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경쟁, 노동, 소유 - 인간의 역사와 진보의 근본문제
 
지난 글에서 욕망의 반대말로 쓰이고 있는 선의조차도, 결국 인간이 품고 사는 무수한 욕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함을 이야기했다. 그럼 욕망은 과연 무엇일까? 욕망은 DNA의 생존과 번식 의지의 반영물이다. 따라서 욕망은 우선 생물과 무생물을 나누는 경계이며,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욕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DNA는 아메바같은 하등동물들은 자신의 의지로 직접 통제하기도 하고, 두뇌를 형성한 고등생물들은 의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제하기도 한다. DNA는 그렇게 생명체들의 욕망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복제와 유지를 위해 봉사하도록 만든다.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DNA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획득해야 한다. 이때 당연히, 투입되는 에너지보다 산출되는 에너지가 더 커서 효율이 높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욕망이란 결국 투입되는 에너지는 보다 작게, 산출되는 에너지는 보다 많게 하기 위한 어떤 활동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경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늘 더 높은 수준의 편리함과 생산성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확장하고, 지능과 협력을 통해 그것을 구현하는 존재이다. 경쟁이란 그렇게 인간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한 활동이 보다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이다. 
 
다들 알다시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평생을 다 바친다. 때로는 식물처럼 햇빛을 향하여 몸을 뻗고, 때로는 다른 생명체를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훔치기도 한다. 그 중 인간이 벌이는 그러한 활동을 따로 구분하여 노동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능동적으로 변형하는 거의 유일한 생물체이다. 대부분의 생물들이 자연을 수동적으로 변형하는데 그치는 것과 비교하면 인간은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경쟁을 통해 거의 무한대로 확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생물체이다.
 
소유는 그러한 노동의 산물이다. 따라서 DNA가 욕망을 낳고, 욕망은 경쟁을 통해 효율적인 노동을 낳고, 노동은 소유를 낳는 인과 관계의 연장선이 만들어진다. 인간은 노동을 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고, 자신의 욕망 역시 구현할 수 없다. 소유란 그렇게 자신이 생산한 노동 생산물을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말한다.  만약 누군가 수고롭게 나무 위에 올라가 과일을 따는데 성공했다면, 그 과일은 마땅히 그 사람의 소유이다. 혼자서 생산했다면 혼자서 소유하고, 집단을 이루어 생산하면 그 집단의 소유이다. 소유는 그렇게 노동 관계의 반영물이다. 이렇게 욕망에 따라 노동하고, 경쟁을 하여 효율을 높이고, 생산물을 생산자가 소유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정당하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이 노동하여 소유한 생산물을 탐내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우리는 그러한 특별한 욕망을 따로 구분하여 탐욕이라고 부른다. 최초 인간 사회에 탐욕이 등장한 시점부터, 그 것은 매우 쉽게 인간의 노동과 경쟁과 소유의 본래적인 의미를 변질시켜 버렸다. 탐욕에 의해 노동은 타인의 소유에 대한 약탈 행동으로 변질되고, 그 결과로 소유는 생산자가 아니라 약탈자의 것이 되어버렸다. 경쟁 또한 보다 더 높은 효율과 생산성을 위한 것이 아닌 탐욕의 경연이라는 의미로 바뀌어 버렸다.
 
그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부당한 탐욕과 정당한 욕망이 때로는 서로 타협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대립하며 발전해온 역사이다. 인간 역사 초기 아직 무질서한 틈을 타 탐욕은 매우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순식간에 인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노동과 소유와 경쟁의 진정한 의미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바로 인간이 인간 그 자체를 소유할 수 있는, 그리하여 노동 생산물이 즉시 타인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야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노예시대, 봉건시대를 거쳐 자본주의시대에 이르렀다. 

이렇게 인간의 탐욕과 욕망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의 역사를 마르크스같은 사람들은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야만에서 문명을 향해 발전해 온 역사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그 말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확히 표현하면, 인간의 역사는 거대한 탐욕에 맞서 무수히 작은 욕망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소유를 되찾기 위해 투쟁해온 역사이다. 그러므로 매 역사의 순간마다 진보란, 욕망은 점점 자유롭고 평등한 방향으로 확대되고, 탐욕은 그에 비례하여 점점 축소되어온 과정을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진보의 길을 따라 흘러 왔다. 

따라서 역사속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인간들의 정당한 욕망과 경쟁과 노동과 소유는 더욱 더 촉진시키고, 탐욕에는 과감히 맞서 싸우며, 결국 인간 사회의 자유와 평등과 풍요를 지향하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궁극에는 모든 탐욕이 사라지고, 생산자 모두가 자신의 정당한  생산물을 당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끝없이 전진하는 것, 경쟁이 인간의 풍요를 위해 기여하는 것, 그리하여 노동과 소유의 관계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이 바로 진보이다. 이러한 진보의 정의를 정확히 이해한 자만이 진정한 진보주의자이다. 때문에 진보주의자는 인간 사회가 정당한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발명한 모든 도구들을 적절하고 훌륭하게 사용할 줄 아는 자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자유와 평등을 위한 열망과 때로는 선의로 포장된 욕망까지도 모두 진보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할 줄 알아야 비로소 그를 진정한 진보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 사회는, 특히 한국 사회는 인간의 생산 활동에 꼭 필요한 욕망 경쟁 노동 소유에 들러 붙어 따라다니는 탐욕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사회이다. 뉴타운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쾌적한 주거에 대한 욕망을 위해 집을 짓는게 아니라 타인의 노동을 약탈하기 위한 탐욕을 구현하기 위해 집을 짓고, 비정규직과 하청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들의 노동에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선거는 욕망이 아니라 탐욕만이 반영되는 아수라장이 되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노동도 하지 않고 아무런 기여도 없이 타인의 생산물을 소유하려는 온갖 반칙과 노력들이 난무한다. 따라서 우리 시대 진보주의자는 이러한 아수라장의 현장 속에서, 그 어두운 탐욕의 그림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 진보주의자들의 임무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 진보주의자들은 한국 사회를 어떠한 모습으로 파악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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