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뉴에님과 관련해서 난삽하게 썼던 두 개의 글은 미뉴에님이 읽으셨던 대로, 난삽 그자체이긴 합니다. 왜 그렇게 글이 난삽하게 쓰여졌을까를 생각해보면, "상식이란 이름으로 완장질하지 마시라"라는 말을 차마 직설적으로 내뱉지 못해 입가에 맴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바로 이전 글을 쓰면서, 그 글을 마무리하면서, 제가 하고싶었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서는, "상식을 앞세워 완장질하지 마시라"라는 말을 쓰긴 했습니다.

미뉴에님의 친절한 글을 좀 더 일찍 들어와서 봤더라면, 좀 더 일찍 글을 올릴 수 있었는데, 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헤겔, 맑스, 그리고 라캉>에 달린 미뉴에님의 댓글을 보면서, 그리고 이어지는 댓글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게시판에서의 글쓰기의 위상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미뉴에님의 말씀대로, 이곳 아크로는 하나의 공론장입니다. 특정 분야의 학술 토론장이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이는 어떤 특정 분야가 언급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가 문제되는 한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미뉴에님이 지적했던 그 모든 것에 대해 저는 수긍을 하고, 수긍을 하는 그 만큼 제 자신이 정신분석학의 "고급 저자"이면서 동시에 제 자신의 글에 대한 "저급 독자"가 되어 지금까지 글을 써왔습니다. 그리하여, 글을 포스팅하기 전에 저는 "저급 독자"가 되어 제 자신의 글을 읽고 또 읽습니다. 이는 정신분석학 용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일상어를 쓰는 노력으로 나타나죠.

문제가 되는 <헤겔, 맑스, 그리고 라캉>으로 돌아가죠. 최초에 미뉴에님은 저의 그 글이 지닌 비논리성과 논리 비약을 문제삼으셨습니다. 저로서는 그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미뉴에님의 의견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맑스와 라캉을 모른다"는 님의 말씀에 저는 "라캉은 당연히 모르겠지만, 맑스는 잘 아시지 않느냐? 아는 분이 왜 그러시냐?"라고 대답했었죠. 그리고 제 글의 비논리성을 "마침내" 밝혀주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질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을 합니다. 미뉴에님이 말씀하셨듯이 이곳은 특정 분야의 학술 토론장은 아니지 않나요? 맑스 이래로 일상어가 되어버린 "소외(alienation)"라는 용어를 특별한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는 한, 미뉴에님이 아래의 글에서 전개하는 방식으로, 저의 <헤겔, 맑스, 그리고 라캉>이라는 글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기는 있는 건가요? 일상어가 되어 버린 "소외"를 굳이 전문가들의 "사투리"로 치환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이 과정에서 "소외"라는 개념어가 지니는 역사성이 퇴색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 미세한 결들이 묻혀버릴 수도 있겠죠.) 게다가, 미뉴에님이 권고한 바대로, <헤겔, 맑스, 그리고 라캉>이란 글을 전개했다면... 그 글은 맑스에 대한 글을 쓰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분량의 글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 글이 이곳 아크로에서 가능하기는 한가요? 가능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그런 글이 필요하기는 한가요? 그런 따분하기만 할 글을 누구더러 읽으라고 쓰겠습니까? 저는 그런 글은 쓰지 않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서 <헤겔, 맑스, 그리고 라캉>이란 글이 보충적으로 완결되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물론, 여전히 미완이기는 하겠죠. 미뉴에님이 맑스의 청년기 저작과 자본론 사이의 간극, 혹은 단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즉 소외론과 노동가치설(혹은 잉여가치설)사이의 간극과 단절이 바로, 제가 라캉을 설명하면서 말하려고 했던 것을 설명해 주네요. 즉, 소외론에 대입해 볼 수 있는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상징적 투쟁과 노동가치설에 대입해 볼 수 있는 실재적 투쟁이라고 말이죠. 이를 상상적 투쟁을 덧붙여 설명하면, 맑스가 노동자 계급의 기계파괴운동이라는 "상상적" 공격성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생산해낸 상품의 주인이 되기 보다는 그것의 노예가 되는 메커니즘인 노동소외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고, 급기야는 자본론에 와서, 노동소외론까지도 극복하는 잉여가치설을 주장하게 된다. 등등등... (물론, 아직도, 잉여가치를 둘러싼 실재적 투쟁이 무엇일지는 잘 모르겠고, 노동 소외와 어떻게 다를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뉴에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또한 제가 <헤겔, 맑스, 그리고 라캉>에서 언급했던 것입니다. 다만, 소외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했던 것은 아니고, 단지,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정치경제학과 맑스의 잉여가치설을 대비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글을 마무리했었죠. 저보다 맑스를 더 잘 아시는 미뉴에님 덕분에 제 글이 풍성해졌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이렇게 저는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계시"같은 것을 던져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제 글에 달린 댓글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겠구요. 심지어는 저는 제 자신이 쓴 글로부터 배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없이 억압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하는 댓글을 보면 제가 과민반응을 하기는 합니다. 이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셔도 되겠습니다.

사실, 어려운 이론적이기만한 글을 쓸 때도 있었네요. 불과 몇 꼭지에 지나지 않기는 하지만, 저에겐 이런 글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예를 들면,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란 개념을 비판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겠다 싶었던 이유도 있었고, 일상어로만 쓰인 글이 놓치는 어떤 논리적 구멍을 메꾸고자 하는 것도 있겠구 말이죠.

벌여놓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줏어 담는 것도 쉽지는 않겠네요. 차차 풀어가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