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어로 번역된 동남아시아권(이때는 언어적/지리적 구획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치/경제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되어 종종 같이 취급되는 호주/뉴질랜드는 제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자면, 잘은 몰라도 아마 다음 두 권을 들 수 있을 거예요.

 

좌측은 베트남 작가 응웬반봉(정서법은 응우옌 반 봉)의 『하얀 아오자이』(구판은 『사이공의 흰옷』)이고, 우측은 필리핀 작가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의 『에르미따』입니다. 전자는 아마 예전에 모종의 이유(..)로 많이 읽혔던 것 같고, 후자는 영어권 소설이며 소설 자체가 나쁘지 않기 때문에 많이들 읽는 것 같더라구요. 뭐 주변 경험에 의한 추측이니 정확성 같은 건 그다지 기대할 수 없지만요.


2. 사실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동남아권 작품들은 별로 없지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문학 > 세계문학 분류로 가 보면 독립적인 분류는 찾을 수 없고 그냥 '기타 세계문학'에 묶여 있습니다. 최근 출판계에서 슬슬 동유럽, 아랍, 터키, 인도 등 이전까지는 그다지 관심 없었던 지역의 문학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 같은데(개인적으로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가 번역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동남아시아 문학은 여전히 찬밥 신세인 것 같네요.
 
근데 그나마 번역된 것들도 상당한 베트남 편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요즘 경제적 이유로 동남아 지역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데, 서점에서 학습서를 찾아보면 이상하게도 베트남어 학습서가 다른 동남아 언어들(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태국어, 필리핀어, 버마어, 크메르어, 라오어)의 학습서보다 훨씬 많은 것도 알 수 있죠. 아마 한자문화권(이라서 배우기 쉬..운가?)이라는 모종의 동질감과 고도성장을 거듭하는 경제에 의한 효과인 것 같네요. 어쨌든, 그래서 이 밖에 문학계가 크게 형성되어 있는 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작가들은 비교적 더 열악한 대우를 받는 듯합니다. 이 외는? 뭐, 관심도 없지요. 크메르어나 라오어 작품이 번역된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3. 아시아문화네트워크에서 소개하고 있는 작가들만 봐도 그냥.. 한숨이 나옵니다. 예컨대 굉장히 역사도 길고 잘 발달한 문학계를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태국의 작품 번역 현황은.. 최근 지만지에서 고전 한 권을 번역한 것을 제외하면 제가 기억하기로 80년대 말에 번역되어 나온 단편집『황색 승복』 정도가 거의 다일 거예요. 당장 위 링크에 나오는 사오와퐁, 쁘라못, 시부라빠 같은 작가들만 해도 태국 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서는 아는 사람도 관련 전공자나 저 같은 별종을 제외하면.. 거의 없죠. 역으로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정말 잘 번역이 되지 않아 아쉬운 작가가 있어요. 인도네시아 작가 중에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Pramoedya Ananta Toer, 현대 정서법으로는 Pramudya Ananta Tur)라는 작가인데, 2006년에 죽기 전까지만 해도 최근까지 동남아시아에서 강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죠. 이 작가 작품이 인도네시아 작가 중에서는 가장 많이 번역(그래 봐야 장편소설 두 편이지만)이 되긴 했습니다만.. 다 절판되어서 문제지요. 하아. 대표작인 부루 4부작 중 1부인 『인간의 대지(Bumi Manusia)』가 다행히 저희 학교 도서관에 있어서 구해볼 수 있긴 했지만, 책 뒤쪽 날개에 발간 예정으로 들어 있던 나머지 2, 3, 4부는 소식을 찾을 길이 없네요.. 아마 안 팔려서 접은 것 같습니다.


4. 그건 그렇고, 『인간의 대지』의 한국어 번역본인 『밍케(**주인공 이름입니다)』는 1, 2권으로 나왔는데, 그 1권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이리 오세요."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양쪽이 초록빛 잔디로 둘러싸인 좁은 콘크리트 길을 걸었다.
 우리는 돌 벤치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자바어로 얘기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다. 나는 그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로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어도 좋아요."
 "정말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어요."
 "공부하느라고 바빴어요, 안네.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
 -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 『밍케 1』, 오늘, 1997, 105쪽.

위의 인용부는 밍케(작중 화자)와 안네리스(대화 상대자, 밍케의 연인)의 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강조한 부분을 보면 좀 놀라운 부분이 있지요. 밍케는 자와 섬의 주요 언어이며 인도네시아 내 제1언어 사용자가 가장 많은(현대에는 지방어 중 하나로 지위가 격하되긴 했지만) 자와어와 유럽의 네덜란드어를 비교하여 이야기하면서, 자와어가 네덜란드어보다 복잡하다는 투로 설명하고 있네요.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와어가 뭐가 그리 복잡하길래 복잡한 유럽어인 네덜란드어에 비할까, 하고 이상하게 여길 수 있죠. 물론 당장 이 부분에서 프라무댜의 민족주의적인 감성도 약간 녹아든 것 같긴 합니다만, 실제로 자와어가 복잡한 언어인 것은 맞습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문어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다가(1200년 전부터 고전어가 전해 내려옵니다) 무엇보다 경어(敬語)가 있거든요.


5.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건 메인의 이덕하님 글(진보파가 못 해서 한나라당이 득세하나?)에서의 yellowfever님 덧글 때문이에요. 이 글에서 yellowfever님은 복잡한 경어가 존재하는 언어가 한국어와 일본어뿐인 것으로 추측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이게 그 맥락에서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혹시 괴상한 부분으로 태클을 걸어서 기분이 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경어가 문법화되어 쓰이거나 단어가 대상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언어는 적지 않아요. 이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언어는 당장 동남아권만 봐도 태국어와 자와어가 대표적이죠.

이 외에도 인도의 여러 언어들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여러 언어들에서 복잡한 경어 형태를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일단 이 두 경우만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태국어에서는 크게 두 종류의 경어(정환승, 『현대 태국어 문법론』의 용어로는 대우법)를 구별합니다. 1. 일반 대우법과 2. 왕실 대우법이 그것인데요, 일반 대우법은 대표적으로 어떤 대우법 미사용 문장의 끝머리에 특정한 불변사를 첨가하는 방법이 있고(예컨대 사왓디.(안녕.) → 사왓디 크랍.(***안녕하세요/화자가 남성일 때) or 사왓디 카.(안녕하세요/화자가 여성일 때)), 왕실 대우법은 대표적으로 어떤 단어를 왕족에게만 사용하는 존경의 의미를 담은 단어로 대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왕실 대우법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들은 현재 잘 쓰지 않는 표기법을 사용하며, 쓰는 대로 읽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또 자와어에서는 상황에 따라 '발화체'를 달리한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이에 따라 문법적으로 다른 형태를 사용하는 거죠. 한국어의 상대 높임법에서, 학교 문법식으로 쓰면 하십시오체-하오체-하게체-해라체-해요체-해체-하라체(-하소서체)를 구별하는 경우와 유사하니 비슷한 센스로 이해하면 될 것 같네요. 실제 자와어의 발화체는 문법상 3개로, 응오코(Ngoko)체, 마댜(Madya)체, 크라마(Krama)체가 있습니다. 각각 응오코체는 비격식체(친한 사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마댜체는 중간(서로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을 때-예컨대 모르는 사람끼리-), 크라마체는 격식체(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공적인 연설을 할 때, 서로 격식을 차리면서 말하고 싶을 때)지요. 이 외에도 정중함의 표현 등을 위해 단어를 바꿔서 사용하는 화법이 있어서, 실제 발화에서는 서로 조합되어 사용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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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분류해 보면, 경어에는 의미상의 분류 등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구조적으로 크게 여덟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충 말해서, 어떤 언어에서, 의미 M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어의 의미를 담지 않은 일반 문장 S(M)이 S(M) = (R(M)(규칙), P(M)(형태소))로 구성된다고 생각해 보죠. 여기서 M에 존경 등의 의미를 덧붙인 M'을 표현하기 위한 문장 S(M')을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변형은 R과 P 수준에서 가능하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i) R(M)이나 P(M)에서 원래 형태는 내버려둔 상태에서 무언가를 첨가하여 R(M)+r(M) = R(M') 혹은 P(M)+p(M) = P(M') 형태를 만들거나, (ii) R(M)이나 P(M)에서 원래 형태 자체를 변화시켜 R'(M) = R(M') 혹은 P'(M) = P(M') 형태를 만드는 것이죠. 이때 S(M)을 S(M')으로 보내는 함수는 R과 P 각각에 대해 3개의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i이나 ii 혹은 변화 없음) 즉, 1(S(M)) = S(M)이 되는 항등함수 1을 제외하면 계산상 3×3-1 = 8가지가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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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밍케'라는 이름도 얼마나 번역 사정이 열악한지를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을..지도 몰라요. 원어는 'Minke'인데, 이걸 인도네시아어로 읽으면  [minkə] 혹은 [minke]가 됩니다.(대체로 전자의 경우가 지배적) 사전 외에는 이 두 e 발음을 악센트 기호로 구별하지 않아서 혼동이 생기는 것인데, 『인도네시아 문학의 이해』라는 책에서는 '밍꺼'로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는 건 전자라는 것이고(원음에 가깝게 표기하기 위해 'ㅓ'와 'ㅡ'를 혼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러면 정서법은 '민크'가 되겠지요.

사실 이 책이 중역본이라는 건 바로 위 인용부에서도 알 수 있었던 것인데, 제가 약간 수정한 부분인 "공부하느라고 바빴어요, 안네.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의 원래 표기는 "공부하느라고 바빴어요, .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이기 때문이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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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et님 덧글을 보고 외래어표기법을 확인해 봤는데, 아무래도 '깝'이 아니라 '크랍'이 맞는 듯. 일단 ก에만 'ㄲ' 음 표기를 허용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