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계열(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만 진보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민주당 계열(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까지 진보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민주노동당 계열이 더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한나라당에 비하면 민주당 계열도 어느 정도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민주노동당 계열과 민주당 계열을 포괄하여 진보파라고 부를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한나라당이 득세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 이후에도 한나라당의 인기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진보파의 입장에서는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지난 몇 년 간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 계열(한나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은 약 50%, 민주당 계열은 약 30%, 민주노동당 계열은 약 5% 정도의 지지를 얻었다.

 

진보파의 인기가 상당히 추락한 것을 두고 진보파가 못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런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인기가 추락하고 진보파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진보파가 지금보다 훨씬 잘했나? 내가 보기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한나라당도 진보파도 거의 비슷하게 행동했다.

 

 

 

진보파 또는 개혁파 또는 계몽파에게는 커다란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강력한 관성이다. 보수파는 관성의 힘 때문에 거저 얻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진화론/창조론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여전히 미국 대중 사이에서는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더 인기가 있다. 그렇다고 미국의 진화론자들이 바보 같이 행동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나? 절대 아니다.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이 쓴 책의 질을 비교해 보라. 상대가 안 된다. 진화론자와 창조론자가 벌이는 토론을 보라. 역시 상대가 안 된다. 창조론자들의 말과 글은 진화 생물학자가 보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에서 진화론자가 열세에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관성 때문이다. 기독교는 서양을 거의 2천 년 동안 지배했다. 2천 년 전에도 모종의 창조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진화론자는 적어도 수천 년은 된 미신과 종교의 거대한 역사적 관성과 싸워야 한다.

 

한국의 진보파는 어떤 관성과 싸워야 하는가? 왕정주의, 여성 차별, 동성애자와 성전환자에 대한 혐오, 서열과 복종의 정신, 배타적 민족주의 등은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다. 이런 것들이 한나라당에 힘을 주고 있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이런 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대통령이 죽으면 국상의 분위기가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정말로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대통령이 왕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종이라고 생각한다면 대통령이 죽었다고 TV 오락 프로그램도 안 하고 온 국민이 슬픔에 빠지거나 그런 흉내를 내야 할 이유가 없다. 죽은 대통령의 가까운 지인이나 그를 많이 좋아했던 사람들만 슬퍼하면 된다.

 

 

 

또한 한나라당에는 자본가 계급이라는 강력한 동지가 있다. 한국의 자본가 계급 특히 거대 자본가들은 민주노동당 계열을 증오하며 민주당 계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재벌에게는 막대한 돈이라는 강력한 힘이 있으며 이것을 이용해서 온갖 방면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대표적인 것이 대중 매체다. 이명박 정부가 언론 매체를 장악하려고 한다는 우려가 있지만 그 이전부터 거대 언론 자본은 한나라당 계열을 상당히 충실히 보좌했었다. 이제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을 뿐이다.

 

 

 

요컨대 진보파 앞에는 관성과 재벌이라는 막강한 적이 버티고 있다. 따라서 진보파의 싸움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힘든 싸움이며 당장 항상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몽상에 가까운 낙관이다. 진보파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우리는 진보파의 적이 얼마나 강력한지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진보파의 적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진보파가 항상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진보는 일어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100년 전의 한반도와 현재의 남한은 비교해 보라. 위에서 언급한 왕정주의, 여성 차별, 동성애자와 성전환자에 대한 혐오, 서열과 복종의 정신, 배타적 민족주의 등이 엄청나게 약해졌다(불행히도 북조선은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일 때가 많다).

 

남한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진보파에게 유리한 막강한 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 중에는 도덕성과 이타성도 있으며 이것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 전두환 정권의 악행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없었다면 1987년의 폭발적인 대중 시위는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 본성 중에는 이기성도 있으며 이것 역시 매우 강력하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잘 포착했듯이 이기성이 어떤 때에는 진보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만약 노동자들이 더 많이 벌고 더 편하게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1987년의 폭발적인 대중 파업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런 파업 물결 이후에 만들어진 강력한 민주노조들이 없었다면 전두환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기 쉬웠을 것이다.

 

남한은 민주주의 후진국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선진산업국을 부러워하는데 미국, 서유럽, 일본 같은 선진산업국은 수십 년 전의 남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따라서 선진산업국에 대한 선망은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로 연결될 수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일어난 남한의 보수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7년 이후의 10년에 대해 제대로 고찰해야 한다. 그 시기 동안 남한에서는 시위, 파업, 운동권 세미나, 책 읽는 문화, 토론하는 문화, 진보적인 예술 등이 활짝 꽃 피웠다. 그 시기는 거대한 도약의 시기였다. 하지만 보통 진보는 직선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1968년 거대한 투쟁이 휩쓸었던 프랑스의 경우에도 10년 정도 후에는 어느 정도 보수화가 진행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만치 않은 대중 투쟁이 있었던 미국도 10년 정도 후에 비슷한 보수화가 진행되었다. 남한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꽃이 피면 지게 마련이듯이 거대한 개혁과 투쟁의 시기가 마냥 계속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 활력은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1987년 이후 20세기 말까지 한국에서 거침없이 일어났던 약 15년 동안의 진보와 개혁에만 눈이 팔린 사람은 21세기 초에 벌어진 우경화를 보고 좌절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낙관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1987년 이전과 현재를 비교해 보라.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지난 50년 동안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라.

 

또한 한나라당 지지율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이제 한나라당은 더 이상 이전의 민정당(전두환 시절)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을 비하하지도 못하며, 노조는 빨갱이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자들도 있지만 곧 사과하는 척이라도 한다. 물론 내가 한나라당 지도부가 이전 민정당 지도부보다 더 착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은 전두환에 비해 별로 착해 보이지 않으며 이명박 내각을 구성하는 사람들도 전두환 내각에 비해 별로 착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변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이제는 여성과 노조를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것을 참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진보파가 아주 잘했다고 보는 사람이 아니다. 민주당 계열은 한나라당보다는 못하지만(?) 엄청나게 부패했다는 것은 이미 잘 보여주었다. 이것은 민주당이 근본적으로 자본가들의 돈으로 운영되는 정당이기 때문에 거의 불가피한 일이다.

 

민주노동당은 어떤가? 운동권 진보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NL(민족해방파, National Liberation) 계열의 북조선 지배 계급 지지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김일성주의자(20년 전만 해도 NL은 모두 김일성주의자였지만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들이 몰래 모여서 김일성 선집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커다란 충격을 받는 것 같다. 그들은 NL파를 보고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있는가?라고 이야기한다.

 

우선 한국인의 절반 정도가 종교인이며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적어도 김일성주의자들은 김일성이 아무 것도 없이 물 위를 걸었다고 믿지는 않는 듯하다. 김일성주의자의 어리석음이 기독교인의 어리석음보다 더 크다는 증거는 별로 없어 보인다. 단지 남한에는 기독교인은 많지만 김일성주의자는 별로 없어서 더 바보 같아 보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 운동권에서 김일성주의가 인기가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김일성주의가 위에서 지적한 관성 즉 왕정주의, 여성 차별, 동성애자와 성전환자에 대한 혐오, 서열과 복종의 정신, 배타적 민족주의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김일성의 이데올로기와 훨씬 더 가깝다. 이것은 왜 북조선 사람들이 상당히 매끄럽게 이씨 조선 이데올로기에서 김씨 조선 이데올로기로 갈아탔는지도 잘 설명한다.

 

 

 

진보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진보파가 진화 심리학에 대해 얼마나 한심한 태도를 취하는지 상세히 해부할 생각이다. 하지만 사태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2010-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