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엔가 이명박 정부때부터 지금까지 6.25 납북자 신고를 하라는 플랭카드가 주민자치 센타에 나붙었다.

그것을 보고 도데체 저런 지시를 하는 인간이나 정부는 뇌구조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반공을 내걸고 집권한 보수 정부가 최소한 김영삼때까지 50년이었는데 그동안 뭐하다 이제 납북된 사람들 다 죽게 된 시점에서 저런 조사나 신고를 받는 것일까?

그리고 그동안 납북된 사람들의 가족이 연좌제로 빨갱이로 의심 받아 공직 진출이나 여러부분에서 불이익을 받고 숨죽이고 살아왔던 세월을 모르는 듯 천연덕 스럽게 신고를 받는다는 것일까?


그리고 신고 받아서 뭐하려고?

정부가 보상해주려고? 천만에 일것이다

그러면 왜 다 잊어가고 죽어버린 사람들을 신고 받는다는 것일까?

내 머리로는 그들의 엄청난 속셈을 알길이 없다, 겨우 생각해낸 것이 북한하고 회담할 때 압박용정도일까?

아니면 국민들에게 상기하자 6.25정도의 효과 ?  그러나 어느 멍청한 인간이 이제와서 신고를 할까?



우리나라 소위 보수라는 사람들은 보수도 아니고 나찌당이나 공산당 같은 무뇌아들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왜냐하면 사실 관계나 인류 보편의 상식이나 인권은 도외시한 맹목적인 생존욕구만으로 또는 야만적인 승자의 관점에서만 모든것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금만 살펴보고 올바른 가치판단을 한다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거나 자신이 알고있던 것이 사실과 다른바가 밝혀졌어도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인간들을 볼 때 참으로 야만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욱 소위 고등교육을 받고 많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일 수록 더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또 웃기는 것은 이런 부류들이 같은 짓거리를 한 일본군이나  히틀러나 스탈린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하고 비판한 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고 이것은 남한의 주사파들이 남한 군사정부나 공안기구들이 폭압통치에는 반발하고 비난하면서 그보다 백배 더 악랄한 북한의 독재와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침묵을 떠나서 오히려 찬양하고 추종하며 옹호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아래 국민 방위군 사건을 축소하고 간첩소행으로 몰려했고 진상이 밝혀진 뒤에도 마음아파하거나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죄한 적이 없다는 점이나 전쟁 발발 직후 원수의 나라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우려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런 인간을 국부라고 추앙하며 평가하는 인간들의 사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래 글은 프레시안의 서중석 교수의 인터뷰 자료와 기타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1996년 4월 14일자 <연합뉴스>를 포함한 국내 언론들이 일본 교도통신을 인용해서 보도한 바와 같이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이미 일본 망명 계획을 세웠다. 

교도통신이 제시한 자료는 전 야마구치현 지사이자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 

·일 양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 자료들에 따르면, 6월 27일 새벽에 수원 천도를 결정할 때에 이승만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서울이 함락된 것은 6월 28일이었다이승만은 서울이 함락되기도 전에 일본 망명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이승만이 심리적 공황 상태였다는 점은 존 무치오 대사가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외교관계>에 수록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존 무치오 대사는 "한국 지도부는 절망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내각은 망명정부가 되어 일본으로 이동하는 가능성에 대해 문의해왔다"고 보고했다.

  

미국을 통해 이승만의 의향을 전해들은 일본 정부는 자국 땅에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우는 준비에 착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싸우던 일본이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차려줄 준비를 했던 것이다망명정부의 기지로 예정된 곳은 한국과 가까운 야마구치현이었다.

야마구치현은 일본 본토와 규슈섬의 경계 지역이다일본은 이곳에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1. 북한의 침공


이 전 대통령은 19492월경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특히 19499-10월부터는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면 북한이 쳐들어올 것에도 대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부분의 전사 연구가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이 병력면에서 약간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아주 많았던 걸로 보진 않는다.

전투에 투입될 수 있던 인원을 이것저것 다 합쳐도 북한군은 20만 명을 못 넘었다. 남한의 전투 병력을 보면, 육군은 9만 명을 약간 넘었다. 경찰을 비롯한 다른 병력을 다 합쳤을 때 1416만 정도로 잡는다. 



 

북한이 자주포라든가 전차, 야크기를 갖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렇게까지 우세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과 하천이 많기 때문에 시설만 제대로 해놓으면 방어하기가 좋은 면이 있다. 그런데 방어 시설을 잘 갖췄나? 이런 데서도 문제가 있다.

실제로 춘천의 6사단은 북한군 3개사단을 미리 준비한 덕분에 신속하게 방어하고 3일간 막으면서 아군 200여명의 피해에 적 6700명의 사상자를 낼 만큼 효과적인 전투를 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장병의 3분의 1이 휴가 상태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을 해가지고 주요 장교들은 술에 흥청망청 녹초가 된 채 일요일을 맞이한 걸로 돼 있다.

전장병의 3분1이 동시에 휴가나 외박나갔다는건 전세계 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고 이건 반공인사로 포장된 군 수뇌부나 정부 고위직에 북한과 내통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 38도선 부근에서 심심하면 국지적 충돌이 일어나던 때인데 말이다



 

그것 말고도 군 일부에서 '대전차 방어 시설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제대로 안 했다. 전쟁 직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곧 쳐들어올 거란 얘기까지 했다. 그랬는데도, 대비했다고 볼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지금도 북한의 열배가 넘는 국방비를 20년 이상 쓰고도 북한에게 밀린다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인간들이 우리 육군 수뇌부들이다



특히 사단장 교체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요 사단장을 교체했다. 전쟁 초기에 사단장의 힘이라는 건 아주 중요한 거다. 사단이 제대로 살아남느냐, 뿔뿔이 흩어져버리느냐 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인사 정책은 오직 자신에 대한 충성과 아부가 기준이었다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군 경력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다만 영국 상선의 선장은 했다.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할 때 이 사람은 국회에 나와 '5000톤 배 하나 주면 공산당을 다 치고 바다를 다 치겠다'는 호언장담까지 했다. 또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 그 전엔 내무부 장관을 맡겼고, 1950년 들어서는 국무총리 서리에 앉혔다. 신성모 같은 사람이 요직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낙루(落淚)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 노인네가 하문(下問)을 하면, 그 당시엔 하문이라고 했는데, 신성모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런 '낙루 장관', '지당(至當) 장관'이 많았다. 대통령이 방귀를 뀌니까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첨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하여튼 이 전 대통령은 군에 대해선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낙루 장관'을 국방부 장관에 2년 넘게 앉혀 놓았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해임하지 않았다. 1951년 들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하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국회에서도 세게 나오고 그러니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신성모 장관을 해임했다. 그러고 나서 또 요직인 일본 주재 대사를 시켰다.




 

총참모장 채병덕도 마찬가지였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데, 일제 때 야전군을 맡아본 적이 없다. 후방 일을 해서 작전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채병덕도 신성모 못지않게 이승만 개인에 대한 충성파였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김구 암살 사건에도 연루돼 있다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인물이다.

 



채병덕은 1949년에 총참모장이 됐다가 몇 달 후 '북어 사건'으로 해임됐다. 당시 38선에선 남북 간 물물 교환이 많았다. 그걸 장교들이 얻어 쓰기도 하고 군에서 필요한 비용으로도 쓴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북어 사건이 터졌는데, 사단장이던 김석원이 '채병덕 총참모장이 북한과 물물 거래를 하는 데 관여한 것 아니냐'고 맹렬히 공격하고 대통령에게 항의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통령은 채병덕과 김석원, 두 사람 다 물러나게 했다. 194910, 채병덕은 그렇게 해임되고 예편됐다. 그런데 두 달 후, 대통령이 채병덕을 현역으로 복귀시켰다. 하필이면 전쟁 나기 두 달 전인 19504월에는 다시 총참모장을 시켰다.


전쟁발발 후 이승만의 도피


 바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거다. 전쟁 수행을 위해 풀어야 할 문제가 굉장히 많고 국민들에게 해야 할 조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625일 일요일 당일엔 국무회의 같지도 않은 국무회의, '간담회'라고도 불리는데 그걸 열었을 뿐이다. 거기서 서로 잡담 비슷한 걸 한 걸로 돼 있지, 대책다운 대책을 논의하거나 세운 게 없다.

 


대통령은 6대 독자라 그런지 자기 목숨을 굉장히 중시했던 분 같다. 그날(625) 밤이 되니까 불안해졌는지, 피신하겠다고 했다. 존 무초 초대 주한 미국 대사가 오니까 무초 대사에게 '피신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 아느냐, 내가 없으면 이 나라 큰일 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무초 대사가 오히려 말렸다. '당신이 피신하면 군은 붕괴한다. 모든 방어 능력을 상실한다. 당신이 지켜야 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주겠다'. 그래서 그날은 이 노인네가 안 움직였다.


 

그다음 날은 월요일이니까 제대로 된 국무회의도 열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전황을 정확히 알리는) 방송이라도 했어야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 진주만 기습 사건이 나니까, 미국 사람들을 단결하게 하는 연설을 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으면 이 전 대통령도 국가 원수로서 국민한테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어떻게 해나가겠다' 하는 중요한 연설을 바로 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성모 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헛소리를 했다. 그러자 626일 밤에 열린 심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수원 천도 결정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627일 새벽 2-3시경 서울역에 비상 열차를 세워놓고 거기 타버렸다. 서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안 하고 혼자 가버렸다. 비밀이 새 나갈까 걱정돼서 그랬는진 몰라도, 다른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하고 비서진한테만 얘기해서 그 열차를 끌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서중석 : 그렇다. 대전에서 대통령이 방송국 책임자를 불러 자기 말을 전국 방송으로 내보내게 했다. 거기서 녹음한 거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627일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몇 차례 내보냈다.

 


하지만 이미 그땐 미아리 근처에서 쿵쾅거리고 있었다. 인민군이 거기까지 내려온 거다. 오죽하면 '이 방송, 이대로 안 된다'고 해서 27일 자정쯤 방송국에서 꺼버렸겠나. 전쟁이 나고 나서 처음으로 나간 대통령의 방송이 그랬다. 대통령이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없었다.

 


그 직후인 628일 새벽 230분에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 윗선에서 지시한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피란을 못 갔다. (그런데) 대통령은 대전에 가서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하다가 71일에 또 피신했다. 대전이 함락되는 건 720일이다.



7월 1일 새벽 3시에 이번엔 대구 쪽으로 가면 게릴라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호남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그러고 나서 목포에서 또 배로 부산까지 갔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은 전쟁 났을 때 피신만 하고 다녔다.



 대통령은 628일에 비상조치령을 내렸다. 긴급 명령 제1호인데, 굉장한 엄벌주의였다. 2, 3심을 거치지 않고 단심 재판으로 증거 없이 처단하고 중형을 부과할 수 있게끔 했다. 이것 때문에 부역자들이 참 많이 죽었다.

 


그에 더해 6월말 이후, 대개 7월 초에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이 시작돼 8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또 형무소에서도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거창, 산청, 함양, 남원, 영광, 함평 같은 지역에서 11사단을 비롯한 국군에 의한 큰 규모의 학살도 일어난다. 이런 것도 최종 책임은 대통령한테 갈 수 있다. 대통령이 어떻게든지 관민을 화합하게 하지 않고 엄격주의, 처벌주의로 간 것이다. 대규모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서중석 : 국회는 (인권 유린을 막고자) 굉장한 노력을 한다. 사형(私刑)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관한 개정 법률안, 뒤이어 폐지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 식으로 국회랑 사사건건 맞서다가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는 거다.

 


 이 전 대통령은 권력을 강화하고 영구 집권을 꾀하기 위한 정치 파동만 일으키고 있었다.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에 이어 1951년 하반기에도 국회와 밀고 당기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다가 이 전 대통령은 도저히 국회에서는 대통령으로 재선될 것 같지 않으니까 직선제 헌법 개정안을 내놓는데, 19521월에 참패했다. 19, 143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표차로 부결됐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을 동원하고 관제 민의를 만들어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았다. 그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대통령이 그런 난세 중의 난세를 초래한 것이다. 거기다 계엄령 해제를 국회에서 결정하면 대통령은 바로 집행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 그거 헌법 위반이다.

 

이렇게 부산 정치 파동 과정에서 위헌·위법을 이승만 정부가 너무나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런 속에서 195274일 발췌 개헌을 해가지고 영구 집권을 위한 초석을 닦았다.


 

그러고 있으면서 과연 전쟁 수행을 제대로 했겠나. 전선에선 사람들이 피 흘리고 있는데 (임시 수도) 부산에선 정부가 이렇게 위헌적인 행위를 장기간에 걸쳐 했다는 건 참 수치스런 일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전략 같은 건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지켜주던 나라 아닌가. 미국은 자발적으로 앞장섰다. 무초 미국 대사가 바로 본국에 보고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국이) 이 전 대통령 말을 듣고 참전한 게 아니다. 자기들의 세계 전략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제를 보면, 정전협정 체결 후 한국에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는 건 미국으로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연출이긴 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아주 세게 주장한 것도 조약 체결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조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쪽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조약엔 북한이 쳐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승만식) 북진 통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한국의 행정 관리 아래 있다고 미국이 인정한 영토에 대한 무력 공격에 대해서만 한국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북한이 한국을 공격했을 때는 조약이 적용되지만 반대의 경우엔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 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전쟁이 나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즉각 개입하도록 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도 그간 끊임없이 나왔다. 북한이 침략할 경우 미국이 일정한 절차를 밟아 개입하도록 돼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