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80년대 후반에 공단 거리를 빨간 띠 두르고 누빌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저녁때 노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뒤풀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근처 민속주점 같은 식당에서 김치찌개 한그릇 안주삼아 동동주 마시면서 불온한 수다를 떨고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주인 아주머니가 푸짐한 안주를 갖다 주는게 아니겠습니까? 닭도리탕 같은 갑작스러운 고급 안주에 놀라서 무슨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식당에 손님으로 온 어느 사장님이 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아주머니가 가리킨 쪽을 봤더니 중년의 남자 서너분이 술을 마시고 있더라구요.

우리가 일제히 돌아보자 그 중의 한 분께서 '개의치말고 먹으라'는 손짓을 하더군요. 그래서 모임의 리더급이었던 제가 공손하게 그 자리에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분들 보기에 젊은이들이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고, 안주가 너무 부실하길래 조금 형편이 나은 자기들이 대접하는거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러다 합석을 해서 술 몇잔을 얻어 마셨는데, 서로 김사장 박사장 부르는 호칭이 자영업이나 조그만 영세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들 같았고 걸죽한 호남사투리에 평민당을 지지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김대중 총재를 정말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고, 우리같은 좌파 빨갱이(?)스런 사람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바로 난닝구라고 부르는 분들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자리에서 공짜 안주 대접 받던 이들 중 어떤 사람은 그래봐야 니네들 역시 사장님들 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테고, 어떤 사람은 '난닝구들이 정당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을 테고, 그래도 그 분들이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세운 공이 크니 미워하지는 말자는 사람도 있을테지요. 그렇게 각기 찢어져 서로 손가락질하고 증오하고 '니네가 한나라당보다 더 나쁜 새끼들이야'를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군요.

그날 식당 술자리 끝판 쯤에는, 그분들이 우리 자리에 합석해서 노래도 부르고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 분들은 우리가 부르는 노동가요들은 물론 아침이슬도 생소한 눈치였고, 자기들 순서가 되면 구성진 뽕짝을 부르시더군요^^ 그래도 서로가 모두 동지라는 한마음이었습니다.

오늘 갑자기 아련한 추억이 되버린 그날의 술자리가 떠오르네요. 이제는 서로 너무나 멀어진 사람들을 위해 술이나 한잔 해야겠어요.
그나저나 그 난닝구 사장님들 아직도 무탈하게 잘 계신지 궁금해지는군요. 아마도 이제는 완연한 노인들이 되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