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새로운 지적은 아니지만, 바로 앞 글에서 '에스페란토가 단선적 ESR 도식을 따른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를 간략하게 해명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에스페란토는 폴란드의 의사 자멘호프(희망하는 박사, doktoro esperanto)라는 사람이 만든 인공어이며 국제 보조어이다. 자세한 것은 위키백과 등에 나와 있으니 각설하고, 여기서는 에스페란토의 시제 체계만 다루기로 하겠다.

에스페란토의 동사 부정법 어미는 -i인데, 이 어미를 떼고 기본 시제 어미인 -is(과거), -as(현재), -os(미래)를 붙임으로써 기본 시제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별 말이 없으면 이 기본 시제들이 미완료인지 완료인지는 모른다. 이 외에 명령/희구법(-u)과 가정법(-us) 어미가 있다. 예로 '가다(iri)' 동사를 시제 변화시켜 보면,

iris (갔다) - 과거
iras (간다) - 현재
iros (갈 것이다) - 미래
irus - 가정법(무시제)
iru (가라, 가기를) - 명령/희구법(무시제)

와 같다. 명령법은 암묵적인 미래시제고, 가정법이나 희구법은 시제가 문맥에 의해 지정되니 독립적인 시제로 볼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만 생각하면 된다. 이 각각에 대해 시제 규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과거 : E - S
현재 : E, S
미래 : S - E

그리고 에스페란토에서는 분사를 이용한 복합시제 표현이 가능하다. 규칙적이게도 에스페란토 분사어미는 과거(-inta), 현재(-anta), 미래(-onta) 세 가지 형태가 다 있다.(물론 좀 더 세분된 언어에서는 과거분사를 과거분사와 완료분사로 나누기도 하지만, 본질적 의미는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을 이용한 문장을 만들어 보자. 형용사형 어미 a를 떼고 시제어미를 붙여도 되고 조동사 esti(있다, 이다)를 써도 된다.(여기선 좀더 알아보기 쉬운 후자의 방법을 쓴다) 어떤 식으로든 복합시제는 다음과 같은 9가지가 가능하다.

estis irinta(과거완료), estis iranta(과거진행), estis ironta(과거미래)
estas irinta(현재완료), estas iranta(현재진행), estas ironta(근미래)
estos irinta(미래완료), estos iranta(미래진행), estos ironta(후미래)

이 각각의 시제 사용에서, 분사어미가 갖는 시제 규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과거분사 : E - R
현재분사 : E, R
미래분사 : R - E

이렇게 함으로써, 에스페란토 기본 12시제라는 논리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체계가 ESR로 표현될 수 있다. 그밖에 에스페란토 비공식 분사어미 중 -enta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무시제다. 즉, 이 분사어미에 의한 초월시제 규칙,

무시제분사 : del S & E, R

까지 합하면 에스페란토에서는 13시제가 나온다. 이처럼, 에스페란토는 훌륭하게 단선적 ESR(R이 하나까지 쓰이는 ESR)을 따르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이상하다 싶을 것이다. 다 좋은데 여기서 분사어미가 갖는 시제 규칙은 시제어미가 갖는 시제 규칙보다 강해서 이걸 무시하고 완료형과 근접미래형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시제 규칙과 과거분사 규칙을 기계적으로 합성하면 이렇게 된다.

현재시제 + 과거분사 = 현재완료(?) : E, S - R

근데 일반적으로 현재완료는 (E - S, R)로 표현된다. S가 뒤로 밀리는 것이다. 또 근미래의 경우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과거완료와 후미래는 R을 S와 E 사이에 놓아야 성립된다. 과거미래와 미래완료의 경우는 분사 규칙이 너무 강해서 시제 규칙에서 E를 R로 대치해 버린다. 그러니, 분사어미가 갖는 '합성' 규칙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과거분사 : E - R, >S(현재/추가규칙), O-R-O(과거/추가규칙), S - R(미래/시제규칙대치)
현재분사 : E, R
미래분사 : R - E, <S(현재/추가규칙), O-R-O(미래/추가규칙), R - S(과거/시제규칙대치)

이렇게 놓고 보면 아까보다는 좀 아름다움이 덜하지만, 어쨌거나 에스페란토 시제가 확연한 대칭적 규칙을 가진다는 건 분명하다.


p.s.
이 글과 바로 아래의 글(인간 언어는…)은 블로그 폐장 때문에 별다른 편집 없이 즉시 가져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단 변경 등이 매끄럽지 않은 등의 편집 에러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게 눈에 띈다면 덧글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