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수 많은 모듈(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백지론(tabula rasa, blank slate)의 편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진화 심리학자인 Leda Cosmides & John Tooby의 이런 테제에 반대한다. 대량 모듈성을 반박하는 논거는 상당히 많다. 여기에서는 그 중 하나만 살펴볼 것이다.

 

단백질 합성에 개입하는 인간 유전자의 수는 20,000~25,000 개로 추정되고 있다. 이전에는 십만 개가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았는데 그에 비하면 훨씬 적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Human_genome

 

많은 사람들이 진화 심리학에 유전자 결정론 또는 생물학 결정론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들에 따르면 2만여 개의 유전자에 담긴 정보는 대량 모듈성 테제에서 주장하는 수 많은 모듈들을 프로그래밍 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적다. 따라서 대량 모듈성 테제는 엉터리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그럴 듯한 비판이다.

 

 

 

보통 유전자 결정론과 생물학 결정론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두 개념은 상당히 다르다. 유전자 결정론은 어떤 표현형을 형성하는 정보가 (거의) 모두 유전자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반면 생물학 결정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유전자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생물학 결정론은 선천론 또는 인간 본성론이다. 즉 어떤 표현형이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생각 또는 어떤 표현형이 인간 본성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표현형을 만드는 정보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생물학 결정론자 중에 (거의) 모든 정보가 유전자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생물학 결정론자 중 절대 다수는 유전자에 있는 정보도 매우 중요하지만 유전자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나오는 정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난자 속에는 유전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모든 여자들이 만들어낸 난자들이 공유하는 난자 내부의 구조들이 있다. 사실상 모든 인간은 서로 상당히 비슷한 자궁 환경에서 10개월 정도를 보낸다. 사실상 모든 인간은 태어난 이후 빛이 어느 정도 있는 환경에서 자란다. 이런 공통되는 환경과 유전자가 결합하여 인간 본성을 만들어낸다고 보는 생물학 결정론은 유전자 결정론과는 매우 다르다(이런 점 말고도 생물학 결정론과 유전자 결정론 개념을 둘러싼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사정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무시하겠다).

 

 

 

우리는 아직 어떤 유전자와 어떤 환경(유전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결합하여 표현형이 만들어지는지 잘 모른다. 어쨌든 인간 본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매우 안정적으로 발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간의 눈은 두 개고, 손가락은 열 개이며, 심장은 하나다. 눈에는 수정체, 각막, 망각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을 인간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량 모듈성 테제에 따르면 뇌 속에서 수 많은 선천적 모듈들이 보편적으로 안정되게 발달한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가 수 많은 선천적 모듈들도 이루어졌다고 보는 상식을 정신에 적용한 것일 뿐이다.

 

만약 2만여 개의 유전자가 뇌 속에서 수 많은 모듈들을 만들어내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똑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2만여 개의 유전자는 신체에 수 많은 모듈들 즉 심장, 허파, , , , 다리 등을 만들어내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신체 기관들이 선천적 인간 본성을 형성한다는 점을 부정할 셈인가?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 심리적 모듈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가 유전체 속에 몽땅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다만 그들이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된(genetically programmed)이라는 상당히 애매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은 표현이 쓸 뿐이다. 나는 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런 표현이 틀렸다고 보기도 힘들다. C++이나 Java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로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해 보자. 프로그램의 작동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그 프로그램 속에 들어 있나? 아니다.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컴파일러와 컴퓨터가 필요하다. 정보는 프로그램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컴파일러(고급 언어를 기계어로 바꾸어 준다)와 컴퓨터(그 속에는 기계어를 해독해서 실행할 수 있는 CPU가 들어 있다)에서도 정보가 나온다. 따라서 유전체를 프로그램에 비유한다고 해서 모든 정보가 유전자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유전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컴파일러라는 소프트웨어와 컴퓨터라는 하드웨어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한 시라고 잊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진화 심리학자가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된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유전자를 제외한 온갖 것들에서 나오는 정보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2010-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