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he was clearly aware of the dangers of teleological analysis of implying that some future consequence of an event causes that very event to occur. Thus, he warned that the causes of a phenomenon must be distinguished from the ends it serves:

When, then, the explanation of a social phenomenon is undertaken, we must seek separately the efficient cause which produces it and the function it fulfills. We use the word function in preference to end or purpose, precisely because social phenomena do not generally exist for the useful results they produce.

Thus, despite giving analytical priority to the whole and viewing parts as having consequences for certain normal states and, hence, meeting system requisites, Durkheim remained aware of the dangers of asserting that all systems have purpose and that the need to maintain the whole causes the existence of its constituent part. Yet Durkheims insistence that the function of a part for the social whole always be examined sometimes led him, and certainly many of his followers, into questionable teleological reasoning.

(Jonathan H. Turner, The Structure of Sociological Theory, 7th ed., 2003, (27~28)

 

터너(Jonathan Turner)에 따르면 뒤르켕(Émile Durkheim)을 비롯한 여러 기능론적 사회학자(functionalist)들이 목적론(teleology)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적론의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목적론의 오류는 기능론적 사회학의 핵심 오류다. 그들이 계속해서 목적론의 오류를 범했다는 점은 목적론의 위험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정신분석가들이 정신분석에는 임의적 해석과 암시가 개입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암시 요인을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하고 임의적 해석을 남발한 것과 마찬가지다.

 

 

 

신학적 설명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추방되었으며 목적론적 설명을 무턱대고 사용하면 적어도 학계에서는 비웃음거리가 된다. 인과론에서는 과거가 미래를 설명한다. 반면 목적론은 미래가 과거를 설명한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의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 학계에서는 상식으로 통하기 때문에 미래가 과거를 설명하는 방식이 인기를 끌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목적론적(또는 유사-목적론적) 설명이 학계에서 완전히 추방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두 가지 방식의 목적론적 설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 동물들 특히 인간의 경우 미래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즉 먼저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이런 인간의 능력이 사회 제도에 반영되는 경우도 있다. 태풍 같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에 대비해 재난 대책 위원회를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재난 대책 위원회의 목적은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며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작동한다.

 

둘째, 진화 생물학의 기능(function) 개념은 일상적 의미의 목적 개념과 비슷하다. 하지만 기능은 인간의 의식적 목적과는 다르다. 예컨대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이 진화할 때 생물이 보겠다는 목적을 의식적으로 생각한 다음 눈을 진화시킨 것은 아니다. 과거에 더 잘 보았던 개체가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눈이 보는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정교하게 진화했을 뿐이다. 자연 선택 이론을 얼핏 보면 미래가 과거를 설명하는 나쁜 목적론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과거가 미래를 설명하는 기능론이다. 과거에 이루어진 자연 선택 과정 때문에 눈과 같은 정교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능론적 사회학에서 말하는 기능 중에는 위에서 첫 번째로 언급한 인간의 의식적 계획과 목적이 개입된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의 경우 기능론적 사회학의 목적론적 설명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은 보통 진화 생물학의 기능 개념을 적용한 진화 심리학적 설명을 거부한다. 진화 생물학과 기능론적 사회학에서 모두 기능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같지 않다.

 

기능론적 사회학의 설명 방식과 진화 심리학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집단 선택론적 설명 방식이 상당히 유사하다. 어쩌면 두 학파 사이에서 융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집단 선택론이 거의 가망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내가 볼 때에는 두 학파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별로 똑똑한 자식이 태어날 것 같지 않다. 집단 선택론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집단 선택론(version 0.2)

http://www.skepticalleft.com/bbs/tb.php/01_main_square/50575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은 기능 개념을 두고 갈등하고 있다. 그들의 딜레마를 살펴보자.

 

한편으로 만약 (의식적 목적의 경우를 제외하고) 목적론을 정말로 제대로 폐기하면 기능 개념을 사용한 그들의 명제는 현상의 기술(description)일 뿐이다. 학계에서는 기술보다는 설명(explanation)을 높게 평가한다. 만약 자신들의 핵심 명제들이 단지 기술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술뿐이다. 설명은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다른 학파가 해 줄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도 설명을 할 줄 안다고 광고하기 위해서는 기능 개념을 사용한 명제를 인과론으로 포장해야 한다. 기능론적 사회학자는 과학적 기능 개념인 진화 생물학의 기능 개념을 적용한 진화 심리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능 개념을 적용한 그들의 설명은 (의식적 목적의 경우를 제외하고) 목적론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뻔뻔스러운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목적론 설명을 들이댄다. 그들은 목적론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다. 좀 더 수줍어하는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은 목적론의 위험에 대해 명시적으로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남몰래,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목적론적 설명을 슬쩍 집어넣는다.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목적론적 설명을 끌어들이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2010-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