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변증법님의 블로그에 있던 글인데, 필자의 허락을 받고 원문을 게시합니다. 우리 시대 진보진영에서 거둬내야할 잘못된 사유 방식과 지향해야 할 사유 방식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는 정말로 보석과 같은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문의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hagi87.egloos.com/828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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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진보신당 게시판이 한동안 전진그룹의 문건으로 시끄러웠다. 정통 좌파를 자처하는 전진그룹의 다소 오만한 문건은 진보정당내의 다양한 조류를 수정주의, 개량주의의 유포로 보고 우려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논쟁은 일방적으로 전진그룹의 교조주의와 경직성이 난타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개량주의 그 자체에 대한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개혁주의라고 번역해야 올바른 용어인 개량주의는 문자상의 좋은 뜻(좋게 고치자 주의)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좌파진영에서는 욕으로 사용되었다. "너는 개량주의다." 한마디면 정치생명이 끝장이 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버릇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면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아무리 원래 좌파들은 모이면 상대방을 배신자라고 부르는게 특기라는 말도 있지만, 몰락해가는 마당에 서로 선명성을 강조하려는지 입만 열면 개량이라면 중증의 병이다. 심지어 극좌파로부터 개량주의 민족진영이라 불리던 집단에서조차 개량주의를 몰아내자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개량주의가 과연 욕일까? 개량주의라는 말로 비판이 다 된것일까? 사실 고백하건데, 나는 개량주의자다. 지금 무장혁명을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개량 말고는 무슨 길이 있겠는가? 그래서 개량주의의 역사를 한번 돌아보려 한다.

개량주의는 사실 나중에 나온 말이다. 원래 용어는 수정주의다. 즉 마르크스-엥겔스의 교의를 수정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창시자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다. 그리고
베른슈타인이 수정한 것은 사실상 무장혁명 대신 합법적인 개혁 수준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의미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도달해야 할 필연적인 목표"가 아니라 "노동 인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지속적인 운동"으로 규정하였다. 앞의 말과 뒤의 말에 따라 투쟁이 얼마나 달라질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말을 선택하면 필연적으로 거쳐갈 조건들과 과정들이 나타나고, 운동가는 그 법칙을 빨리 알아서 대중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여기서 전위당론이 그대로 튀어나온다. 이게 바로 카우츠키의 주장이었고, 그의 젊은 제자 룩셈부르크와 플레하노프의 주장이었다. 반면
뒤의 주장을 선택하면 누구도 앞길을 미리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법칙따위는 없다. 다만 지금 순간순간 노동계급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모색해야 한다.

이로써 사업의 방향도 달라진다. 카우츠키의 길을 따라가면 필연적인 사회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사업, 즉 혁명을 준비하는 사업 외의 것은 전부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길을 따라가면 에비된 필연적인 길 따위는 없고, 사회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지금 펼쳐지는 다양한 '일상사업'들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즉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말을 버리고, 삶으로서, 운동으로서 사회주의라는 말로 대체한 것이다.

원래 베른슈타인은 정통 맑스주의자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를 매우 신임하였고, 특히 엥겔스는 9년간 나이를 잊고 우정을 나누었으며, 자신의 유언 집행자로 그를 지목했다. 라살레 같은 기회주의자 계열이 아닌 것이다. 그런 그가 개량주의로 돌아선 것은 영국 망명기간동안(1883년부터 20년을 독일 경찰의 추격을 받는 망명객으로 살았다) 자본주의 최중심부의 모습을 직접 보았고, 반봉건적인 독일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영국의 흐름은 곧 세계화 될 것이기에.... 시대가 바뀌었다. 무력혁명이 가능한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확대되는 대의제기구는 활용가치가 높은 도구로 보였다. 실제 영국 노동자들의 삶은 대의제 기구를 통해 현저하게 향상되었다(이런 활동은 주로 페이비언 맑시스트들이 주도).

시대가 바뀌면 교의도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맑스주의다. 이리하여 그는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라는 충격적인 팜플렛을 발표하였고, 카우츠키, 룩셈부르크의 맹렬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 논쟁의 승자는 베른슈타인이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카우츠키나 룩셈부르크가 비판의 논거로 제시하는 맑스, 엥겔스의 저작들에 유럽에서 가장 정통한 사람이 바로 베른슈타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논쟁 뒤, 베른슈타인이 자기 주장을 폐기할 것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민당이나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되거나 어떤 압박에도 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리어 카우츠키는 그에 대한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마침내 1902년 그가 망명생활을 끝내고 독일로 돌아올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걸 보면 참 느끼는 바가 많다. 그들은 치열하게 논쟁했으나 서로의 주장을 마르크스주의의 외연을 확대하는 다양한 의견들 중 하나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차이는 있지만 노동계급을 위한 투쟁이라는 대의에는 동의하고 있기에 그들은 평생 우정을 유지했다.

즉 이때까지 수정주의, 개량주의는 근절해야 하고 도려내야 하는 암세포가 아니라 여러 대안들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수정주의, 개량주의는 곧 죽음이 된 것은 바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이 독일 사민당에서 볼셰비키로 넘어간 다음의 일이다. 유일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한 나라라는 기세등등함 속에 볼셰비키의 목소리는 끝없이 올라갔고, 이때부터 맑스주의자들은 수정주의, 개량주의자로 찍히지 않으려고 소신을 속이고, 획일적인 교의를 암송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때부터 베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마치 기회주의의 화신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한 번도 노동계급 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다만 노동계급을 위한 현실적인 길을 고민했을 뿐이다. 독일 사민당이 민족주의 광풍에 빠져 1차세계대전의 애국적 참전을 결의할때 그는 단호히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소수파에 섰으며, 전쟁 이후 볼셰비키의 기세등등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생활협동조합 등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생산쳬계 실험에 몰두했다. 그의 아이디어 중 상당수가 오늘날 '공정무역', '사회기업'이란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다. 물론 그의 생각중 시대에 뒤떨어진 것도 많이 있지만...

오늘날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를 기회주의자로 몰아부친 볼셰비키가 얼마나 표리부동하고 잔혹한 집단이었는지 밝혀지면서 오히려 인간적 사회주의를 꿈꾸었던 베른슈타인의 진면모가 더욱 드러난 것이다.

실상 그의 대안들은 또 시대가 바뀌었기에 오늘날 관점에서는 낡았다. 그러나 그의 저작을 읽으면, 두가지는 느낄수 있다. 하나는 진정 노동계급을 사랑하고 그 행복을 찾고자 하는 그의 진정성이다. 추상적 혁명 대신 구체적 개선을 추구하는 것은 초보자들에게는 쉬운 선택이나, 국제 맑스주의의 최고 지도자가 내리기에는 존재론적 고뇌가 없이는 내릴 수 없는 결단이다. 또 하나는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그의 예리하고 꼼꼼한 독해다. 실상 레닌조차 마르크스 독해가 불충분하다. 레닌 저작은 시종일관 엥겔스의 팜플렛만 인용할 뿐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꼼꼼히 독해하고, 그 허점이 발견될 경우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이게 사실은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진짜 보은이렸다!

장황한 이야기지만, 사실 여기서 내가 하려는 요지는 딱 두가지다.

스승의 아픈 구석을 비판하며 수정주의를 창시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수제자 베른슈타인, 그는 수정주의자일 뿐 결코 평생토록 적에게 투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도리어 그의 독일 귀환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카우츠키.

그의 주장이 옳고 그른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 옳은 주장이 어디 있는가? 중요한건 그 자세인 것이다. 모아니면 도, 꼴통이었다가 바로 뉴라이트 되어버리는 우리의 천박한 현실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꼴통과 뉴라이트 사이를 채우는 다양한 수정주의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