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넷 오돌또기님의 청을 받아 리얼 진보 중에서 박상훈씨 글을 소개합니다.

먼저 박상훈씨는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가 왜 나라마다 다른가를 물은 뒤 그 답으로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 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을 꼽습니다.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클 수록 투표율은 높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약하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과연 한국에서 진보 정당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가질 수 있는가입니다. 특히나 '미국 예외주의', 이른바 노동 없는 민주주의 현상이 유럽까지 밀려오는  지금 과연 한국에서 진보 정당은 유력한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박상훈씨는 그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 매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로 먼저 냉혹한 외부 조건을 들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외재적 환원론은 근본적으로 미국 예외주의적 접근의 한국판일 뿐이라고 잘라말합니다.(노무현의 실패는 좃선을 비롯한 언론 환경과 대책없이 까대는 진보 진영과 세트로 속썩이는 북한과 부시, 심지어 20세기에 살고 있는 국민 탓이라고 믿는 이들이여, 이해가 되시요?) 오히려 문제는 과연 상황을 개쳑해 갈 수 있을 정도로 진보 세력이 정치적으로 유능한가 하는데 있다는 것이지요.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이른바 정치에 대한 소명이 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진보 진영에 대해 목격한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해 우려합니다. 대다수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를 이해하고 그것에 적응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신들이 견지했던 이념의 언어로 현실을 재단하고 대중을 계도하려는 태도가 강했다는 거지요. 권력과 권위, 갈등과 대립, 리더십과 통치의 기능을 부정하면서 일종의 정치 현실을 초월한 도덕적, 급진적 운동론으로 정치 조직의 통합력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치란 무엇일까요?

우선 그는 정치란 개인의 차원 나아가 운동성 내지 도덕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 세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초심' '도덕성' '운동성'과 같은 도덕률이 진보의 영역에서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하며 거기에 도덕성이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준이 될 수록 정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기반은 파괴되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당장 우리 사회처럼 도덕성이 강조되는 정치도 없지만 한국 정치가 도덕적인 것과 거리가 먼 것은 정치가 개인이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성을 따지는 동안 개선해야할 정치 현실을 놓쳐버리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부도덕한 정치 현실이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한국정치에서 '의식 개혁' '의식화'라는 접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내면을 뜯어고치겠다는 발상부터 위험하지만 개개인의 의식을 문제 삼는 동안 정작 문제가 되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직은 건재하게 되니까요. ('국개론' 부르짖는 애들, 알겠니?) 근대 정치에선 가난한 대중의 운명이 정치가의 선의에 의존하는게 아니라 정치가 자신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반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특히 전 '운동권 내지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갖는 가장 큰 불만은, 분명 그들 역시 정치를 하고 권력을 이용하고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다투고 있는데도 늘 언어를 구사하는 데 있어서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권력과 이해관계에 초연한 역사적 역할자로 정의하거나, 자신은 안 그런데 상대가 권력과 이해관계를 다툰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또 자신은 원치 않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권력과 이해를 다투게 되었다는 식의 자기 위선과 변명의 문법이 일상화되었다.'란 문장에 꽂혔습니다. 100프로 공감합니다. 아울러 몇몇의 얼굴이 지금 살짝 오버랩되면서...

사실 위의 문장은 진보 진영을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보파의 언어가 정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면 갈등을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기에 기껏 더 누가 더 도덕적이냐나 따지게 되며(매번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대한 도덕적 비난에만 목을 다는 일부 진보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이는 결국 다수의 신뢰를 확보할 수 없게 만든다는 고언입니다. 특히나 아래의 구절은, 단순히 진보 진영만이 아니라 분당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중도 진영에도 뼈아픈 지적입니다.

진보 정치의 영역 내부에서 갈등과 균열이 생길 때마다 도덕주의적 집단 선택이 강요되고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사회적 기반을 끊임없이 축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민주주의와 정당의 관계입니다. (지금까지 글이 길기에 짧게 쓰겠습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제도적 채널로 하는 정치적 대표 체제를 그 핵심으로 하고 이는 불가피하게 엘리트 직업 정치인들, 혹은 그들이 조직한 정당의 과두 체제를 발전시킵니다. 그럼에도 이를 민주주의의 현대적 유형이라 부르는 건 사회 갈등의 정치적 대표와 경쟁의 원리가 보통 사람들이 정치 엘리트와 정부를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런 정당은 어떻게 힘을 발휘하게 될까요? 먼저는 (특히 진보 정당에게) 이념이고 구체화된 정강이지요. 그렇지만 진보정당들은 추상적 논의에 빠져 제대로된 강령 하나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전 그랬는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념으로 끝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념을 현실화할 리더쉽과 조직적 권위의 확립, 규율의 체계화가 있어야 하지요.

저 개인적으론 이 다음부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 정당의 모델을 말하면서 막연히 '대중적'인 어떤 정당 조직을 연상하지요. 더 나아가 당내 민주화는 한때의 유행어였습니다. 그렇지만 정당은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할까요? 답은 '아니다'입니다. 반드시 민주적이어야하는 것은 정당 체제이지, 정당은 아닙니다. 단위로서 정당은 기본적으로 '자율적 결사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당은 자신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위계적인 조직 구조를 가질 수도 있고, 이념을 중시하며 상층 엘리트 사이의 집단 지도 체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는 겁니다. 가능한 민주적 가치와 원리가 당내에서 발전해야겠지만 그 것이 조직으로서 정당 내지 리더십의 발전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물신화하는 것입니다. 당장 19세기 이래서구 민주주의를 이끈 대중 정당은 매우 응집적인 이념 정당이었고 '민주집중제'라고 불리는 강한 리더십과 조직적 규율, 다양한 대중 단체를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 당 활동가들의 당파적 역할로 가능했습니다.지금 그런 모델을 실현할 수야 없겠지만 그 기본 원리는 부정될 수 없는 거지요.( 경선때 조직 동원한다고 도덕적 비난을 퍼부어대던 유모, 이모씨와 그 *들, 아시겠어요?)  

결국 핵심은 권위, 권력, 국가, 정당, 당파성, 리더십의 좋은 모델을 발전시키는데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진보파들이(플러스 개혁 진영)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부패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사이 반정치와 투명성, 효율성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관이 더 힘을 발휘했지요. 그러는 사이 민주정치와 정당 정치는 점점 사회적 기반을 상실했고 결국 가장 투표하기 쉬운 나라의 총선 투표율이 46프로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리더쉽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를 현실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정파에 대해 무척 부정적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오히려 정파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리더쉽 아닐까요? 막스 베버가 역설했듯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 권력이 강해지는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파와 붕당이 강해지게 되니까요. 박상훈씨는 한국 진보 정치의 현실이 정확히 베버의 말과 같다고 합니다. 2004년 원내 진입과 함께 어렵게 만들어진 진보의 정치적 자원이 탕진된 것은, 정파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부의 부재로 인해 정파의 폐해가 무제한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제 생각엔 열우당이 더 정확한 예가 아닐까한다는...)

그리고 조직화와 리더쉽에 부정적인 경향은 대개 개인적으로 발언권을 더 크게 가질 수 있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지도부 구성을 피하고 싶어하는 중산층 엘리트들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지적합니다. "강한 정당의 부재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축소하고 선거를 중간 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 이 간단하고 단호한 주장이야말로 현대 정치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박상훈씨는 생각한답니다. (저 또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인치란 부분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디제이는 사당화, 혹은 인치라는 측면에서 매우 많은 비난을 받았지요. 저 또한 디제이 식의 리더쉽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인치 자체가 무조건 배격해야할 정치일까요?

오히려 박상훈씨는 개인으로 상정되는 리더쉽에 매우 부정적인 정당 모델 자체가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현실의 민주주의가 먼저 정부가 통치하게 한 뒤 그것에 책임을 묻듯 정당 조직에서도 먼저 리더십이 가능하게 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들과 대면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치가 갖는 독단성과 임의성을 제어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인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정치를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오히려 한국의 진보정당은 '인치의 부족' 즉, 리더의 부재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낳았다고 주장합니다. 아데나워 시대의 독일 기민당, 브란트 시대의 독일 사민당, 맥도널드(햄버거가 아닙니다!) 시대의 영국 노동당, 미테랑 시대의 프랑스 사회당등 진보 정당도 리더십의 특징과 결합된 직접적 책임성의 구조를 발전시키는데 소극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정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권력과 권위의 부여도 불가피하며 먼저 리더가 조직을 통치할수 있게 한 뒤에 그 결과에 사후적 책임을 물을수 있는 체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어느 조직도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고 박상훈씨는 조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