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en.wikipedia.org/wiki/Tabula_rasa 에서 tabula rasa(blank slate)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볼 수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SSSM(Standard Social Science Model, 표준 사회 과학 모델)과 동의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SSSM에 대한 진화 심리학자들의 통렬한 비판으로는 『The adapted mind: Evolutionary psychology and the generation of culture』에 실린 John Tooby & Leda Cosdimes의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culture(1992)」를 추천하고 싶다.

http://www.psych.ucsb.edu/research/cep/papers/pfc92.pdf

 

 

 

나는 지금까지 tabula rasa(blank slate)빈 서판 또는 빈 서판론으로 번역했다. 그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Steven Pinker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가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을 번역한 한영 씨의 번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번역 비판까지 했는데 빈 서판이라는 번역어는 그냥 받아들였다.

 

 

 

어느 날 <the Acro>에서 빈 서판론 ≠ 백지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나는 다른 식으로 번역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130112

 

 

 

사실 나는 몇 년 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6)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정독하지는 않았고 번역어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해당 구절을 아래에 인용했다.

http://blog.aladdin.co.kr/mramor/881808

 

예전에 어느 분이 번역중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신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이란 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http://krdic.daum.net에 따르면 서판[書板]글씨를 쓸 때에, 종이 밑에 받치는 널조각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빈 서판은 틀린 번역이다. 빈 석판이 좀 더 적절한 번역어로 보인다.

 

그리고 이미 한국에서는 백지, 백지 상태, 백지설, 백지론 등의 번역어를 널리 쓰고 있었다. 백지라는 번역어가 진짜 백지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는 있지만 tabula rasa의 핵심을 잘 전달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맥에 따라 백지 또는 백지론으로 번역하기로 했다.

 

 

 

내가 왜 백지설이 아니라 백지론으로 번역하기로 했는지를 들어보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백지론자라는 말을 쓰기 위해서 백지설 대신 백지론을 선택했다. 선천론자/백지론자, 이런 식으로 대비하면 깔끔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가설을 뜻하는 ()과 이론을 뜻하는 ()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creationism창조론이 아니라 창조설 또는 창조주의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http://krdic.daum.net 에 따르면 이론에는 실증성이 희박한, 순 관념적으로 조직된 논리라는 뜻도 있다. 마찬가지로 http://www.merriam-webster.com 에 따르면 theory에는 an unproved assumption이라는 뜻도 있다. 한국어에서 은 과학적 이론이라는 의미 말고도 온갖 방면으로 쓰이고 있다. 논쟁(論爭)은 과학적 논쟁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