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처음부터, '사람의 정신을 치료하는 임상의 장'에서는 수치나 통계학적인 자료가 표준이 될 수 없고, 그러한 표준 속에 주체로서의 환자의 경험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니, 결국 정신분석학은 치료사의 자의적인 판단에 달린 '문학상시상식'이 아니냐는 뭐 그런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자, 그럼 제가 다시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어려운 정신분석 용어를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쉽게 얘기하면, 또한 그만큼 오해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대충 이런 얘기 정도'라고만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과 관련되지 않은 비판에 대해선 제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자, 제가 처음에 '숫치'라는 말을 쓴 것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보통 우리가 흔히 하는 어떤 심리 테스트 같은 것입니다. 그게 뭔지는 잘 아시죠? 어떤 심리적 문제가 있냐 없냐의 판단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죠. 내담자가 사지선답, 오지선답형 질문에 대해 체크를 하면, 치료사는 총점을 내고,  그 총점에 기초해, 몇 점 이상이면 심각한 무슨 환자이고, 몇 점 이하면 잠재적 환자, 몇 점 이하이면, 정상인으로 판단합니다. 사람을 숫자로 매겨버리는 것이니, 정말 명확하고, 대조가능하고, 공유가능한 지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걸 다른 사람들의 자료랑 비교하면, 그 집단의 병리적 상태를 추정할 수 있고.... 기타 쓸모가 많은 겁니다. 이런 게 쓸모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치료의 장에서는 이렇게 일반화를 시켜서 막무가네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건 과학의 외양을 했지만,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구요?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세요. 가령 우울증 테스트 같은 걸 보면, 자기 생활의 만족도를 묻는 질문 같은 게 나옵니다. 다음에 자신이 해당하는 항목은? 1)만족한다. 2) 아주 만족한다. 3) 만족스럽지 않다. 4)아주 만족스럽지 않다.. 등등.


문제는 이런 질문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질문에 답해진 것들만 가지고는 그 사람의 우울증의 구조를 산정해낼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벌써 사람들마다, '만족'이라는 시니피앙을 놓고도 해석하는 게 다르고, 또 그것의 '정도'를 산정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주관적일 수 밖에 없죠. 감정은 애매모호하지만, 이렇게 사지선답으로 물으면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찍어야 해요. 그런데 일단 찍고 나면, 명확해지죠. 이렇게 해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감정의 과학"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여기에는 어떤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것'을 '단숨에' 객관적인 자료로 탈바꿈시키는 속임수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우울이라는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도 조금씩 다르구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로 객관적으로 우울한지 모르죠. 사람마다 '우울'이라는 시니피앙의 용도도 다르고(가령 요즘 아이들은 '존나 우울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죠.)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왜곡도 심하구요... 사실 우울하지 않으면서 우울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갈대와 같아서 저런 식으로 질문의 받으면, 그게 아니어도 그거인 거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질문 자체에 내재된 암시 효과 같은 게 있는 거죠. 테스트를 받기 전에 방금 전에 겪은 일도 자신의 감정의 높낮이를 산정하는데 많이 좌우하고... 더군다나 요즘은 우울증이 유행인지라 자신이 우울증자라 생각하면서 그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거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예전과 달리, 우울해 보이면 뭔가 특별해 보이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이런 왜곡에 한몫 하고 있죠. 이런 왜곡이나 피암시성의 정도들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심리테스트만의 문제는 아니고, '상담'이라는 것에 내재된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죠.


통계적 자료를 말하면서, 저런 단순한 심리 테스트 얘기를 하는 것은 결국 복잡한 통계적 자료를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저런 테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통계적 자료도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 저렇게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지점이 있다는 거죠. 점수나 숫치로 뽑아내면 아주 과학적인 듯 보이는데, 최초의 작업으로 돌아가서 보면, 그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문학상 심사"나 다름 없는 작업이란 겁니다.


어쨌든 정신분석은 이런 식의 방법은 과학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수치나 통계학적 자료가 치료의 장에서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건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한 마디로 "임상의 장에서는" 저런 식의 실증적인 방법만으론 사람의 정신에 대해 과학을 만들어낼 수 없고, 더 엄격한 잦대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표준이 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죠? 정신들과 그 정신들이 느끼는 감정, 또 그들이 경험하는 것들 속에서 어떤 공유가능한 표준을 도출해내기 위해선, 저런 표면적인 것 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원초적인 수준으로 내려갸야 한다고 봅니다. 환자의 주관이 생성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거죠. 즉 사람마다 주관이 다르다면, 그 사람에겐 그 다른 주관을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요소들의 틀이 있겠죠. 가령 우울이라는 것에 대해 이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우울이라고 하는지, 우울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이 사람에겐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이 사람의 우울이란 감정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감정은 무엇인지.... 그런 감정들의 얽힘이 어떤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경험은 또 어떤 다른 경험과 관련이 있는지.. 궁극적으로는 정신병적인 우울인지, 신경증적인 것인지 등등을 밝혀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분석은 환자의 세세하고 쪼팔린 경험들까지 다 뒤져서 그것의 원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미누에님은 그런 주관적인 틀을 밝혀내는 분석적 작업에 표준이 있느냐, 라고 물으실 수 있겠죠. 정신분석은 당연히 그게 가능하고 그러한 작업에 표준이 있다고 봅니다. 환자의 반응이 단순히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구조를 건드리는 어떤 분석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반응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반응의 변화는 일정하게 나타납니다. 가령, 환자가 정말로, 구조적으로 우울증자라면, 치료의 어떤 국면에서 조작적으로 이루어진 치료사의 개입에 대해 어떤 특정한 반응을 보입니다. 소위 정신병적 우울증자라면, 치료사의 어떤 잘못된 개입 때문에, 오히려 더 질병이 심각해져 자살이나 살인 같은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죠.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그것의 가능성은 테스트를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고, 예상할 수도 없습니다.( 심리 테스트나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한 통계적 방법만 의존해서 진단을 하고 개입하게 되면, 치료사의 잘못에 의해 저런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타났을 때도, 결국 환자의 잘못이나 사회탓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치료사 자신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못하죠.)


어쨌든 그런 일정한 변화는  오로지 치료사와의 관계 속에서, 치료사가 어떤 개입을 했을 때에 나타날 뿐이죠. 이에 대한 이유는 제가 아이추판다님께 병 자체의 속성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렸으니, 여기서는 더 길게 논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증상 자체 속에 그 병을 만든 환자의 삶 자체가, 타자를 대하는 방식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건드리지 않으면 병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걸 바꾸기 위해, 치료사는 환자와의 분석과정 속에서 일정한 반응들을 채취해내고, 그것으로부터 진단을 하고, 치료의 전략을 세우고, 치료를 해나가는 겁니다.


이러한 과정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비고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분석가들이 일정 정도 훈련을 받고 분석 경험이 쌓이면, 공통의 진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것입니다. 숙련된 분석가일 수록, 그러한 진단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고 정확하겠지요. 그래서 초년생 분석가들은 숙련된 분석가들에게 자신의 사례를 보고하고 콘트롤을 받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심리 테스트같은 현상적인 진단법으로 진단을 내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어렵고 더 많은 훈련 과정을 거칩니다. 분석가의 양성과정이 다른 치료사의 양성과정보다 훨씬 더 길고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죠. 


분석적 진단 체계와 관련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가령 미누에 님이 "도착성의 정도"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심리테스트를 받으면, 그런 것을 산정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테스트 상으로 어떤 현상을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그 현상이 구조적인 수준에서 도착증이라고는 진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히스테리의 어떤 현상인지, 강박증의 어떤 현상인지 다른 질환의 하위 현상인지가 더 중요하죠. 도착증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다른 질환에도 나타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치료자와의 관계 속에서, 치료자의 어떤 개입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걸 '이행성 도착증'이라고 하는데, 이런 거는 아예 수치적 자료로는 파악될 수 없습니다. 동성애도 마찬가지에요. 동성애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소위 히스테리적 동일시일수도 있고, 도착증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행태가 같다고 다 똑같은 동성애는 아닙니다. 하지만 현상적으로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니, 테스트를 하면 다 똑같이 나오죠.

물론, 심리테스트나 통계적 자료가 전적으로 쓸모 없다는 겁 아닙니다. 그것이 유용한 장은 존재합니다. 가령 한 사람의 치료가 아니라 인지의 장을 해명하는데, 혹은 어떤 집단이나 그 집단에 대한 개입을 위해서는 분명 필요합니다. 상업적인 용도나 정책 수립, 기타 등등 좋은 일에 많이 쓰일 수 있죠. 하지만 '한' 사람의 치료에는 그것이 유용한지는 의심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정신분석이나 유럽의 전통적인 정신병리학 쪽에서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기존의 통계적 자료에 입각한 임상 이론들을 '과학'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정신분석이나 정신병리학의 진단 체계에서는 그런 현상적인 행태들의 유사성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질환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그것이 중요한 것은 당연히 동일한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구조가 다르면, 치료의 방법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심지어 정신분석은 자신들의 방법이 더 과학적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영미권 정신분석가들, 또 우리나라에서 정신분석가로 활동하시는 의사분들에게 물으시면, 아마도 정신분석은 당연히 과학!이지 라고 대답할 겁니다.


라캉은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런 실증적 임상 이론들도 과학이 아니지만, 정신분석학도 궁극적으로는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복잡한 문제이니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따로 있고, 사실 저는 라캉은 잘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 요밑의 댓글을 보니까, 어느 신경과 의사님의 말씀을 들어 정신분석학이란 것이 정신치료에서 정말 아주 작은 분파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셨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신경과 의사들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 뿐, 정확한 진단은 될 수 없습니다.


남의 나라 얘기를 해서 죄송스러운데, 이미 프랑스에서는 정신분석이 대중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개업한 정신과 의사들 중 정신분석 경향 비율이 70% 정도가 되고, 정신분석 학술서 출간량이 전체 심리학 책 출간량을 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대학에서도 별도의 정신분석학과가 늘어나고, 상당 수 심리학과의 임상심리학파트를 접수했습니다(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정신분석학과가 생겼다고 합니다.) 국내 신경과 의사들말고 국내 심리치료사들 한테도 물어보세요. 아무리 정신분석학이 국내에서 자리를 못 잡았고 인터넷에서 듣보잡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무시는 안 한합니다. 국내에서도 심리치료의 양대산맥하면, 당연히 인지행동 치료와 정신분석을 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