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의 선의에 대하여

오래전 마르크스 선생께서 이런 뜻의 말씀을 하셨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쥐어짜야만 생존할 수 있다. 그가 설령 인품이 착하고 선의가 넘치는 사람이라도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면, 인자하고 착한 자본가는 이미 경쟁에서 도태되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한 자본가란, 오로지 노동자들을 더 많이 쥐어짜야하는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을 말한다."  비록 그의 이론이나 사상이 고려장을 당해서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적어도 이 문장 속에 담긴 놀라운 통찰만큼은 진실이다. 인간의 선의가 사회구조와 이익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이 문장만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또 있었을까?  

과거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들의 대부분은 인간의 선의에 기댄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선의에 기대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대부분의 노력들이 실패로 끝난 것은 조금만 역사책을 들여다보아도 그 사례들이 널리고 널렸다. 이처럼 선의는 너무나 연약하고, 시스템은 철벽처럼 강고하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의 도덕적인 선의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쉽게 믿고 만다. 서민출신 대통령을 뽑기만하면 당연하게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겠지라고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것들이다. 

그러면 인간의 선의는 과연 무엇일까? 간단하게 실험을 한번 해보자. 내가 아는 지인 하나는 정말 착하고 동정심이 많은 친구이다. 보통 식당에서 술이라도 한잔하고 있으면 껌한통 내밀며 적선을 요구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접하기 마련인데, 이 친구 그때마다 꼬박 꼬박 천원씩 건내는 사람이다. 심지어 껌은 필요없으니 다른 곳에 파시라고 인정을 베푼다. 누군가가 그런 행동에 대해 핀잔을 주면 대번에 '그깟 천원짜리 한장때문에 쪼잔하게 살지 말자'고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껌값이 바로 천원이기 때문에 선의를 베푸는게 가능하다는 것을 과연 깨닫고나 있을까?

만약 가난한 사람이 그 껌한통에 5천원을 요구한다면? 아마도 그 친구는 조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기꺼이 5천원을 건넬 것이다. 그럼 만약 1만원을 요구한다면? 아마도 그 친구의 넘치는 선의는 거기서 중단이 될 것이다. 제 아무리 무골호인이라도 생면부지의 남에게 만원씩 꼬박꼬박 적선하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의 적선행위는 정말로 선의가 맞을까? 혹시 그 친구는 추악한 욕망을 선의로 포장하여 만족을 얻으려는 자가 아닐까? 이를테면 그 친구는 혹시 자신이 착한 사람임을 확인하고픈 욕망, 몰인정한 자들과는 다르다는 과시욕을 충족하기 위해 기꺼이 천원을 지출하고, 그 가난한 사람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친구의 행동은 선의가 아니라 그저 화폐와 서비스를 거래하는 교환 행위에 불과하지 않을까?

실험을 더 해보자. 이번에는 금액을 높이지 말고, 대신 껌장사가 출현하는 빈도수를 늘려보자. 아마도 그 친구는 첫번째 껌장사에게는 매우 기분좋게 천원을 내줄 것이다. 그럼 10분후에 또 다른 껌장사가 등장한다고 치자. 그 때 역시 별다른 표정 변화없이 흔쾌히 거래를 할 것이다. 그럼 세번째는? 네번째는? 아마도 5번째에 이르러, 그 친구의 선의는 바닥이 날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정확히 수요 공급의 법칙과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보살님같기만 하던 친구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란, 그저 5천원의 화폐와 등가를 이루는 보잘것 없고 작은 욕망에 불과했고, 가난한 사람이 굽신거리며 건네는 껌은 그 친구의 선의라는 욕망을 해소시켜주는 상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인간에게 본래적인 의미의 선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이고, 인간의 욕망은 무엇이고, 탐욕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불어 경쟁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인간사회의 진보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 2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