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에 "미국 예외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유럽과는 달리 사회주의 세력이 맥을 못추는 미국의 정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개념인데, 사실 미국의 민주당은 노동 조합을 대변하는 등 계급정당으로서의 모습은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주의나 사민주의까지는 못해도, 계급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역할은 한다는 것이고, 70년대 케인즈주의가 북구 유럽의 사민주의와 실질적 형태에서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생산은 자유 기업에 맡기고, 세금을 무지막지하게 때려 - 미국의 경우 최고소득율이 90% - 복지 천국을 만들었다), 미국과 유럽의 정치 지향의 차이는 생각보다 작을수 있다.

사실 사회주의라는 것도, 피지배 노동계급을 대변한다는 계급적 성격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계급이 유토피아 사회를 견인한다는 가버넌스의 측면을 갖고 있는데, 왕정과 중상주의 국가의 전통을 갖고 있던 유럽에서 후자의 색채가 짙은 사회주의 정당이 활발히 활동한 반면, 프론티어즘과 연방주의가 뿌리깊은 미국의 경우 독재 운운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주의 정치를 용납할수 없는 정치문화적 사정이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미국의 민주당이나 유럽의 제 사회정당이나 비교적 일치된 비전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주당도 표면적으로 중도, 보수 이념을 지향하는 것과 달리 노동자와 서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계급정당이라고 할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정상적 보수정치의 복원이라는 일종의 문명사적(?) 기획에 매달려 계급적 이해관계의 구현을 가버넌스 내로 끌어오는데 실패했다고 봐야 할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 위원회 창설이나 노무현 정부에서 북유럽 모델을 검토한 것은 정당과 계급간에 맺어진 실질적 이익 대표성의 반영이 아니라, 사회 통합의 관점에서 노동 및 서민계층과 협조관계를 맺고자 하는 일종의 시혜적 정책들이었고, 태생적인 보수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삼성이나 심지어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수세적 자세를 취한것과 달리 노동 운동에 대해서는 뜬금없이(?) 보수적 법치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대결(?)하고, 김대중 정부가 대우 자동차 사태등에서 역시 보수적 법질서주의(law and order)로 맞선 것에서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의 소위 민주 개혁세력이, 역사적으로 친일 지주를 지지기반으로 했던 50년대의 민주당을 뿌리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 지주를 기반으로하는 보수 민주당이, 독재 세력에 반대하는 야당 세력이 됨으로서, 민주화를 정당 정치의 공간에서 구현한 것이다. 헌법 질서를 파괴했던 군사 독재 세력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한것은 보수 정당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 할수 있지만, 문제는 보수주의가 어떻게 보면 윤리나 당위와는 상관없는 가치 중립적인 개념인바, 이제 정통 보수 세력이 추구할수 있는 보수주의의 공간이 극히 협소해 졌다는데 있다.

즉, 기존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보수인데, 그 기존의 체제는 유럽의 경우 처럼 왕정일수도 있고, 다른 형태가 될수도 있다. 북한에 보수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수령 체제를 옹위하고자 하는 극좌적 보수주의일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앙시앙 레짐은 무엇인가? 즉, 자칭 보수주의자의 머릿속에 있는 막연한 "민족주의, 정통, 민주주의"따위의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구체제는 무엇일까? 군사 독재는 헌법 질서를 파괴하여 공화국에 깊은 생채기를 냈지만, 동시에 재벌 대기업을 중추로 하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물적 기반의 구축에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군사 독재 세력은 독재라는 압제적 가버넌스의 탈을 벗고, 물적 토대의 구축자로서의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한바, 그것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3당 합당이다. 세련되어진 전직 군사 독재 세력, 영남에 기반을 둔 민주 세력이 결집해 만든 것이, 3당 합당의 결과 탄생한 민자당(현재의 한나라당)이고, 이들이 앙시앙 레짐을 대변하는 확고한 보수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았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칭 보수 세력인 민주 개혁 진영이, 보수주의를 하고 싶어 해봤자, 그럴 공간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