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ttered with. SexyDolphin

1. 신념을 버리다

 관념론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궁극적 회의감으로부터 유물론적 사고/ 접근방식을 유용(utility) 하게 된것은 아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궁극적 회의감이라 함 역시, '궁극' 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신념' 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관념론의 샌님 냄새로부터 도망쳐 누릴, 유물론의 세련된 포지셔닝에 물타려는
 또다른 관념론의 아류로 이어지고 말것이기에

 무신론자라 자아를 포장하는 사람들 중에 그저, 유신론자들에 대한 사회적 비아냥을 피하고자 즉,
 꼴에 쿨한척, 아는척, 잘난척 포장하려는 과잉된 자아의 꼴깝이 만연하는 경우를 목도하면 말이다

 이쯤되면 관념론자냐/ 유물론자냐의 자아 포장 경쟁은 남자냐/ 여자냐의 성구분 경쟁만큼이나 부질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정말 궁극적 실재가 있을수도 있다. 다만, 그 가능성까지도 포용하는 유물론적 사고/ 접근방식의 유용성을 이번 글을 통해 남기고자 한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념론자들의 희구는 곧, '자아' 의 일회성에 대한 관념론적 비(非)-포용의 발로에 불과하다

 따라서 관념론자들은 '자아' 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포용에 대해 인색하게 되면 '자아' 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끊임없이 자아가 과잉되어 더이상 주워담을수 없을정도로 넘쳐흐르기 또한, 마련이다
 
 그들은 '자아' 의 일회성 즉, '자아의 숙명적 소멸' 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만 두려워하는, 
 타인의 시선에 비춰진 자아을 모르거나 또는 인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과잉의 끝을 늘 神께서 다듬어 보살펴 주시므로. 그렇다면 관념론자들이 진실로 神을 섬기는가?
 
 그들이 보여준 역사적 행실(?) 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그저 기복적 차원에서 즉,
 죽음을 극복한 '자아의 영생' 에 대한 집착이 보장하는 '불완전한 안전함' 을 소비할 뿐이다

 

2. 관념론의 달콤한 유혹
 
 
관념론은 ‘우주가 매순간을 통해 역사를 완성한다’ 는 명제에 대한 철저한 부정 그리고, 
 그 부정으로 인해 누릴 ‘과잉된 자아의 근거없는 관념에 대한 꼴깝적 낙관’ 에만 그 기원과 가치가 있다

 과잉된 자아가 생산, 소비하는 관념으로 우주를 바라보니
 다윈주의를 깔보았던 라마르키스트들처럼 용불용설과 같은 '자유의지적, 능동적 진화' 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神을 팔아먹고 실상, 자신이 곧 神이어 '자유의지' 를 누린다 스스로의 뇌에 뽕질하는 것이다
 관념론은 생긴대로 논다 믿는다. 그러나 '자유의지' 라 함은 노는대로 생김에 대한 표현이다

 이쯤되면 도대체 관념론자들이 이토록 과잉된 자아를 절제하지 못한채 논리적 모순을 너무나도 쉽게 노출하는지에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답은 간단하다

 외부의 승인에 대한 욕구가 과잉된 자아를 밑도끝도없이 부추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3. 유물론적 사고/ 접근 방식의 중립적 고통

 유물론적 사고/ 접근방식은 ‘왜’ 에 대해 관념론만큼 나대지 않으려 할 뿐이다. 다만,
 ‘어떻게’ 에 대해서만큼은 관념론자들 아니, 같은 유물론자들 조차 혀를 내두를 이상으로 더 적극적일 뿐이다

 사실 유물론적 사고/ 접근방식은 神의 관념을 소비하는데에 그치는 관념론에 대해
 대립적으로 그 정체성을 확립해가려는 방향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것은,
 
 관념론자들의 해묵은 레파토리와는 달리 神의 가능성마저 척살해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떻게든 우주를 포용하려는 인간의 논리 즉, 과잉된 자아를 절제하여 다듬어 가려는 중립적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무엇이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가?
 (단, 여기서 진화라 함은 우주의 흐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쯤되면 관념론과 유물론간의 논쟁이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쟁에 불과함을 눈치챌 수 있다
 관념론은 의식이 물질에 선행한다 주장하고, 유물론은 그 명제의 역을 주장한다

 물질이 진화의 방향을 결정한다면, 역사를 소급하여 태초의 태초로부터 의식만 존재하는 경우는 없어도
 물질만 존재하는 경우는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의식만 존재하는 경우 아무것도 진화할 수 없을테니

 한편,
 의식이 진화의 방향을 결정한다면, 역사를 소급하여 태초의 태초로부터 물질만 존재하는 경우는 없어도
 의식만 존재하는 경우는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물질만 존재하는 경우 아무것도 진화될 수 없을테니

 따라서 만약, 神의 관념을 태초의 태초로부터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굳이 정의한다면
 神은 진화의 결정인자에 따라 물질이 될 수도, 의식이 될 수도 있다



4. 지식과 지혜는 관념론적으로 유전된다

 유물론이 관념론에 대해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은 설득력을 지니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지식과 지혜와 같은 관념론적 존재가 유물론적으로 유전되지 않으며 오직, 관념론적으로 유전되는 특이 사항에 있다. 즉,

 유물론적 존재(=물질 & 물질의 반영으로서의 의식) 은 유물론적/ 관념론적으로 공히 유전될 수 있어도
 관념론적 존재(=자아, 지식, 지혜 but, 의식의 반영으로서의 물질은 제외) 은 오직 관념론적으로만 유전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cf)  유물론 :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며 의식은 물질을 능동적으로 변형한다
                    = 관념은 유물의 반영이며 관념은 (유물이 관념의 반영이 아닌 한에서) 유물을 능동적으로 변형한다. 즉,

       유물의 반영이란 유물의 연속적 흐름 그, 자체이며
       관념의 능동적 변형이란 관념론적 존재 ‘자아’의식의 흐름(∈ 유물론적 존재) 에 대해 수행하는 제어를 의미한다



이 명제를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

‘자아’ 는 지극히 관념론적 존재다. 물질의 반영 즉, 유물론적 존재인 의식의 흐름 위를 노니는 나뭇배와 같다
사회화, 학습화의 결과로써 관념론적으로만 유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아 역시 유물의 반영 즉, 의식의 흐름이 선행된 유물론적 환경 하에서만 관념론적으로 유전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의 무상성에 대한 회의감의 주체는 ‘자아’ 이며, 그 자아를 담는 그릇인 물질적 육체와 의식의 흐름 따위는 유물론적 존재로서
삶과 죽음의 무상성에 대해 지극히 초개적이다. 따라서,
(즉, 유물론적 존재들끼리는 서로에 대해 초개적이다)

인생에 대하여 우리의 관념론적 존재인 ‘자아’ 는 이를 뛰어넘는 유물론적 존재들의 ‘초개성’ 에 대해
삶에 대한 긍정이라 함이 ‘일회적 자아에 대한 회의감 외면 따라서, 神의 다듬는 보살핌에 대한 기복’ 으로서의 방어기제가 아닌,
만들어진 ‘자아’ 의 만들어낸 꼴깝에 불과함을 성찰하는데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즉,

인생을 잘살든 막살든, 자아 그 밑에 놓여있는 유물론적 존재들은 그러한 자아 정체성의 다양성에 대해 지극히 ‘초개적’ 이라는 것이다

이는 삶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방랑자들의 쳐진 눈빛에 신선한 사유 거리가 된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10대 청소년들처럼 반항하고 싶어 반항하는 찌질함에 대해
그 어떤 유물론적 존재들도 이에 대해 ‘꿈쩍도 않음’ 을 시사하는 것이다

유물론적 존재들은 ‘자아’ 라는 관념론적 존재에게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니가 알아서 하라고’

관념론적 존재는 숙명적으로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존재는 언제나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 초개적으로 널려있다



5. 맺음말

 종교와 과학의 경계는 '신념' 유무의 문제다
 신념은 미래의 결과를 확신하여 '현재의 초개성' 을 외면하고 마는 어리석음의 달콤한 싹이다

 확신의 신념은 그 자체로 포용을 거부한다 따라서 거부된 포용은 곧,
 싸움과 갈등을 불러모으기 마련이다

 누군가 내게 지금까지 깨달은 '두려움마저 포용해버린 자아를 갖추기 위한 최고의 겸손' 을 묻는다면 그것은,
 정답을 내리지 않은채 그저, 가능성에 대해 모든 인지 도구를 항상 열어놓고 있음이다

 그 가능성에 대한 중립적 과정 속에서의 완성은 '과거' 가 결정하기 마련이다
 미래의 과거를 알고 싶은가?

 왜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