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진리라는 단어를 어떤 식으로 쓰든 그것은 작가 맘이다. 선동적인 연설에서 진리라는 단어를 수사적으로 쓰는 것에도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 하지만 논문과 같은 글에서 진리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나는 진리라는 용어는 오직 과학의 교권에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과학의 교권은 과학뿐 아니라 수학과 과학 철학도 포함된다. 나의 용어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진리라는 용어는 오직 과학의 교권, 수학의 교권, 과학 철학의 교권에서만 써야 한다는 식으로 고쳐 표현하면 될 것이다.

 

 

 

나는 문명이 엄청나게 발달한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의 수학과 우리의 수학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의 발달 정도야 다를 수 있지만 그 근본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예컨대 외계인의 수학이 충분히 발달했다면 그들의 기하학도 우리의 기하학과 공리 체계가 사실상 같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한 직선 m과 그 직선 밖에 있는 점 A가 있다고 하자. 이때 A를 포함하며 m과 평행인 직선 n은 단 하나다라는 식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기하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Euclidean geometry)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한 직선 m과 그 직선 밖에 있는 점 A가 있다고 하자. 이때 A를 포함하며 m과 평행인 직선 n은 없다라는 식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기하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타원 기하학(Elliptic geometry)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한 직선 m과 그 직선 밖에 있는 점 A가 있다고 하자. 이때 A를 포함하며 m과 평행인 직선 n은 많다라는 식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기하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쌍곡 기하학(Hyperbolic geometry)이라고 부른다.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도 이름은 다르겠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꿈꾸었던 식으로 두 이론을 통합한 거대 이론을 완성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도 자연 선택 이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수학이나 과학의 이론을 진리 또는 진리에 근접한 것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외계인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의 도덕 공리는 우리의 도덕 공리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물론 외계 생물의 진화에도 친족 선택이나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가 적용될 것이기 때문에 양쪽 도덕 공리 체계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똑 같지는 않을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의 영역에서는 외계인과 우리의 이론이 똑 같거나 수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도덕 철학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기껏해야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도덕 철학의 교권이나 예술의 교권에서 진리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다.

 

 

 

비슷한 논리가 인류 내에서도 작동한다. 충분히 똑똑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충분히 오랜 기간 동안 토론을 한다면 과학의 교권에서는 동의에 이를 수 있다. 즉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양측이 모두 매우 똑똑하고 양심적이라 하더라도 동의에 이를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예컨대 매우 똑똑한 정신병질자가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히면서 토론에 임한다고 하자. 이 정신병질자와 비정신병질자와 도덕 철학의 영역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토론을 한다 하더라도 동의에 이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 진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진리 개념의 남용이다. 수학 공리는 진리지만 도덕 공리는 입장일 뿐이다. 과학의 교권에서는 우월과 열등을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즉 진리에 좀 더 가까운 이론이 진리에서 좀 더 먼 이론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의미가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뉴턴의 중력 이론보다 우월하다.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진리는 없고 입장만 있기 때문에 우열 또는 선악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서로 입장이 다를 뿐이다.

 

 

 

2010-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