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켓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댓글로 쓰려고 했는데 차라리 본글로 올리는게 더 낫겠다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현재 아크로에서 벌어지는 이 주제와 관련한 토론이 우리나라 진보개혁 세력의 암중 모색에 자그마한 밑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어젯밤 피켓님이 쓰신 글을 읽으면서,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어떤 그림책이 생각났습니다. 아마 님께서도 익히 알고 있는 책이겠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지요. 

애벌레들이 사는 어떤 나라에는 수많은 애벌레들이 몸을 쌓아 만든 거대한 에벌레탑이 서있습니다. 그 탑은 그 나라의 모든 애벌레들이 다른 애벌레의 몸을 밟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느라 저절로 만들어진 탑입니다. 어느날 주인공 애벌레는 애벌레들이 저러고 사는 이유가 다 있겠지, 그 탑의 꼭대기에 뭔가가 있으니까 저리도 위로 올라가려고 애쓰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에 그 탑쌓기 경쟁에 뛰어듭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다른 애벌레들의 몸을 밟고 위로 위로 올라가지요. 그러나 천신만고끝에 꼭대기에 올랐갔더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속았음을 깨달은 주인공 애벌레는 마침내 그 미련하고 바보같은 애벌레들을 뒤로 하고 다시 내려옵니다. 그리고 어느 이쁜 잎사귀에서 번데기가 되어 기다리던 그 애벌레는, 마침내 화려한 나비가 되어 멋지게 하늘로 날아오르지요. 이 것이 그 책의 대강의 줄거리입니다. 

오래전 노동자들의 학습 소모임이 꾸려질때나 노동야학에서 제일 먼저 권하던 책이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무의미한 경쟁으로 내몰아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간답게 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는 그 책이 가장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저는 그 책이 생각났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피켓님의 글이 전하는 메시지와 그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스펙을 쌓아 보다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답이 없는 제로섬 게임 구조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청년들과 막상 아무것도 없는 애벌레탑의 꼭대기에 이르기 위해서 다른 애벌래들을 무자비하게 밟으며 위로만 위로만 꿈틀대며 올라가는 바보같은 애벌레들은 아마도 서로 동일한 존재일 것입니다. 이처럼 님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 책의 상징들과 거의 일대일 대응을 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저는 의문입니다. 과연 청년들의 스펙 쌓기는 그 애벌레들처럼 타인들을 끌어내리고, 더 높이 올라가려는 쓸데없는 경쟁의 몸부림일 뿐일까요? 혹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은 아닐까요? 욕망이 조만간 산산히 부숴질 것을 알기에 '스펙 맞춤에 열올리지만 말고 다른 것도 생각해보자는 말씀은, 혹시 탑쌓기를 포기하고 번데기를 준비하는 그 주인공 애벌레처럼 되라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애벌레는 정말로 나비가 될 수 있었을까요? 혹시 애벌레탑의 가장 밑바닥인 편의점이나 피시방의 88만원짜리 비정규직 알바가 되는건 아닐까요?  

저는 사실 스펙쌓기를 포기한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보여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길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물론 저도 그런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당위만을 가지고 현재 루저가 되느냐 마느냐의 길목에 선 청년들에게 다른 길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하지 않을까요? 

또한 저는 스펙 쌓기가 정말로 헛된 욕망의 제로섬 게임이 맞는 걸일까도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실제 업무에 필요도 없는 능력까지 키워서 성적순으로 스스로를 차별화하기 위해 그런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스펙 쌓기는 자신의 가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더 큰 부분은 아닐까요? 기업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줄세우기만을 위해서 그런 기준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한정된 기회를 배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줄세우기 하는 것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100M 선착순을 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쉽고 간편한 방법일테니까요. 그러나 기업은 노동력을 현금을 주고 구매하는 고객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의 질을 따져보고 비교하겠지요. 또한 공급자는 자신의 노동력이 양질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구요. 혹시 그렇게 스펙쌓기는 노동력의 가치를 높여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한 자본주의 노동자들의 당연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켜나 나비처럼 우아하게 살라는 요구는 어쩌면 생존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 없는 무책임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마르크스 같은 사람조차도 노동자들에게 감히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 단결해서 자본주의 때려엎자고 했지 노동력의 가치를 높여 더 많은 임금을 받고자 노력하는 일반의 노동자들에게 도덕선생처럼 그렇게 살지 말라고 훈계한 적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비 노동자들인 청년들에게 우아한 나비처럼 살라고 속삭이는 사람들은 차라리 솔직하게 우리 그런 구차한 노력들 치우고 자본주의 때려엎고 인간답게 살자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차라리 제가 인정해주고 박수쳐줍니다. 어중간하게 기회주의적으로 양쪽에 발딛고 서서 타인들의 인생에 무책임하게 훈계하는 것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진보주의자는 오히려 자본주의적 욕망을 긍정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할겁니다. 제가 알기로 욕망은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입니다. 무릇 길가의 하찮은 잡초마저도 욕망을 갖고 사는 것이지요. 더 많은 햇빛, 더 많은 물, 더 많은 영양분. 하물며 인간의 경우에 더 말 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망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욕망을 긍정한다고 해서, 모든 욕망을 긍정할 수는 없겠지요. 그저 정당한 욕망의 경계선을 넘어 탐욕에까지 이르는 것만을 경계하면 될 일입니다. 이불변만응변님의 말씀대로 진보주의자가 말 걸수 있는 시민의 욕망이란 바로 그렇게 경계선 안쪽의 정당한 욕망이겠지요. 경계선보다 움츠러든 서민들의 욕망은 오히려 부채질하고, 그 너머 탐욕으로까지 확장되려는 욕망은 붙들어야 하는 것 이 우리 시대 진보주의자들이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로 산다는 건 욕망과 탐욕의 경계선에서 줄타기 해야 하는 정말로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스펙쌓기는, 제가 아무리 생각하고 양보해도 최소한 탐욕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유독 회의하는 진보주의자는 솔직하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그저 우리 시대 진보주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청년들에게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는가 아닌가만 따지고 개선하면 될 일입니다. 혹시라도 뒤쳐지거들랑 다시 독려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알아서 모두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애벌레가 갖고 있는 나비가 되고픈 욕망을 긍정하면서, 마침내 누구 하나 빠짐없이 날개 펴고 날아오를 때까지 도와야하는 것이 우리시대 진보주의자의 사명이 될 것입니다. 그 책의 주인공 애벌레처럼 너 혼자만 빠져나와 우아하게 살라고 속삭여서도 찬양하고 권장해서도 안된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좁은 바늘 구멍'에 자신의 몸을 구겨 넣느라 '승산이 적은 싸움'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우리가 너희들 앞에 놓인 좁은 바늘 구멍을 천안문 대로처럼 넓게 만들어줄께라고 말할 수 있는 진보여야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우리를 믿고 너희들의 욕망을 마음껏 펼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진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애벌레들에게, 이땅의 청년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