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bbon: 긴팔유인원 vs. 긴팔원숭이
 

gibbon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Gibbon 을 참조하라.

 

인간은 파충류(reptile)인가? 닭은 공룡(dinosaur)인가? 대부분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분기학(cladism)에 충실한 일부 분류학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은 파충류이며 닭은 공룡이다. 잘 찾아보면 인간이나 침팬지가 포함되도록 monkey를 정의하는 생물학자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장류(primate)를 보통 prosimian, monkey, ape 등으로 나누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그리고 보통 ‘prosimian’을 ‘원원류(원시원숭이)’, ‘monkey’를 ‘원숭이’, ‘ape’를 ‘유인원’으로 번역하고 있다. 유인원에는 gibbon, 오랑우탄(orangutan), 고릴라(gorilla), 일반 침팬지(common chimpanzee), 보노보(bonobo chimpanzee) 그리고 인간 등이 있다. 인간을 유인원이라고 부르기를 꺼리는 학자가 있기는 하다.

 

요컨대 현재의 통상적인 용법에 따르면 gibbon은 원숭이가 아니라 유인원이다. 그럼에도 ‘긴팔원숭이’라는 번역어가 굳어졌다. 이것은 영장류 분류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며 영장류 분류학을 아는 사람을 열 받게 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긴팔유인원’ 또는 ‘기본(기번)’으로 고쳐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pe(유인원)’를 ‘원숭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Chimpanzee Politics』가 처음에는 『정치하는 원숭이』로 번역되었다가 최근에 『침팬지 폴리틱스』로 고쳐 번역되었다. 같은 저자가 쓴 『The Ape and the Sushi Master』는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라고 번역되었다.

 

『The Naked Ape』는 『털없는 원숭이』라고 번역되었으며, 『The Ape in the Corner Office』는 『양복 입은 원숭이』라고 번역되었으며, 『Stanley Goes Ape』는  『내가 원숭이를 닮았다고』라고 번역되었다.

 

‘monkey’는 ‘원숭이’로, ‘ape’는 ‘유인원’으로 번역하자.

 

 

 

 

 

haplodiploidy: 단수배수성 vs. 반수배수성
 

haplodiploidy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Haplodiploidy 를 참조하라. 간단히 말하면 수컷은 haploidy로 암컷은 diploidy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면 개미 등이 해당된다.

 

‘haplodiploidy’를 보통 ‘반수이배체(半數二倍體)’, ‘반수배수성(半數倍數性)’, ‘반배수성(半倍數性)’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haploidy’를 ‘단상체(單相體)’, ‘반수체(半數體)’ 등으로 번역하며 ‘diploidy’를 ‘배수체(倍數體)’, ‘이배체(二倍體)’, ‘이배성(二倍性)’, ‘이배수성(二倍數性)’ 등으로 번역한다.

 

haplo는 single(1, 하나, 단수單數)를 뜻하는 말이다. 즉 반(half, 半, ½)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haploidy는 diploidy의 2분의 1이기 때문에 ‘반(半)’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쓸데 없이 혼동을 준다.

 

일본어 ‘半倍数性’이 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반수배수성’이라는 번역어는 일본에서 건너온 듯하다. 구글(http://www.google.co.kr)에서 ‘半倍数性’로 검색하면 일본어 사이트 수십 개가 뜬다

 

나는 ‘haplodiploidy’를 ‘단수배수성(單數倍數性)’ 또는 ‘단수이배체(單數二倍體)’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haploidy’도 ‘반수체(半數體)’가 아닌 ‘단상체(單相體)’ 또는 ‘단수체(單數體)’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inclusive fitness: 포괄 적합도 vs. 포괄 적응도
 

“inclusive fitness”의 의미는 http://en.wikipedia.org/wiki/Inclusive_fitness 를 참조하라.

 

나는 “inclusive fitness”를 “포괄 적응도”로 번역해왔다. 하지만 ‘적응’이 ‘adaptation’의 번역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찝찝해 하고 있었다. ‘fitness’와 ‘adaptation’이 서로 어원이 다른 단어인데 모두 ‘적응’을 집어 넣어서 번역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러다가 『오래된 연장통: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전중환)』에서 “포괄 적합도”라고 번역한 것(55쪽)을 보고 상당히 적합한 번역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포괄 적합도”라고 번역할 생각이다.

 

 

 

 

 

population genetics: 개체군 유전학 vs. 집단 유전학
 

‘population genetics’를 보통 ‘집단 유전학’이라고 번역한다. ‘개체군 유전학’이라고 번역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개체군 유전학’이라고 번역했으면 한다.

 

생물학에서 ‘population’과 ‘group’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두 단어의 의미가 매우 명확하게 정의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구분해서 쓰고 있다.

 

보통 ‘population’을 ‘개체군’으로 ‘group’을 ‘집단’으로 번역한다. 따라서 일관성 있게 번역하려면 ‘개체군 유전학’으로 번역해야 한다.

 

 

 

 

 

prisoner's dilemma: 용의자의 딜레마 vs. 죄수의 딜레마
 

‘prisoner's dilemma’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Prisoner's_dilemma 를 참조하라.

 

‘prisoner's dilemma’를 보통 ‘죄수의 딜레마’나 ‘수인의 딜레마’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죄수와 수인은 “죄를 저지르고 옥에 갇힌 사람” 즉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갇힌 기결수 뜻한다. 하지만 ‘prisoner's dilemma’에서의 ‘prisoner’는 교도소가 아닌 구치소에 갇혀 있는 미결수 즉 수감된 형사 피고인을 뜻한다.

 

여기서 기결수인지 아니면 미결수인지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딜레마에 처한 prisoner는 아직 재판을 받기 전이며 자신과 공범의 행동에 따라 석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수감된 형사 피고인의 딜레마’ 또는 ‘수감된 용의자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 것이다. prisoner에는 ‘갇혀 있다’는 뜻이 있으며 이것이 이 딜레마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두 prisoner는 갇혀 있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하면 너무 길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번역어를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수감자의 딜레마’이고 다른 하나는 ‘용의자의 딜레마’이다. 수감자는 죄수와 다르다. 왜냐하면 구속 수감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감자는 미결수를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감자의 딜레마’라고 번역하면 용의자라는 뜻이 표현되지 않는다. 반면 ‘용의자의 딜레마’라고 번역하면 ‘갇혀 있음’이 표현되지 않는다. 도망 중인 용의자도 용의자다.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용의자의 딜레마’를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딜레마의 핵심은 용의자가 형량을 놓고 형사(또는 검사)와 협상(또는 협상 거부)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결수를 뜻하는 죄수로 번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정확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 ‘수감된 용의자의 딜레마’라고 번역하겠다고 우긴다면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다.

 

 

 

 

 

reciprocal altruism: 상호적 이타성 vs. 호혜적 이타성
 

‘reciprocal altruism’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Reciprocal_altruism 을 참조하라.

 

‘reciprocal altruism’을 보통 ‘호혜적 이타성’이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나는 ‘상호적 이타성’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왜냐하면 진화론자들이 ‘reciprocal punishment’라는 표현도 많이 쓰기 때문이다.

 

‘호혜’는 서로에게 혜택을 베푸는 일이기 때문에 ‘reciprocal punishment’를 ‘호혜적 처벌’이라고 번역할 수는 없다. 따라서 통일성을 위해 ‘reciprocal’을 ‘상호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altruism’을 ‘이타주의’라고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다. ‘~ism’만 보면 ‘~주의’라고 번역하는 습관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다. Robert Trivers가 이젠 고전이 된 논문에서 ‘reciprocal altruism’의 예로 든 것은 다른 종의 물고기의 몸을 청소해주는 어떤 물고기(cleaner fish, 청소부 물고기)였는데 이 물고기에게 대단한 이데올로기(‘~주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타성’이 더 적절한 번역어다.

 

 

 

 

 

Red Queen effect: 빨간 왕비 효과 vs. 붉은 여왕 효과
 

Red Queen effect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Red_queen 을 참조하라.

 

이재호 씨가 『문화의 오역』에서 지적했듯이 한국의 번역가들은 ‘queen’을 무턱대고 ‘여왕’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queen’은 ‘여왕’을 뜻할 수도 있지만 ‘왕비’를 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역사상 여왕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왕비를 뜻한다.

 

“Red Queen effect”는 Lewis Carroll의 『Through the Looking Glass』에 나오는 Red Quee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책에는 Red King도 나온다. Red King과 Red Queen은 체스의 말 King과 Queen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Red Queen은 여왕이 아니라 왕비다.

 

Matt Ridley의 『The 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의 제목이 『붉은 여왕 - 인간의 성과 진화에 숨겨진 비밀』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다. ‘Red Queen effect’는 ‘붉은 여왕 효과’가 아니라 ‘빨간 왕비 효과’라고 번역해야 한다.

 

『Through the Looking Glass』가 어린이용 책임을 고려해 볼 때 ‘붉은’보다는 ‘빨간’이 더 어울린다.

 

 

 

 

 

social Darwinism: 사회 다윈주의 vs. 사회 진화론
 

한국에서 “social Darwinism”이라는 용어를 “사회 진화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박노자에 따르면 이것은 일본에서 수입된 번역어다.

 

‘사회진화론’이라는 일본식 용어의 영어 원어는 Social Darwinism인데,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것이 바로 ‘사회진화론’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박노자, 『우승優勝 열패劣敗의 신화 -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63쪽)

 

어쨌든 위에서 인용한 책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박노자는 “사회 진화론”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나는 “social Darwinism”을 “사회[적] 다윈주의” 또는 “사회[적] 다윈론”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social evolutionism(사회 진화론)”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다윈이 진화론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두 용어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social Darwinism”과 “social evolutionism”을 동의어로 쓰는 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둘을 구분해서 쓰는 학자도 많은 것 같다.

 

“social Darwinism”은 다윈의 진화론 특히 적자생존을 들먹이며 온갖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인종주의나 복지 제도 철폐론 등)를 주창하는 것을 가리키며 Herbert Spencer가 대표적인 사상가다. 반면 “social evolutionism”은 사회가 진화한다는 사상을 뜻하며 심지어 마르크스도 사회 진화론자로 분류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인류 사회가 원시 공산주의,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의 단계를 밟으며 진화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http://en.wikipedia.org/wiki/Social_Darwinism http://en.wikipedia.org/wiki/Social_evolutionism

 

 

 

설상가상으로 다윈의 제자인 허버트 스펜서는, 가난한 계층과 민족들 즉 스펜서가 보기에 생물학적으로 덜 진화한 사람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 개량가들이 진화의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고 적었다. 사회 다윈주의(다윈은 이런 식의 설명을 전혀 원하지 않았으므로, 사회 스펜서주의라고 해야 한다.)의 학설은 당연히 존 D. 록펠러, 앤드류 카네기 같은 대변인들을 끌어들였다.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골턴은 덜 진화한 사람들의 번식을 말리는 이른바 우생학(인간 개량학)을 통해 인간의 진화에 도움의 손길을 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스티븐 핑커, 『빈 서판』, 46쪽, 김한영 옮김)

 

Worse, Darwin’s follower Herbert Spencer wrote that do-gooders would only interfere with the progress of evolution if they tried to improve the lot of the impoverished classes and races, who were, in Spencer’s view, biologically less fit. The doctrine of Social Darwinism (or, as it ought to be called, Social Spencerism, for Darwin wanted no part of it) attracted such unsurprising spokesmen as John D. Rockefeller and Andrew Carnegie. Darwin’s cousin Francis Galton had suggested that human evolution should be given a helping hand by discouraging the less fit from breeding, a policy he called eugenics. (Steven Pinker, 『The blank slate』, 16쪽)

 

나 역시 스티븐 핑커와 마찬가지로 스펜서 류의 사상을 사회 다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다윈이 무덤 속에서 얼마나 억울해 하겠는가? “사회[적] 스펜서주의” 또는 “스펜서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요컨대, “social Darwinism”이라고 불리는 사상을 칭하고 싶다면 “사회 스펜서주의” 또는 “스펜서주의”라는 용어를 쓰고, 원문에 “social Darwinism”이라는 용어가 있는 글을 번역할 때에는 “사회 다윈주의”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글의 주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김한영 씨는 위에서 인용한 구절을 참으로 거시기하게 번역했다. “follower”는 “제자”보다는 “추종자”가 더 어울린다. 그리고 “do-gooders would only interfere with the progress of evolution if they tried to improve the lot of the impoverished classes and races, who were, in Spencer’s view, biologically less fit”는 완전히 엉터리로 번역했다. 또한 “이런 식의 설명”이라는 번역도 별로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 정책과 관련된 당위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species preservation: 종 보존 vs. 종족 보존
 

“종족 보존 본능”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species preservation instinct”를 그런 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species’의 번역어로 ‘종(種)’이 완전히 정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pecies preservation”을 흔히 “종족 보존”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약간은 헷갈리게 하는 번역이다. 왜냐하면 ‘race’를 ‘종족’으로 번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원래 제목은 상당히 긴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이다. 이 제목에는 ‘species’도 등장하고 ‘race’도 등장한다.

 

누가 왜 “종족 보존”이라는 번역어를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정확하게 “종 보존”으로 번역하자.

 

그리고 『종의 기원』 대신 『종들의 기원』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 다윈은 나뭇가지처럼 여러 종들이 분화하는 것을 상정하고 제목을 단 것 같다. “On the Origin of Species”에서 ‘species’는 복수형인 듯하다. 독일어판에서도 “Die Entstehung der Arten”으로 번역했다. ‘Arten’은 ‘Art’의 복수형이다.

 

 

 

 

 

temper tantrum: 버둥떼 vs. 땡깡
 

“tantrum” 또는 “temper tantrum”의 의미는 여러 가지다. 여기에서는 “toddler temper tantrum”이라는 뜻의 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이가 주로 부모를 상대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떼를 쓰는데 발버둥치며 울고불고 소동을 피우는 것을 말한다. 심할 때에는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은 자해 행동으로까지 나아갈 때도 있다. 어린 침팬지도 예컨대 이유기에 젖을 먹기 위해 이런 행동을 보이는데 인간 어린이와 하는 짓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temper tantrum”의 의미를 잘 전달해주는 흔히 쓰는 한국말이 있다. 바로 “땡깡” 또는 “뗑깡”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국어사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속어다. 구글(http://www.google.co.kr)에서 검색해보니 “땡깡”은 189,000개, “뗑깡” 32,600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땡깡”이라는 발음이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Daum 오픈국어사전>에는 "뗑깡"이 등재되어 있다.

 

땡깡이 흔히 쓰이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국어사전으로부터 구박 받는 이유가 있다. 땡깡은 전간(癲癎), 간질, 지랄병을 뜻하는 일본어 텐칸(てんかん)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땡깡 부리는 모습이 간질 발작과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어에서 유래했으며 그것도 간질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땡깡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대신 짜증, 억지, 생떼, 막무가내, 행패, 응석 등으로 순화해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짜증, 억지, 생떼, 막무가내, 행패, 응석 모두 “temper tantrum”과 연관성이 있는 단어지만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짜증”에는 떼를 쓴다는 의미가 없으며, “억지”와 “막무가내”는 전혀 다른 상황에도 많이 쓰며, “행패”는 어른이 힘을 믿고 다른 어른에게 하는 행동도 포함되며, “생떼”에는 발버둥치며 울고불고 소동을 피우지 않은 경우에도 적용되며, “응석”은 어리광을 부리는 것에도 적용된다. 내가 알기로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한국어 중에 “temper tantrum”에 정확히 대응하는 말은 “땡깡” 밖에 없다. 흔히 쓰지 않는 말 중에 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영어에서 유래한 말은 별 상관 없이 쓰면서 일본어만 차별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과거에 일부 일본인이 잘못한 것이지 일본어에 무슨 죄가 있나? 그리고 잘못한 것으로 따지면 미군이 한국 전쟁에서 벌인 민간인 학살을 비롯하여 한국인에게 한 만행은 엄청나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게다가 아이들이 발버둥치며 생떼를 쓰는 짓을 간질 발작을 뜻하는 말로 부르는 것도 꺼림칙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단어를 하나 만들어내기로 했다. 그것은 “버둥떼”다. “버둥거리다”와 “떼쓰다”를 합쳐 놓았다. “발버둥”, “생떼”를 떠올려도 될 것이다. “떼쓰다”처럼 “버둥떼 쓰다”라고 표현하면 된다.

 

구글에서 “버둥떼”로 검색해보니 내 의도와 뭔가 통하는 듯한 예문이 두 개 검색되었다:

 

“곶감 사달라고 할머니를 붙잡고 버둥 버둥 떼썼다고 하더라구요.”

“버둥버둥 떼를 쓰는 아이처럼 강진과 민태가 바닥을 굴렀다.”

 

 

 


version 0.2
2010-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