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휘리예트 데일리에서(제가 터키 뉴스 소스를 거의 항상 여기서 얻는 이유는 터키에 영자지가 이걸 포함해서 2개밖에 없고 나머지 하나가 질이 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일반 터키어 신문 홈페이지를 가도 번역이 잘 없고, 이전에 언급했듯 제 터키어 실력으론 신문 못 읽으니..) 터키의 명문대학 중 하나인 앙카라 대학에서 아르메니아어 강좌를 개설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최근 터키-아르메니아 관계가 개선되니 이에 대학 측에서도 슬슬 발을 맞추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아니, 터키에는 외국어대학교가 없나? 아르메니아어과 같은 게 있어서 담당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한국외국어대학교라는 외국어 특화 대학교가 있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저로서는 은연중에 외국에도 외국어를 집약적으로 담당하는 대학교가 몇 개쯤 있으리라 생각했던 거지요. 한국에는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3개의 외국어 특화 대학교(*)(한국외대, 부산외대, 대구외대-대구외대는 외국어 특화면에서는 좀 급이 떨어지지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수험 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면 다른 두 곳은 잘 모르더라도 적어도 한국외대에 대략 무슨 과가 있는지는 알고 있을 겁니다. 실제로 독립된 과로 다루는 언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지요.

-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이상 수능에서 다루는 주요 외국어 8개)
- 이탈리아어, 포르투갈(브라질)어, 네덜란드어, 스칸디나비아어(핀란드어 제외 북게르만 주요 3개어)
- 폴란드어, 체코어/슬로바키아어,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 우크라이나어, 그리스어/불가리아어
-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태국어, 베트남어, 힌디어(인도어라니!), 터키어/아제리어, 이란어, 몽골어, 카자흐어/우즈베크어(투르크멘어와 키르기스어, 타지크어는 중요도가 덜한 듯?), 스와힐리어/줄루어/하우사어/아프리칸스어

이 밖에도 많은 유럽어 계열 학생들이 라틴어를 배우고 있고, 여러 목적으로 고대 그리스어도 강의되는 듯하며, 인도어과에서는 산스크리트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이 외의 소수어들도 좀 가르치던 것 같군요. 이렇게 놓고 보면 사실상 현대 세계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거의 모든 언어를 포괄하는 것 같습니다. 중남미의 케추아어 등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나 알바니아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야어, 버마어, 라오어, 암하라어, 인도의 많은 언어들(타밀어부터..), 인도네시아의 많은 언어들(자바어부터..), 필리핀어(및 타갈로그어/일로카노어 등), 크메르어, 쿠르드어, 아이티 크레올, 몇몇 슬라브어(벨라루스어부터..), 히브리어, 소말리어, 말라가시어 등도 상당히 큰 언어권을 형성하고 있는데 빠졌다는 반론도 정당하긴 합니다만..(버마어는 부산외대에 과가 있지요. 히브리어는 신학대에서 가르치고.) 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역량과 그 현실적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 정도도 충분히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한국의 대학생이 외국어 특화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은 꽤나 넓은 편입니다. 현실적인 면으로도 한국외대는 한국에서 꽤 서열이 높은 대학이기 때문에 능력이 된다면 학벌상 차별 문제도 별로 없겠고요.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외국어대학'이라는 체제를 '무슨무슨 공과대학' 식의 특화대학 중의 하나로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듯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한국은 이런데, 실제로 터키에는 외국어대학교가 따로 없습니다. 그냥 종합대학, 예컨대 위에 나온 앙카라대나 이스탄불대 등에서 외국어 강좌를 개설하는 식이지요.(저는 이걸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과학이나 기술 분야에 특화가 이루어진 대학(또한 한국으로 치면 4년제 학사학위 수여 가능 급)을 갖고 있는 국가는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이 '외국어대학'이라는 체제는, 가만 살펴보면 거의 동아시아에서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외국어대학을 별도로 갖고 있는 국가는 위키백과 검색에 따르면 일본, 한국, 북한, 중국(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미얀마, 몽골, 인도, 중앙아시아 국가들, 러시아(*) 정도인 것 같군요. 물론 여러 국가에서 '국제대학'이라는 이름을 쓰는 종합대학이 있긴 합니다만, 위와 같은 방식의 외국어 집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외국어를 많이 다룬다고 해도 외국어 집약이라는 간판을 내걸지는 않지요. 인도에 있는 외국어대학의 경우도 외국어 집약 체제를 갖추기는 하는데 일단은 영어 중심이고 그 수도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결국 이 외국어대학이라는 체제는 거의 동아시아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인 듯합니다.(혹시 적절한 반례가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외국어대학들 중 최초로 설립된 것이 일본의 도쿄외대인데, 이 대학의 역사를 찾아보면 이 대학은 19세기 중엽 막부의 외국어 문서 취급을 담당하던 만서조소(蛮書調所, 반쇼시라베쇼)에서 출발해서 19세기 말에 도쿄외국어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외국어대학답게 다루는 외국어의 범위도 굉장히 넓은데, 위의 한국외대보다 다루는 유럽어의 범위가 조금 좁은 반면에(물론 주요 유럽어는 대부분 다 있지요) 아시아 언어에 좀 더 집중하는 형태입니다.(예컨대 동남아시아에서는 라오어, 크메르어, 버마어, 필리핀어도 다룹니다)

이 도쿄외대의 역사와 그 형태만 봐도 근대에 접어든 일본이 광범위한 문서의 번역 작업과 전문 외국어 인재 양성에 들인 공을 알 수 있지요. 여타 일본 내 외국어대학들이나 한국 등 여러 국가의 외국어대학들도 도쿄외대의 이런 형태를 대부분 따르고 있습니다. 대략 간추리면 이렇게 '종합대학(university) 형태, 즉 다른 분야도 포함하는 아카데미화를 갖추면서(college급의 기관을 갖춘 국가들은 적지 않습니다)' '외국어 특화를 내거는' 형태 말이지요. 사실 여러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교육 제도를(특히 중등교육 부문에서) 상당 부분 그 전범으로 했다는 것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알게 모르게 수입된 체제가 있었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사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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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보니 그 외에 경북외국어대학교와 한국사이버외대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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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수정.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들(아제르바이잔부터 카자흐, 우즈벡, 타지크 등) 등 인도 외 여타 비동아권 국가들에도 외국어대학교가 있군요. 좀 더 찾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글을 쓰다 보니 이런 현상이 발생하네요. -_-;; 그런데 일단 이쪽 대학들은 찾아본 바로는 '외국어' 보다는 주로 '국제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이군요. 이런 '국제대학' 혹은 '국제관계대학' 들은 언급했듯 멕시코 등 적지 않은 국가에 있지요. 위에서 논한 도쿄외대식의 외국어 집약 형태와는 사뭇 다른 경우니 본문의 논지를 크게 위협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러시아는 자꾸 검색결과가 헷갈려서 목록에 넣었다 뺐다 했는데 있긴 있습니다. 명칭이 '모스크바 국립 언어대학' 식이라서 그렇긴 한데 동아시아권에서 외국어대학의 기능과 매우 유사한 것 같군요.(유명한 므기모는 외국어대학이 아니라 국제관계대학입니다) 이 경우 도쿄외대식은 아니지만 외국어대학이라 할 만한 것 같습니다.


이 외에 미국에도 '국방외국어대학교' 라고 해서 장병교육 목적의 학교가 있긴 한데, 이 역시 도쿄외대 형태와는 많이 다르지요. 서구권 대학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형태를 찾으라면 프랑스의 INALCO(Institut National des Langues et Civilisations Orientales)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종합대학 형식이라기보단 완전 외국어/문명연구 집약 형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