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 립켄의 균열이론에 의하면 정치는 사회의 균열을 대변한다. 일정한 원인에 의해 사회 내부에 균열이 생긴 것이 정치적 대립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정화되지 않는 이상 사회에 분열은 있을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분열을 될수 있으면 평화롭고 공정하게 처리 해야 하는바, 이것을 담당한 정치 제도가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균열이론의 골자다. 균열을 죄악시 하는 촌스러운 도덕론이 아니라, 균열을 인정하고 그것을 조화롭게 담아내고자 하는 이론인 것이다.

균열의 양상은 각 사회, 시대, 역사마다 다를수 있다. 사회주의 이론이 대두된 것은 당대 유럽의 계급 갈등, 즉 손노동자와 공장 자본가간의 대립이 극렬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이론이 말하는 계급 갈등에만 직면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국가간의 갈등이라는 균열상에 놓이기도 했다. 유럽 노동자들이 국민 국가간의 갈등에 포섭되어 계급적 자각과 결집에 방해 받았다면 미국은 인종간의 갈등상이 노동 계급과 소수 인종 그룹이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보수주의 기획에 의해 활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완전한 계급 일치의 사회,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였던 소련은 중앙집권적 관료 정치가 다수 국민을 탄압하는 갈등상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의 경우, 발전주의 국가론이 사회 균열의 구도를 정하는 이념적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발전 국가에 의해 계급 갈등을 은폐할 정도로 전반적인 소득 향상이 이루어진다면, 많은 서민과 노동 계급들이 국가를 견인하는 폭압적 독재 엘리트들에 동조할 가능성이 커진다. 전국민의 소득 향상을 말하는 발전주의 국가론에 대한 안티테제가 성립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민주당이 태생적 보수성을 쉽사리 계급적 개혁성으로 탈바꿈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피노키오님이 지적하셨듯이 정당의 정체성은 현실에 맞춰 얼마던지 변할수 있다. 하지만 45년 이후 한국 사회는 발전주의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도되어 온 바, 거버넌스의 영역에 있어 억압적인 발전 엘리트들이 점유하는 비중이 거의 90%에 달할정도로 일방적이며, 그들은 3당 합당 이후 상당히 세련된 지배 체제를 가동하게 된다. 반면 계급주의, 혁신주의 세력이 학생운동이나 시민 단체 이외의 공식적인 행정, 입법의 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한적이 없다. 일종의 거대한 정치적 진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2등 보수 세력"이라고 할수 있는 민주당 세력은 반공주의 전통이 강한 상황에서 혁신주의 세력과 연대함으로서 정치적 진공 공간을 채우는 형극의 길을 걷기 보다는, 발전주의 거버넌스를 더 점잖고 민주적으로 운용하는 대안 세력으로 자리매김 하는 집권 전략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발전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한나라당 쪽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당 따위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체계적인 보수주의 커넥션과 국가 운용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부분에서도 상층부의 권력 다툼 영역을 제외하고는 민주당에 비해 특별히 국민을 폭압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따라서 민주당 세력, 개혁 세력은 추상적인 원칙론, 공허한 민주주의 타령, 역사 바로세우기 타령등을 통해 비교우위를 내세우고, 이런 정신을 몸으로 구현하는 정도령을 기다린다. 노무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추상적인 도덕론이나 돌출적인 개인의 출현에 기대는 정치 전략은 한계를 노정할수 밖에 없다. 그들의 정도령은 아마 굉장한 대중적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가, 약간의 도덕적 이념적 약점의 노출로 단번에 무너지는 과정을 되풀이 하게 될것이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정도령을 자신들의 유일한 비교우위인 추상적 도덕론의 날카로운 예봉에 올려놓고 메시아 노릇을 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 개혁 세력이 경제 개혁에 충실할수 없는 것도, 그들이 발전주의 거버넌스의 영역에서 기존 기득권 보수 세력을 대체해야 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경제 기득권 세력과 협력할수 밖에 없다. 개혁을 할수 있는 운신의 폭이 극도로 좁아지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삼성에게 손을 내민것은 이런 고민의 발로일수 있다. 문제는 경제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비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아예 같은편인 한나라당과 함께 하면 되지, 뭐하러 서먹한 민주당과 보조를 맞출 것인가? 결국 개혁 세력은 재벌 기득권 입장에서 개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한나라당 세력이 민주당 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강력한 발전주의 국가론이 사회의 균열 양상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상황에서, 2등 세력인 민주 개혁 진영의 장기적 전망이 극히 암울하다면, 계급적 균열을 대변하는 진보 세력은 어떠한가? 진보 세력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국 사회에 계급 정치를 뿌리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공식적 가버넌스"내에서 구현해야 한다. 즉 행정, 사법, 입법의 영역에서 계급 균열을 대표해야 한다. 그러나 발전주의 국가론이 60년간 운영한, 그 공식 가버넌스의 틈새에 들어가 계급 균열을 대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국가주의 발전론에 상당히 경도된 노동자, 서민 세력을 상대로 해서 말이다. 하지만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당이 대대적인 좌향좌를 할필요가 있다. 즉 민주당 내부에서 좌파와 우파간의 재정렬이 일어나서, 우파는 호남 지역당이나 한나라당으로 가고, 좌파는 진보 세력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면 민주당의 국가 운영 경험 및 물적 인적 토대가 진보주의의 이념성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낼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