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게 촌스럽고 진부한 제목이긴 한데… 사실은 전에 한번 쓰려다가 왜 자청해서 욕을 먹어야 하나 싶어서 그만 둔 내용이다. (그때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자칭 노빠 내지 유빠들과 싸우는 입장이었거든… ^^) 정치 이야기는 의견이 눈꼽만큼이라도 다른 사람의 글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쓴다고 해도 아주 잘 해야 본전이고  한마디만 잘못하면 꼬투리를 잡혀 무지하게 몰매를 맞는다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서 내 스탠스가 이미 노빠로 정해진 것 같으니 더 미루지 않고 그냥 올리겠다.

일단 내가 노무현에 대해서 대충 아는 사항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기술해 보자. 그는 1946년에 경상남도 김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무엇보다 대학도 안 나오고 사법시험에 붙은 사람이 초등학교 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집안 형편 때문에 결석이 잦았다. 중학교 때부터 반항적인 기질을 몇 차례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성적표에 기재된 교사의 의견이 학년별로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 해는 ‘두뇌명석하고 지도력이 있으며 정의감이 강함. 장래가 기대됨’, 바로 그 다음 해에는 ‘반항심이 강하고 수업중에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하며 학생들을 선동하는 경향이 있음’ 이런 식으로 말이다. 노빠와 노까가 명확하게 갈라지는 경향은 그때도 여전했던 듯… ^^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사법시험공부에 몰두했다.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은 듯 하지만 당시 머리 좋은 하층 계급이 인생역전에 성공하는 길은 사법시험 뿐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생활이 힘들긴 했지만 그나마 사법공부에 열중하게 해줄 수 있게 한 건 친형 노건평의 공무원 월급 덕이었던 것 같고 이 점에서 형제간의 우애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법시험 공부 중에 결혼을 했는데 이 권양숙이라는 여자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 중에 6.25 때 빨치산과 관련있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데 결혼 당시에는 그에 대해 의식하는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다. 아무튼 당시까지 노무현은 가난한 사법고시 준비생으로 도덕성이나 사회에 대한 의식 등에서 별반 특이한 점은 없었다.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그가 가끔 아내를 구타한 적이 있었다 해도 특별히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그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그 자신에겐 크나큰 경사였겠지만 우리가 이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그가 사법동기인 인권변호사 문재인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점차 정치적 사건에 대한 변호를 맡으면서 시민운동과 재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정치 및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인권변호사 선배격이었던 김광일의 권유로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김영삼에게도 소개되었다. 13대 총선에서 야당 바람 덕에 정치 초년병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거물 허삼수를 누르고 당선이 되었다. 그 후 성실한 의정생활로 어느 정도의 주목을 끌었지만 국민들의 결정적인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생방송으로 진행된 5공 청문회였다. 논리적인 질의와 추궁을 통해 국민적인 스타가 된 그는 그 후 한 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여타 정치인들과 다소 다른 행보를 보였다. 자신의 인기를 바탕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찾아다니는 대신 한동안 일부러 그런다고 보일만큼 사지나 당선 가능성 없는 곳에서만 출마했던 것이다.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에 입당한 후에 그를 사갈시하는 영남의 본거지에 세 차례나 출마한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을 만들며 오히려 그의 인기를 더욱 촉진시켰다. 당시 그는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성인 취급을 받았을 정도였다. 물론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선 그가 안될 줄 알면서 지역감정에 도전한 게 아니라 자기의 인기에 취해서 잘만 하면 당선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영남에 갔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겠는데 수도권에서 공천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영남쪽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까지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당시 민주당에서 그의 입지가 그리 굳건하지 않았다 해도 최소한 그가 요구할 경우 서울의 지역구 하나 정도 얻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적어도 한번은 자신의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영남으로 간 적이 분명히 있었다.

가만, 이거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지는데… 그 후 잘 알려진 일은 대충 넘기고 아무튼 그가 어찌어찌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야당에 기반해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내 판단에 우리나라의 기득권 세력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일관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세력은 단 한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다. (이건 물론 동일한 세력이 계속 집권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혀 다른 소리다) 더구나 선거를 통한 집권세력을 선출하는 시스템이 정착된 이래 영남의 엄청난 인구는 그대로 기득권 세력과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물론 누구나 알듯이 이 상황에서 집권을 한 야당 출신 정치인이 딱 두명 있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여기까지는 사실의 영역이다. 내 의견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이러한 기존 기득권 시스템을 깨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 즉 김대중과 노무현의 당선 모두 거의 기적같이 가능성이 적은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우선 김대중 당선을 놓고 이야기해 보자. 우선 여권이 분열되었다 (이것부터가 보통 때같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DJP 연합으로 충청권 및 상당한 보수 세력의 표가 넘어왔다. IMF로 전임정권에 대한 심판론이 제기되었다. 더구나 여권의 이회창이란 인물의 자식 병역문제가 대두되어 엄청난 이슈가 되어 갔다. 결과적으로 1%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된 결과를 보아 이 중에서 한가지 조건이라도 없었다면 그의 당선 가능성은 없었다고 봐도 좋다. 다시 말해 김대중의 집권은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외부와 내부의 조건이 기적처럼 들어맞아 일어난 일종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의 이를 일으키기 위해 애쓴 그의 노력과 능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평소 실력은 무엇일까?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얻은 표와 지난 번 대선에서 정동영의 얻은 표가 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즉 김대중이, 또는 그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에서 나오는 후보가 아무리 뛰고 날아봐야 이 이상의 결과를 얻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을 갖다놔도 이 득표율이 더 내려가기도 힘들다. 즉 작대기를 세워놔도 한나라당 40%, 민주당 30%의 비율은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노무현의 경우에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이 시스템을 깨뜨렸다. (또는 한동안은 다들 그렇게 믿었다.) 즉 자신의 인기 하나만 가지고 아무 기반 없는 민주당에서 후보자리를 차지하고,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대권쟁취에 성공한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모두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즉 김대중은 평생 능력이나 도덕성에서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능멸당하면서 그것을 참고 살아왔다. 권력욕은 있는데 그는 약자, 즉 을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욕을 참으며 최대한 자신의 지지를 한표라도 늘리고자 한 것이다. 실상 투표에서 바람의 귀재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그는 실제로는 선거에서 바람을 일으키는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 김영삼은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었지만 실제로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바람과는 무관한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된 이후였다. 실제 바람을 일으키는데 성공한 사람은 노무현이었다. 그는 최소한 3번 그것을 경험했다. 첫번째 청문회 스타, 두번째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당시, 세번째 탄핵. 그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그는 김대중처럼 자신이 옳지 않다는 믿는 자들에게 굽신댈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문제는 기득권의 세력은 여전히 강성했고...  바람을 통해 얻은 인기는 너무나 급속히 사그러졌다는 점이다. (나머지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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