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ttered with. SexyDolphin


Foucault's Turn (부제 : 촘스키의 창의성은 현상적 창의성(Creativity) 으로서
본체적 창의성(Originality) 을 희생시킨 댓가에 불과하다)

7-1. Mr. Chomsky has been fighting against linguistic behaviourism, which attributed almost nothing to the creativity of the speaking subject
촘스키 씨는 언어의 주체가 (Human Nature 를 통해) 부여받는다는 '창의성' 과, 사실상 별 연관 없는 언어 행동주의에 반기를 들어왔다


(문맥상, 촘스키가 언어가 행동을 규정한다는 결정론적 사고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킬 야망(?) 을 발산하는 도구로써 'Human Nature' 에 그토록 애착을 넘어선 집착을 보임을 알 수 있었다ㅋㅋㅋ)

The history of knowledge has tried for a long time to obey two claims. One is the claim of attribution: each discovery should not only be situated and dated, but should also be attributed to someone; it should have an inventor and someone responsible for it. General or collective phenomena on the other hand, those which by definition can't be "attributed", are normally devalued: they are still traditionally described through words like 'tradition', 'mentality', 'modes; and one lets them play the negative role of a brake in relation to the 'originality' of the inventor. In brief, this has to do with the principle of the sovereignty of the subject applied to the history of knowledge

지식은 역사 속에서 다음의 두 가지 원리에 충실해왔다. 그 중 하나는 귀속의 원리다. 각각의 발견에는 공간적, 시간적 그리고 발견자의 총, 3 요소의 발견에 대한 배치적 귀속이 이루어진다. 반면 이로 인해, 상기 3 요소의 배치적 귀속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시시콜콜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그 현상이 분명 발견됨에도 불구하여 귀속의 권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근거로 묵살되고 만다. 이는 '전통', '사조', '관점' 이라는 진부한 표현들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리는데 이 뒤안길로부터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현상적 혁명가가 으레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이 혁명가는 본체적 발명가의 본체적 창의성에 제동을 걸며 '신지식' 이라는 교묘함으로 새로운 시대를 가공하여 그 시대 만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만끽한다


7-2. The other claim is that which no longer allows us to save the subject, but the truth: so that it won't be compromised by history, it is necessary not that the truth constitutes itself in history, but only that it reveals itself in it; hidden to men's eyes, provisionally in-accessible, sitting in the shadows, it will wait to be un-veiled. The history of truth would be essentially its delay, its fall or the disappearance of the obstacles which have impeded it until now from coming to light
다른 또 하나는 (귀속의 불평등적 권능으로 인해 출세한) 그 혁명가를 시대의 착각으로부터 구원하진 못하지만 그가 간과한 진리에 대한 재발견은 본디, 진리라 함이 시대와 타협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가설적으로 정의됨에 비추어 볼 때,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또다른 혁명가의 또다른 교묘함으로 둔갑하여 등장함의 원리이다. 귀속의 불평등적 권능은 역사의 한 페이지 동안, 진리에 대한 장벽을 두텁게 가로막는데 이후의 또다른 현상적 혁명가에 의해 그 가로막힌 두터운 장벽이 파헤쳐지는 과정 속에서 본체적 창의성을 드러내려는 찰나, 그는 이내 또다른 교묘함의 진리로 '새 시대' 의 영광을 차지하며 또다른 현상적 창의성의 그늘 속에 동시대를 가두고 만다


(문맥상, 푸코는 진리에 대해 새삼스럽게 '진보와 혁명' 이라는 교묘함으로 역사를 가공해낸 '신지식' 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역학에 대해 회의하고 있으며 촘스키 스스로 Human Nature 라는 '미래지향적' 인 개념으로써, 이러한 교묘함의 늪에 이미 빠져듬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을 경계한다. 따라서 진보와 혁명이라 함이 '괴짜적 positioning' 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여 그 혁명가에게 모종의 로맨티시즘을 부여한다고도 경계한다)



보수나 진보나 권력을 통해 시대에 족적 한방 찍어보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 똥묻은개 겨묻은개 나무람의 취지의, 일전의 글입니다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119045



7-3. And what if understanding the relation of the subject to the truth, were just an effect of knowledge? What if understanding were a complex, multiple, non-individual formation, not "subjected to the subject", which produced effects of truth? One should then put forward positively this entire dimension which the history of science has negativised;

혹시 현상적 혁명가와 진리 간의 독점적 관계가 '지식 탄생' 의 필연성으로부터 기인하지 않을까? 혹시 개인의 혁명가와 달리, 다원화된 전체와 진리 간의 소외적 관계가 '진리에 대한 희망' 의 필연성으로부터 기인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과학이 부정해온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 나(푸코) 는 다루려한다


analyse the productive capacity of knowledge as a collective practice; and consequently replace individuals and their "knowledge" in the development of a knowledge which at a given moment functions according to certain rules which one can register and describe

(과학은) 지식의 소용성을 다원화된 전체의 '합의 가능한 공공성' 에 바탕을 두어 분석해 왔는데, 이러한 과학의 역사성에 비추어봤을 때 특정 시대가 도래한 때마다 그에 걸맞는 해석방식의 '신지식' 을 '과학' 이라는 교묘함으로, 종전의 '구지식' 을 대체/ 교체해왔을 뿐이다
 

In any case, what I am anxious about is substituting transformations of the understanding for the history of the discoveries of knowledge

나(푸코) 가 회의하는 바는 상기의 '지식의 세대교체' 가 (촘스키의 바람대로 창의성 다운 창의성에 근거하지 않은 채) 그저 역사의 페이지가 어떻게든 잉크로 빽빽이 채워지길 구하는 차원에서의 '가공된 신화' 로 추락함에 대한 염려다


7-4. Therefore I have, in appearance at least, a completely different attitude to Mr. Chomsky apropos creativity, because for me it is a matter of effacing the dilemma of the knowing subject, while for him it is a matter of allowing the dilemma of the speaking subject to re-appear
따라서, 나(푸코) 가 다루려는 것은 그 신지식의 현상적 혁명가로부터 벗어나려는 데서 발생하는 딜레마이며 당신(촘스키) 이 다루려는 것은 그 신지식의 현상적 혁명가 족보 상의 다음 선수를 찾아내려는 데서 발생하는 딜레마이다


And this transformation is far from a negative phenomenon: it is the suppression of a negativity, the effacement of an obstacle, the disappearance of prejudices, the abandonment of old myths, the retreat of irrational beliefs, and access finally freed to experience and to reason: it represents the application of an entirely new grille, with its choices and exclusions: a new play with its own rules, decisions and limitations, with its own inner logic, its parameters and its blind alleys, all of which lead to the modification of the point of origin
그러나 그러한 '가공된 신화' 가 반드시 부정적이라 치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종전의 부작용, 종전의 장애물, 종전의 선입견 그리고 낡아빠진 신화, 비이성적 믿음 따위 등에서 벗어나, 새로운 규칙, 새로운 명제, 새로운 조건, 새로운 논리, 새로운 변수, 새로운 지름길을 통해 종전의 시대에선 누리지 못했던 자유로운 경험과 신선한 사고에 접근하려는 그러나 실은, 본체적 창의성의 그저 또다른 변용 즉, 그저 또다른 현상적 창의성으로 판을 옮아가는데 불과한 또하나의 '그럴듯한' 혁명일테니
 

(문맥상, 푸코는 지식의 역사를 연구하고자 한다면 우선적으로, 지식 패러다임의 혁명 전후를 기점으로 한 두, 종전[從前] 과 시후[始後]를 규정하는 시대정신부터 파악해야 할 자세를 갖추라 주문한다. 이는 은연 중 촘스키 스스로 Human Nature 라는 촘스키 만의 개념이 결여한 자발적인 시대정신/ 역사인식을 책임[accountable] 질 것을 촘스키에게 implicitly burdening 하고 있다


또한 푸코는, 촘스키 스스로 'Human Nature' 에 품는 '창의성' 의 부푼 기대에 대해서, 그 어느 역사적 지성인들의 창의성이 아닌 촘스키 만의 신개념을 철저히 마련하여, 촘스키가 그토록 꿈꿔온 언어학적 혁명/ 진보를 성공해 낼 것을 바라여 격려하고 있다)



Ref 1 :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108763&contentno=108763
Ref 2 : http://theacro.com/zbxe/?mid=BulletinBoard2009&search_target=user_id&search_keyword=sexydolphin&document_srl=131204

응용해석 : 만약 야생에 홀로 남겨진 인간아이가 도식적 체계를 통해 야생 짐승의 언어를,
                   (짐승 아이가 자신의 언어를 제 3자적 인식으로써 인식하지 못하는 기정 사실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서 야생 짐승의 언어에 대해 제 3자적 인식을 훌륭히 수행해 낸다면
                   이는 인간의 짐승에 대한 깔끔한 진화적 연속성을 확보해 줄 것입니다

                   Ref 1 에 달아놓은 글은 '아베롱의 야생아' 에 대한 정보인데요,
                   '물' '마(엄마)' 라는 단어 인식 그리고 필요에 의한 능동적 발화에서 더이상의 발달을 관찰하지 못한 점에서

                   전 야생아는 야생 짐승의 언어에 대해 제 3자적 인식을 하지 못했다 판단합니다
                   제 3자적 인식을 해냈다면 인간 성인과 같이 모어(야생 짐승 언어) 와 외국어(프랑스어) 를 구분할 수 있었을것이며 따라서,
                   평균 IQ의 인간 성인과 같이 '물', '마' 그 이상의 언어를 구사했을 것이라는 전개가 예상됨에 근거합니다
 
                   만약, 야생아가 야생 짐승의 언어에 대해 제 3자적 인식을 해냈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인간의 짐승에 대한 깔끔한 진화적 연속성으로써

                   상황을 비약하면
                   인간은 어느 야생에 내버려두어도 언제든 문명/문화 사회의 노력에 의하여 
                   인간 사회로 복귀/ 인간 언어에 대한 초법적인 구사를 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즉, 인간의 유전자적 능력에 언어에 대한 초법적인 적응 능력이 진화를 통해 코딩되어 있다 판단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이를 '진화의 연속성' 에 근거를 두는 것은 진화의 산물이라 합의되기 위해서는
                    어느 환경에 두어도 그 형질이 드러나야 한다는 데에서 근거를 둡니다)



                    촘스키가 자신의 언어학적 성과를 Human Nature 라는 미래지향적인 개념에 연결지었다는 데에서만큼은
                    천재적인 직관을 발휘했다고 평가하는데 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간의 진화론이 외모, 신체와 같은 가시적인 형질들에만 주목해왔다는 점에서
                    언어와 같이 가시적인 형질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들은
                    촘스키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의 진화가 아니라,

                    또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진화(제 상상입니다 ㅋㅋ) 아니면 정말 creator 에 의한 피조물 또는,
                    이 우주가 우주 외계의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에 불과한 게임일 수도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p.s. : 학기 초라 여유가 많아 아직은 포스팅을 넉넉히 하게 되었습니다만,
          앞으로 바빠질터라 한창 빠져버린 외도짓을 당분간은 못하게 될것 같습니다

          확실한건 minue622, 피노키오, 참사랑 님들 덕분에
          제 인생에 또다른 경험을 시도해볼 기회를 찾았다는 겁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