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다 보면, 모택동과의 인터뷰중에 눈에 띄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모택동과 홍군은 막 대장정을 끝내고 연안을 공략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인터뷰중 모택동은 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고, 애드거 스노우의 설명이 끝난 뒤에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모든 국민들에게 평등과 비밀이 보장되는 선거권이 주어진다는데, 왜 노동계급의 정당이 집권하지 못하는거요?"
애드거 스노우가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해주었는지는 책에 기술하지 않았지만, 모택동은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였으며 그 궁금증이 끝내 해소되지는 않은 것 같다라고 썼다.

당연히 모택동이 이해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소수의 압제에 다수가 고통에 신음하는 사회였으므로,  비밀이 보장되는 평등선거가 실시된다면 당장에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너무도 뻔한 논리적 귀결로 여겨졌을 것이다. 목숨을 건 대장정까지 벌이고, 장개석군대에 맞서 영웅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는 홍군들에게 둘러싸인 그에게, 아무런 물리적 폭력이나 강압이 없는 자유 선거에서 미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본가계급의 정당에게 투표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그런 몰이해가 이후 중국에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비극을 만들어내고, 그에게서 사회주의 건설 원리와 유격전을 전수받은 김일성이 한반도의 북쪽을 현재와 같은 안습 국가로 만들어버릴 줄 당시의 그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어쨋든 이 에피소드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어떤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 것은 10월 혁명에 성공한 레닌의 볼셰비키가 자신만만하게 치렀던 첫 선거에서 패배한 뒤 일당독재노선으로 급선회했던 사실과, 그 후 대부분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통 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시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에서 진보정당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는 이토록 노동자들을 위해, 민중을 위해 모든 애정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왜 그들은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가?"를 늘 화두처럼 삼는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물론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는 그 이유를 매우 단순명쾌하게 설명한다. 그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당했기 때문이다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한국의 노동자와 농민, 즉 대다수 서민들이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착각하고서 투표할 정도로 멍청할까? 빛의 속도로 정보가 교환되고, 맑스의 공산당선언을 강남의 부유층 아이들조차 논술교재로 삼아 줄줄 외우다시피한다는 이 시대에?

이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이라는 생물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굳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나 에드워드 윌슨의 '유전적 경로'와 같은 신다윈주의의 개념들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기 유전자의 성공적인 복제를 위한 생존 기계라는 것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도만 이해하면 된다.

이러한 생물의 삶의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자급자족하면서 타 개체들과 양육강식의 경쟁을 하거나, 분업을 통한 협동 즉 사회를 구성하여 참여하거나. 선택의 기준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계에서 어떤 방식이 복제와 생존에 더 효과적인가이다. 인간은 그중에서 사회적인 삶을 선택했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적 협동을 통해 다음과 같은 보상을 얻기를 원한다. 첫째로 생존과 번식이라는 속성이 충족되기를 바라고, 협동 참여의 댓가로 분배받는 보상이 보다 더 큰 것이기를 원한다. 각 구성원의 이런 특성들의 타협과 균형의 결과물을 우리는 공정성, 도덕, 법률, 문화 혹은 종합하여 체제라고 부른다. 인간 사회의 역사란 언제나 그 최적의 타협과 균형을 찾기 위한 지난한 노력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럼 처음의 제목으로 돌아가서, 왜 진보정당의 지지율은 지지부진하는가? 왜 서민들은 진보정당들의 끈덕진 구애와 노력들을 차갑게 외면하고 배신하는가? 물론 그것은 현상적으로 한국 사회가 아직도 반공주의, 지역주의 같은 봉건적 유습들을 해소하지 못했고, 미국이라는 패권에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된 사회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협동 참여의 댓가로 분배받는 보상이 보다 더 큰 것이기를 바라는 인간의 이기적인 근본 속성을 진보정당들이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이기주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두 가지를 지향한다. 하나는 협동의 결과물인 파이가 더 커져서 보상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쪽의 지향이다. 우리는 이런 지향을 바로 우파적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파이의 크기에 비례한 보상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작지 않는 한 얼마간의 불평등도 참아 줄 수 있을 정도로 영악한 동물이다. 또 다른 하나는 파이의 크기에 비례한 보상이 각 구성원들의 타협에 의해 허용될 수 있는 최대치의 평균에 근접하기를 바라는 쪽의 지향이다. 우리는 이런 지향을 또한 좌파적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늘 이 두개의 지향 사이에서 유리한 선택을 찾아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투표장의 기표 종이 앞에서도 작동한다. 거기에 그 사회의 역사적 경로와 각 개인의 가치관과 경험, 직업, 재산, 출신지, 성별, 나이같은 부차적 조건까지 더해져서 인간의 투표 심리는 그야말로 복잡하기 이를데 없다. 따라서 인간이 조직할 수 있는 가장 능력있는 정당은 파이도 잘 키우고, 보상도 최대치에 근접하도록 만들어주며, 각 개인마다 다른 부차적 조건들의 평균까지 맞추어 줄 수 있는 정당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슈퍼 정당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들다.

그럼 한국의 진보정당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앞서까지 진행된 필자의 주장을 이해했다면 그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파이를 키우는 것은 한나라당에게, 보상의 최대 평균은 민주당에게 포지션을 빼앗기고 거기에 반공주의라는 역사적 핸디캡마저 짊어지고서 그 흔한 지역 기반조차 없다. 그저 대규모 공단 지역의 조직화된 노동자들과 일부 교육받은 지식층의 좌파적 가치관만이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다. 따라서 박찬호의 방어율 근처에서 맴도는 진보정당의 지지율과 득표율은 괜히 그러는게 아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과 자욱한 안개뿐이다. 그러나 그 먼 길을 굳이 가야겠다면, 일단 방향이라도 잘 잡아야 한다. 그런데 그 방향은 과연 어디일까?

19세기와 20세기 초, 맑스주의가 주목받았던 것은 그가 결과의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은 자본주의보다 더 큰 파이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더 높은 보상의 최대 평균을 구현할 수 있는 슈퍼 정당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맑스는 급진적인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무책임한 사상들을 비난한 적이 더 많았다. 그에게 결과의 평등이란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저절로 딸려오는 그런 개념이었지 의도적으로 설계하여 만들어내야 하는 어떤 목적성을 띤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사유재산의 폐지 역시 그런 차원에서 주장된 것이지 결과의 평등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음을 맑스주의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기초일 뿐이다. 단지 그가 몰랐던 것은 민주주의와 인간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한 자본주의의 적응력이었고 그게 맑스주의가 초래한 비극의 원인이었다.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진보정당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다른게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슈퍼 정당으로 변신하는 길 밖에는 없다. 그 앞에 진보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싶다면 더더욱 그래야한다. 더 큰 파이와 더 높은 최대 평균이라는 양쪽의 갈래를 모두 움켜 잡아야만 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폭력 혁명과 일당 독재와 같은 맑스와 그 제자들의 낡은 개념들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지워버려야 하며, 그들이 미처 몰랐던 민주주의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슈퍼 정당의 비전과 강령을 제시해야 한다. 이거 못하면 차라리 문닫고 각자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더 크게 봉사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진보진영의 새로운 담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성장친화형 진보' 는 매우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물론 필자는 그 책의 전체적인 주장에 아직 선뜻 동의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매우 전향적이고 유의미한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현재 민주당의 레벨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토론에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쪽에서도 달려들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또한 브라질의 룰라 정부가 현재 시행하고 있고, 한국의 사회당에서 야심차게 제기하고 있는 '기본소득'  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 몽상같은 시도가 그저 뻔한 인도주의 정신의 발현이 아니라, 경제 성장의 추동까지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려고 한다. 

이제 성장과 평등을 동시에, 이전의 그 어떤 정당보다 더 훌륭하게 구현할 수 있고, 그래서 약자에 대한 인간 사회의 예의도 넉넉하게 가능한 슈퍼 정당을 고민해보자. 정규직 노동자든 비정규직 노동자이든, 농민이든 도시의 서민들이든, 학생이든 양심적인 지식인이든 그 누구든지 맘껏 지지해도 좋을 그런 정당이 하루 빨리 출현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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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 블로그인 http://progress21.egloos.com/ 에 올린 글을 복사해서 올린 글입니다. 며칠전에 새로 만든 블로그이니 뭐 방문하셔도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