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ttered with. SexyDolphin

1. 모순과 자유의지

 '생명' 이라 개념되는 현상은 단한 번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단한 번의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생명은 구태여 '탄생' 이란 번거로움을 자처하여 '죽음' 이란 기한모를 한계와 공존하며, 왜 그 자체로 모순을 품어 가는가?

난 모순 그 자체다. 살아남기 위해라는 표현을 내뱉을수록 죽음의 한계가 또렷이 보이고,
그렇다고 죽을 필요 또한 없다는 표현을 내뱉을수록 그 어느 곳을 향해서도 오도가도 못하니 이보다 기가 찰 모순의 실례가 없다

난 왜 그 어느 곳을 향해서도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가? 모순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수학에는 모순이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모순을 피해가는 방향으로 수학은 그 인식의 지평을 넓혀갔을 뿐이다.
그리고 모순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높은 점수를 받아왔기에 '당황' 을 겪을 일 또한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무의식에 '모순은 잘못된 것이다' 라는 뿌리깊은 고정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이 시점에서 모순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잘못된 것이다 라는 뿌리깊은 고정관념이 나를 주저하게 할 뿐이다 라고
다른 시각으로 再考하기 시작한다면 최소한 '세 가지 모순 중 한 가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 로 향하는 문을 열어낼 수 있겠다.

그냥 이 상태로 주저하든지, 그냥 살든지 아니면, 그냥 죽든지

이 자유의 선택은 완전한 자유의지다. 나는 모순의 궁지에 몰렸을 때, 나의 자유의지의 완전성을 확신한다.
모순의 궁지에 몰림은 모든 인과적 고려 조건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빽빽히 나의 뇌리에 합석하여 더 이상 고려할
여분의 인과 조건들이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조건이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의 고려도 무의미하므로
더 이상의 그 어떤 논의로도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통해 결코, 모순 자체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모순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겨낸 것이다.
모순을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해석도 가미하지 않은 채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둠이다.



시간을 완전히 정지시키면 확률은 '1' 이 된다. 절대적이 된다. 그러나 정지된 시간의 자물쇠를 풀어내는 순간 확률은 더 이상 '1' 이 아니다. 상대적이 된다. 그렇다면 '확률' 은 '시간' 에 대해서 모순이다. 확률은 기가찬다.

주저할 것인가, 멈춰설 것인가 아니면, 흘러갈 것인가. 시간은 확률에게 나아가, 관찰자에게 그 선택의 자유를 양도한다

관찰자는 깨닫는다. 세 가지 모순 중 한 가지를 택하게 되는데 그 모든 세 가지는 더 이상 '비교우위' 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나마 고려해야 할 마지막 단 하나란 자신의 '자유의지' 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엄숙해진다. 오늘의 밤하늘을 후려치는 빗방울의 거친 숨소리도 내 엄숙한 감수성 앞에서 숨을 죽인다.
더 이상 가치판단의 문제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난 모순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이 엄숙함 앞에서의 아릿한 쾌감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모순에 정면으로 대면하는 순간 그 곳 너머에는 '엄숙함의 아릿한 쾌감' 이
기다리고 있다. '자유의지' 라는 밑도 끝도 없는 비어있음과 함께.

내 자유의지의 완전성에 비해 난 지나치게 쓸모없는 단어들을 알고 있다.
내게 글쓰기란 모순을 찾아가 내 자유의지의 완전성의 쾌감에 빠지는 가장 쉬우며 익숙한 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숨을 쉬며 글을 쓰고 있다는 자체가 생명의 모순을 뛰어넘어선 '자유의지' 라는 사실이다.
모순과 자유의지가 만나면 모순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다. 선택을 만든다. 인과 관계적 구속을 초월하는 선택이다.

따라서, 정말로 '선택' 이란 걸 행하고 싶다면 '모순' 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을 때만이 완전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2. 악용(惡用) 하기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사람들을 소위 '내편' 으로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그들의 미래를 팔아먹을 수 있는 '목적론' 을 설파하는 것이다.

사람들 스스로, 그들만의 자력으로 찾아갈 수 있는 '모순' 을 '잘못된 것이다' 라고 개인/ 사회 정체성에 각인시키면 된다

창조론적 영생의 개념이든, 진화론적 진보의 개념이든 미래를 팔아먹을 수 있는 그 어느 것이든 말이다.
영생과 진보에는 '모순' 이 없다. 애초에 없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 과 '선형성' 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럴듯' 하다



생존, 경쟁, 승리 ... 이것들 모두 광기의 극에 달한 미래지향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미래를 쟁취한다 한들 그 역시 전치(dis-placed) 된 또다른 현재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현재' 뿐이기에.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산 현재는 과거라 불리우고
아직 살지 않았으나 누릴 수 있는 이용 가능한 현재는 미래라 불릴 뿐이다.
나의 '임종, 죽음' 이 머무를 수 있는 곳 또한, 그저 '미래의 이용 가능한 또다른 현재의 순간' 에 국한할 뿐이고.

한 생명의 한 주기를 제하고 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시공간이 잉여로 남는다, 이 잉여시공간은 일상적인 관점으로
한 생명의 기억과 인식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결국 인구에 '떡밥거리' 로 회자될 수밖에 없다.

소위 '역사', '화석', '데이타', '사주팔자' 따위의 자연의 기억, 추억, 확률에 의존해야 하는 '모험' 인 것이다.
이 '모험' 의 도구를 우린 '이성' 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성' 은 잉여시공간 사이에 샌드위치마냥 끼어버린 한 생명의 한 주기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나와 여러분들 모두에게

신학이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잉여시공간를 찾아 헤맸다면 과학 역시 탄생 이후와 죽음 이전 간의 accessible 한 현재 '들' 을
찾아 헤맬 뿐이다. 뭐가 다른가? 다만 잉여시공간보다야 비(非)-잉여시공간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accessible 하기에
신학보다는 과학이 소위 '보편적 인간성' 의 측면에서 설득력 넘치기는 하다.

그러나 역시 가공된 '또다른 현재' 에 불과한건 양자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성은 언제까지나 '모험' 의 도구에 불과하다. 모험하지 않으려는 생명에게 '이성' 이란 개념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유인원을 찾아가 그대에게는 '이성' 이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우문이다.

개념이란 순전히 '필요' 에 의해 추상된다. 그러니 개념의 대상이 창조된 것이냐 진화된 것이냐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바보들의 아우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필요' 에 의한 것이니 진화된 것이고 '추상'된 것이니 창조된 것이기도 할테니



p.s. : 어르신들이 왜 '정치' 에 그렇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시는지 감이옵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고방식까지도 알게모르게 '정치' 가 결정짓는것 같습니다

          북한주민들이/ 아프리카 난민들이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이딴 잉여놀이에 자신의 정력을 할애할지 ... ...
          왜 이렇게 껍질을 벗겨낼때마다 그동안 어눌하게 살아왔는지 제 자신이 한심하고 답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