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컴퓨터는 이산 기계(discrete machine) 또는 디지털 컴퓨터(digital computer). 반면 뇌는 연속 기계(continuous machine) 또는 아날로그 컴퓨터(analog computer)라고 보통 이야기한다. 나는 이런 구분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제목에서 뇌는 아날로그 컴퓨터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나? 나는 이론적인 수준 또는 원칙적인 수준에서 생각할 때에는 상황이 매우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용기에 오직 수소 원자들만 모여 있다고 하자. 한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문학적으로 많은 수소 원자들이 모여 있다. 이 때 수소 원자들의 무게는 사실상 연속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kg의 수소 원자들이 있을 때 이 중에서 0.1kg만 제거할 수도 있으며, 0.0001kg만 제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용기 속에 있는 수소 원자들의 개수를 셀 수 있다. 실제로 세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수소 원자의 개수가 4897523615487454개라고 하자. 여기에 수소 원자를 하나 추가할 수도 있고 하나 뺄 수도 있지만 0.5개를 추가하거나 뺄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수소들의 집합은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이다.

 

소수 원자들의 집합을 연속적이라고 봐도 실생활에서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이산적이다. 나는 뇌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뇌가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봐도 실생활에서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뇌는 아날로그 컴퓨터가 아니라 디지털 컴퓨터라는 것이다.

 

 

 

양자 역학을 잘 모르는 내가 알기로는 시공간은 근본적으로 이산적이다. 수학에서 실수를 나타내는 수직선(number line)은 연속적이다. 0 1 사이에는 0.5가 있으며, 0 0.5 사이에는 0.25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수소 원자들의 집합의 경우에는 결국 소수 원자라는 한계에 부딪쳐서 연속성이 깨지지만 수직선에서는 아무리 작게 쪼개도 또 쪼갤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우주를 형성하는 시공간의 경우에는 극히 작게 쪼개다 보면 결국 한계에 부딪친다고 한다.

 

따라서 뇌를 형성하는 것들도 결국 아주 작게 쪼개다 보면 한계에 부딪친다. 그런 수준에서 생각하면 뇌는 이산 기계 또는 디지털 컴퓨터인 것이다.

 

 

 

원칙적인 수준에서 뇌가 아날로그 컴퓨터가 아니라 디지털 컴퓨터라는 점은 어떤 의미가 있나? 이것은 뇌가 튜링 기계(Turing machine)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뇌가 아날로그 컴퓨터이기 때문에 튜링 기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에서 내가 편 논증이 옳다면 뇌는 디지털 컴퓨터다. 물론 우리가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수준에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실생활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튜링 기계에 대한 튜링의 이야기는 원칙적인 이야기다. 튜링 기계에는 무한한 기억 용량이 있는데 튜링은 실제로 무한한 기억 용량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뇌와 전자 컴퓨터의 근본적인 차이는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가 아니다. 절대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기계냐 양자 역학의 확률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기계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자 컴퓨터는 고장이나 오작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기계다. 반면 뇌는 확률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기계다. 확률적 결정론이 지배하기 때문에 뇌가 튜링 기계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뇌가 디지털 컴퓨터라고 주장하는 학자를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내가 생각해낸 것이다. 그리고 양자 역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내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