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의 여성 혐오 문제와 관련하여 내 생각을 재정리해보겠다.

 

 

 

1. 일상적 대화에서 또는 일베의 행태를 고발하는 신문 기사에서 “여성 혐오”와 “여성 비하”를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일베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면 개념을 되도록 명확히 구분해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성 혐오”는 여자 자체 또는 여성성 자체 또는 여자 전체(또는 사실상 전체)를 싫어하는 것이다. 반면 “여성 비하”는 여자를 깔보는 것으로 지위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혐오”와 “비하”의 사전적 의미에 부합한다.

 

겁나게 싸움을 잘 하고, 배짱 좋고, 똑똑하고, 잘 생겼지만 인간성이 겁나게 더러운 조폭 두목을 깔보지 않으면서 혐오할 수 있다. 처자식을 매우 사랑해서 처자식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걸 준비가 되어 있지만 “남자는 하늘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남편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남편은 아내를 깔보지만 아내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식으로 혐오와 비하는 염연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물론 어떤 학자가 “여성 혐오”와 “여성 비하”를 동의어로 쓰겠다고 우긴다면 그 학자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념은 정의하기 나름이며 과학자가 꼭 사전적 의미에 부합하게 용어를 정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되도록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일관성 있게 쓰기만 한다면 큰 문제가 아니다.

 

 

 

2. 일부 여성에 대한 혐오 또는 특정한 유형의 여성에 대한 혐오를 두고 여성 혐오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 일부라는 것이 99%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어떤 여자 여성주의자가 “나는 가부장적인 남자가 싫다”라고 말한다면 가부장적인 남자를 혐오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성 혐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여자가 “이 세상 (거의) 모든 남자는 가부장적이다”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어떤 일베 회원이 “나는 김치녀가 싫다”라고 말하면서 김치녀에 대해 온갖 모욕적인 말을 쏟아낸다는 사실 자체만 두고 여성 혐오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 회원이 “한국의 (거의) 모든 여자는 김치녀다”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3. 상대를 주로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 곧 혐오 또는 비하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남자 동성애자들이 게이 바에서 생판 처음 만나서 서로 어느 정도 존중해 주면서 섹스를 즐기지만 우정도 사랑도 추구하지 않고 곧바로 헤어지는 일이 꽤 있는 것 같다. 이 때 상대를 주로 성적 대상으로 보지만 혐오도 비하도 아니다.

 

따라서 여성 혐오, 여성 비하, 여성을 주로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 이 세 가지를 구분할 수 있다.

 

 

 

4. 여성 혐오가 반드시 모든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 혐오에 빠진 남자가나는 여자 A를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 여자 A는 여자 같지 않은 여자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

 

 

 

5. 말만 보고 그 사람의 심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와 아들이 대판 싸우고 있다고 하자. 이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는 내 자식도 아니다. 꼴도 보기 싫다. 앞으로 네가 무슨 일을 당해도 내가 절대 도와 주지 않을 것이다. 너 같은 놈은 당장 죽어도 싸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것을 두고 자식 혐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어머니가 며칠 후에 아들의 신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겠다고 나선다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남자 일베 회원이 “나는 모든 여자가 싫다”는 취지의 말을 쏟아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사람이 여자가 나오는 야동을 보고, 여자와 섹스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을 챙기려고 하고, 여자와 연애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을 챙기려고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여성 혐오라고 볼 수 없다.

 

진화 심리학적으로 볼 때 부모가 자식을 쉽게 져버릴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자식이 잘 되어야 결국 부모 속에 있는 유전자도 잘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화 심리학적으로 볼 때 남자가 여자를 쉽게 혐오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여자를 만나서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해야 남자 속에 있는 유전자도 잘 되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 일베 회원이 “나는 김치녀가 싫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사람이 김치녀라고 규정하는 여자가 자신에게 추파를 던졌을 때(또는 그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 추파라고 느껴졌을 때) 쪼르르 달려가서 작업을 걸었다고 하자. 또는 그 사람이 김치녀라고 규정하는 여자와 어쩌다 보니 사랑에 빠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여성 혐오라고 볼 수 없다.

 

 

 

6. 일베 회원들이 야동을 얼마나 보는지, 그 야동에 여자가 나오는지, 여자와 섹스할 기회가 생겼다고 느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지, 어떤 여자와 어떤 식으로 사랑에 빠지는지, 여자와 술 한 잔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술 값을 희생할 생각이 있는지 등을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일베 회원들이 일베에서 쏟아내는 말만 보고서 그들이 여성을 혐오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성급하다.

 

 

 

7. 드라마 속에서 “나는 저 여자가 싫어” 또는 “나는 저 남자가 싫어”라고 되풀이해서 말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일이 흔히 나온다. 나는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고 본다.

 

이런 현상을 두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은 동정심이 사랑으로 변했다는 설명만큼이나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런 설명보다는 의식적인 믿음과 무의식적인 내부 변수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인간에게는 사랑(연애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내부 변수와 그 처리 방식이 진화했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남자는 여자 A의 외모, 나이, 인간성, 지능, 친족 관계, 냄새 등을 무의식적 기억 속에 저장하고 그것을 계속 평가할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 평가를 통해 사랑에 빠질지 여부가 자신도 모르게 결정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는 여자 B와 여자 C도 평가할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 내부 변수에 바탕을 둔 무의식적인 평가는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의식되지 않는다. 이것은 망막에서 시작된 시각 처리 과정이 시각상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의식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베 회원들의 여자에 대한 의식적 믿음과 쏟아내는 말이 다른 사람들과는 매우 달라서 얼핏 보면 여성 혐오에 빠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 평가와 관련된 그들의 내부 변수 처리 과정은 특별할 것 같지 않다. 이것은 진화한 인간의 보편적 본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베 회원이 어떤 여자 A를 두고 의식적으로는 김치녀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를 욕하고 다닌다 하더라도 내부 변수 처리 과정을 통해 사랑에 빠진다면 전체적으로 볼 때 여성 혐오라고 보기 힘들다. 물론 쏟아내는 말이 사랑에 빠지는지 여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면 여성 혐오라고 불러도 된다.

 

 

 

8.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은 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를 좋아한다. 뇌 속에는 여러 모듈(부품)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각 모듈 속의 정보가 서로 완전히 일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패턴의 불일치는 번식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자기 기만 또는 인지 편향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의식적 태도와 무의식적 태도가 상당한 분열을 보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일베 회원들이 어쩌면 그런 분열을 보이는지도 모른다. 진화한 심리 기제의 자동적 작동으로 일어나는 무의식 수준에서는 여자를 매우 좋아하지만 학습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되는 의식적 수준에서는 여자를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의식적 수준에서 일베 회원들이 여자를 싫어하는지 여부도 말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위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독설을 퍼부은 직후에 이웃집 아줌마한테는 “그래도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요”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쏟아내는 말, 의식적 믿음, 무의식적 처리 과정을 모두 구분해야 한다.

 

의식적 믿음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보이는 반면 쏟아내는 말은 상황에 따라 급변할 수 있다. 예컨대 일베 회원이 일베에서 하는 말과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이 매우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