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에 대해서든, 라캉에 대해서든, 버틀러에 대해서든, 맑스에 대해서든, 그들의 관점에서 읽혀지는 역사에 대해서든, 문화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minue622님을 비판하기 위해서 포스팅한 글들과 댓글들을 읽었습니다. 읽고나서, 미뉴에님이 제가 썼던 맑스에 대한 글에 논리 비약이라는 댓글을 달았던 것이 이해가 되더군요. 미뉴에님의 "인문좌파"에 대한 무시무시한 댓글까지도 이해는 됩니다.

미뉴에님의 "인문좌파"에 대한 비판은 "구축주의(constructionism)"로 요약 가능합니다. 즉, 푸코든, 라캉이든, 버틀러든, "포스트모던 종파"들은 sex든, gender든, 역사든, 민족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언어와 담론의 결과물, 생산물로 보는 "구축주의"를 주장한다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죠.

결론을 먼저 말씀 드리면, 저 위에 열거한 그 누구도 저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이 의아하시죠? 그렇게나 힘들여서 "인문좌파"의 본질을 알아낸 듯했는데 그래서 줄기차게 비판을 했는데, 단 한 마디로 그건 아니라고 하니 맥이 빠지기도 하지 않나요? 그래서 푸코든, 라캉이든, 버틀러든, 그들이 비판하려는 것이 바로 "구축주의"입니다. 심지어, 문화적 젠더(gender)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성(sex)조차도 언어적으로, 담론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하는 버틀러조차 구축주의자(constructionist)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이 담론이라면, 신체는 어떠한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물론, 이곳에 있는 "과학주의자"들이 기대할만한 질문인, "모든 것이 담론이라면, 생물학적 성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아니여서 죄송하긴 하네요. 동성애자인 버틀러에게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성차이가 아닙니다. 생물학적 성, 혹은 그것의 담론적 구축에 대한 비판이 그녀의 목적이기도 하겠네요. 따라서,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신체"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성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신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겠습니까? 즉, 남성/여성이라는 성으로 구분되지 않는 신체라는 것이 존재하겠습니까? 저는 존재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동성애자의 신체가 그렇겠네요. 할머니의 신체가 그렇겠구요. 유아의 신체가 그렇겠군요. 그렇다고 해서, 생물학적 성차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여성/남성의 신체라는 생물학적 성차이에 대해서도 구축주의와 과학주의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 여성/남성의 신체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같은 맥락에서 구축주의와 과학주의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 민족체, 문화체, 사회체, 역사체를 말할 수 있겠군요. 미뉴에님이 말씀하신, "민족체가 뭔지가 문제가 됩니다. 전 종족을 언어, 혈연, 공통으로 물려받은 역사적 경험과 그에 대한 집단기억, 종교 등의 객관적 요소들을 전부 혹은 일부 공유하는 집단 정도,"라고 말씀하신 것과, "민족주의의 자생성을 지지할만한 (바꿔 말하면, 민족주의가 오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주입이라고 가정할 경우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례들을 몇 가지 알고 있습니다(그것도 근대 혹은 비교적 근대의 사례들)"이라고 말씀하신 것, 그리고 어디에서 읽었는지 찾지 못하겠지만, "이웃이라는 어떤 공동체의식, 함께 공유되고, 함께 경험되고, 함께 살어지고, "귀속"되어지는 어떤 경험들"이라고 민족체를 말씀하시는 것을 투박하게 나마, 과학주의와 구축주의를 넘어서는 민족체로 말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니체는 자신은 고독하게 산봉우리에 올라 다른 곳을 굽어보는데 다른 봉우리에 있는 스피노자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고독을 "혼자만의 고독(solitude)"이 아닌 '둘의 고독(dulitude)"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맑스의 고독 등등을 생각을 하고, 아인슈타인의 고독을 또 생각을 합니다. 그 지독한 고독 때문에 그는 괴델이라는 괴팍한 수학자와 친구로 지냈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을 합니다.

과연 누가 "인문좌파"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겠습니까? 과연 누가 "인문좌파"를 고립무원의 무인도에 유배시키는 것이겠습니까? 이곳 아크로를 보면서, 저 자신을 고립무원의 무인도에 유배된 로빈슨 크루소처럼 느꼈었죠. 그래서 개인주의의 탄생을 다루는 글을 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많은 글들을 숨죽이며 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암약할 "인문좌파"들이 커밍아웃을 하길 바라면서, 그렇게도 많은 글들을 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라도, 현실세계는 더이상 바라지도 않고, 이곳에서라도 인문학자들이 목소리를 내었으면 해서, 그렇게도 많은 글들을 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할 글을 쓰다가, 그나마 알아는 들을 수 있는 글을 썼던 것이겠군요. 그래서, 최초에 썼던 글 중의 하나가 라이프니츠의 창도 없고 문도 없는 모나드를 닮은 창도 없고 문도 없는 철학자의 골방에서 나와 이곳에 글을 쓰겠다고 선언을 했던 것이겠군요.
 
이택광의 글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서 엘리트주의적이고 현학적인,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말을 하는 그를 보면서, 고립무원의 무인도에 유배된 고독을 읽어냈죠. 그 자신 스스로가 스스로를 유배시킨 것일까요? 그런 상황에서 저라면, "너희들은 이것도 이해 못하는 멍청이야"라는 엘리트주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겠지만, "자연과학은 그 근본에서부터 부정되어야되"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의 고독이 한편으로 이해는 되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저는 근대경험과학의 역사를 설명했겠죠. 제가 이곳에 정신의학의 탄생과 전개, 그리고 그것의 현재 모습을 보였던 것 처럼 말이죠. 또한, 저는 미뉴에님의 "인문좌파"의 오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이해는 됩니다. 이해는 되지만... 이해되는 그 만큼 제 자신이 느끼는 어떤 고독감은 어찌할 수는 없네요.

덧글: 막상 "고독감"을 강하게 피력하기 위해 위와 같이 써놓고서는, "민족체"에 대한 미뉴에님의 댓글을 살펴보고선, 이 고독감이 누그러졌습니다. (글을 완성(?)하구선 민족체에 대한 님의 댓글이 떠올라, 글을 수정을 하고 덧붙였던 것입니다.) 하나의 공유되는 경험으로서, 민족에 대한, 민족주의에 대한, "민족체"에 대한 미뉴에 님의 견해에 저는 거의 백 퍼센트로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님께 무엇인가를 배우기를 원하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