질려버려
 최소한 인생을 ‘숙제 같은 것’ 이라 그리고, 그 숙제를 풀어가는 인간은 위대한 존재라 스스로의 허세를 겉잡지 못하는
 나 안의 너, 너 안의 나의 비-초개성에 대해 더 이상 재고 따지지 않으려 한다

 또다른 지혜에 불과하게 될 이 관념론적 존재가 나의 의식의 흐름을 어떻게 제어하여
 나의 육체적 물질을 어떻게 변형시킬지 결코 모를테다. 결국 의식의 흐름과 육체적 물질과 같은 유물론적 존재들은 정말이지
 초개적으로 진화하고 실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여나 열과 성을 다하여 나의 자아로 관념론적 접근을 수행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수행의 깊이와 넓이를 극한으로 추진한다 할지라도
 그 초개적 존재들은 나의 자아에게 그저 ‘관념’ 으로써만 자신들의 실재적 과거를 허구적 현재로 현상화 해줄 것이기에



 오해와 무지로 점철된 인간의 두려움은 이 초개성에 대한 비-초개적 사고/ 접근방식의 한계로부터 그 역사가 이래된 것 같다
 초개성을 그냥 초개성으로 비-초개적으로 봐주려는 열과 성을 다해봤자 (그래도 두려움이야 사라지진 않을 테지만)
 최소한 두려움으로 인해 매일 아침에 눈을 뜨는 반복되는 일상에 회의하는 관념론적 낭비는 스스로라도 제어될테니 말이다

 흔히 논리적 사고를 수행하는데 있어 ‘인신공격의 오류’ 를 경계할 것을 가르침 받는다. 아마도 이는 우리 모두, 관념론적 존재인
 자아를 갖춘 채로써만 관념론적 존재인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논리를 펼쳐 나가니 그 누가 그 누구에게 감히 돌을 던질 수 있겠냐는
 예수의 사랑/ 부처의 자비와 일맥상통한다

 이에 대한 주의/ 주지를 망각한채 우리 인간들끼리 서로를 향해 무참한 독화살 만을 날리게 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물론적으로
 유물론적 존재들을 맛볼 수 없는 관념론적 존재들 간의 즉, 이긴 자나 패한 자나 다만,
 서로에게 깊은 관념론적 상처로 회의하는 관념론적 낭비에 머물테니 말이다

 안그래도 우리는 관념이라는 아주 아주 보잘것 없는 정보에 만족해야 하는
 아주 아주 비-초개적인 자아로서만 나고 죽을테니 말이다



4. 맺음말 (부제 : 유물론은 '실재' 를 향한 '허구' 의 발버둥 그, 자체다)

 
논리란 과잉된 자아를 절제하여 다듬는 과정 그, 자체로서 그 절제의 다듬음이란 초개성의 순리를 받아들이므로부터
 올곧은 스탠스(stance) 를 갖추기 시작한다. 물론 인생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듯, 올곧은 스탠스를 갖추든
 여전히 논리적 결함을 드러내든 무엇이 더 좋고 나쁨이란 유물론적 초개성을 목격한 이상 의미없다. 그러나

 의미없다 해서 또한 비-초개적으로 무시하고 간과할 일 또한 아니다. 그 또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일테니 말이다


 이쯤되면 순리의 초개성이라 함이 참으로 묘하디 묘하다. 초개성을 비-초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관념론적 한계도 묘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로서의 자아로 남은 인생을 ‘논리’ 를 통해
 우주와 세상을 음미한다면 최소한, 관념론적 스펙 경쟁에만 인생의 전부를 환원하던 그때만큼 광기적으로
 나와 나가 총칼 겨누며 싸우지는 않을테다



 어찌보면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물론적 우주에 대해 인간은, 관념론적으로만큼은 제자리도 아닌 퇴화다
 관념이 득세할수록 민(民) 은 혹세될 뿐이다

 그러나 관념의 유혹은 곧, 전이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진화 핵심일 수도 있다
 (즉, 진화는 진보와 다르다. 그냥 흘러가는 실재의 과거 그, 역사 자체가 진화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의 초개성에 어처구니없음을 느낀다면 그것이 정치적 진보의 시발점이다)


 아마 인간이 또다른 유물론적 실재로 진화한다면 모른다고 답하는 것이 진정한 '실재' 를 향한 '허구' 의 발버둥이다
 
 만일, ML주의로 무장하여 그 진화를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으로 덧칠하겠다면 그것은 더이상 진화가 아닌,
 정치적 진보의 영역이다

 정치적 진보를 욕하고 탓하지 마라
 그들이 없다면 인간 세상은 정말로 재미없는 곳이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