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를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최근작인 <색채가 없는 다자끼 스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빌려다 놨는데 먼저 <상실...>부터 읽는 게 순서 같아 그렇게 했다.
아니...무라카미를 이제야 처음 읽다니! 당신 글장이 맞아? 이렇게 묻는 분도 있을 거다.
십수년 이래 그가 한국문학지망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2005년도 모스크바 주요서점을 찾았을 때 러시아 작가들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진열장을
차지하고 있는 무라카미를 비롯한 일본 작가들에게 충격을 받은 바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세대가 달라서 그런지 무라카미 종류의 유행소설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 일본 소설이라면
전쟁 직후 나온 이노우에나 오오헤까 쇼헤이, 시이나 린조,등 무거운 주제들을 다룬 작가들 작품을 청년시절
읽은 바가 있다. 요새 한국 지면에도 가끔 등장하는 오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작품들도 그때 읽었다.

 나는 지금 무라카미 독후감을 쓸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 책을 겨우 수십페이지 이제 겨우 읽었을 뿐이다.
줄거리 흐름이나 문체는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다. 평화시절에 사회적 큰 이슈는 없고 그대신 풍부한 물질 속에
생활하는 일본 청춘들의 감각적 고뇌와 방황을 아주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일본 소설 답게 디테일이 치밀하
고 충실하게 짜여져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걸 읽으면서 문득 <일본인이 전쟁 과오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이유>-제목은 조금 다른듯-라는 제목으로 최근
신문광고에 나온 신간이 떠올랐다. 그 책은 아직 읽은 바도 없다. 왜 그런 엉뚱한 문제가 떠올랐느냐 하면...
<상실>에 등장하는 모든 일본인들이
'남과 이웃을 배려하는 자세가  하나 같이 대단할 뿐 아니라 때로는 지나칠만큼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경우가 바르고 개인간에 남을 크게 배려하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저 끔직한 전쟁과오에 대해서
는 한사코 도리질을 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독일처럼 화끈하게 과거를 속죄하고 새로 시작할 수는 없는가?
역시 독일은 헤겔 칸트의 나라답게 이성이 지배하는 문화정신적 선진국이고 일본은 별 수 없는 섬나라 미개
족속일 뿐인가? 우리는 이런 자문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일본을 미개사회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서구에서 유일하게 자기네와 동급의 문명사회로 인정해주는 나라가 일본이기도 하다.
그런 발언이나 기사를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질투심도 생긴다. 그러나 성노예 문제를 비롯한 전쟁과오에
대한 일본정부와 일본인들 태도는 일본을 문명사회라고 가정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큰 이유가 뭘까?

 전에 일본이 천황제를 유지하는 한 주위에 식민지가 필요하고 그래서 일본은 전쟁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
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천황은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있어야 제대로 위신이 서게 된다. 이 관점
도 그럴듯하지만 나는
  -일본이 전쟁의 추악한 괴오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만세일계라는 천황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봤다. 영국에도 왕실이 있고 스페인에도 왕실이 존재하지만 일본의 천황제와는 근본이
아주 다르다. 일본에겐 천황은 단순한 왕실이 아니라 기독교의 예수 같은 존재이다. 즉 절대 선과 절대 권위
를 자랑하는 신의 반열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서구의 주요 왕실들은 서로 통혼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경을 넘어온 혈통이 왕권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은 '만세일계'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시초
의 천황이 지금까지 그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믿는다. 천황 불가침이다. 그런 천황이 군림하는 나라에
서 위안부 같은 추악한 범죄행위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전쟁의 주제자이던 천황
은 천하의 악한으로 추락하고 그 천황의 지고지순한 백성들은 악의 무리로 추락하는 것이다.

지금도 황실행사가 있는 날에는 궁성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땅바닥에 엎드리고 천황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 이슬람교을 제외하면 현대 종교에서조차 그런 광경은 보기 쉽지 않다. 대단한 종교적 열정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천황 앞에서는 이성을 동댕이치고 거기 몰입하는 것이다. 개인간에 배려심
이 강하고 경우가 바른 일본인들이 천황 앞에서는 이성을 상실해버린다. 그래서 전쟁과오를 지적하면
펄쩍 뛰고 손사례를 친다. 여기에는 정치인 지식인 예술인 구분이 없다.
 결론은 천황 제도가 일본의 만악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침략 근성도 , 전쟁과오에 대한 비이성적 대응도 모두
광적 신앙에 가까운 천황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천황제는 일본이 현대문명사회로 가는데 암적 존재
가 된다. 그런데 그들이 이걸 인식하고 천황제를 버릴 수가 있을까?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기대난망이다. 그것을 버리는 순간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그 정체성이 침몰하고
말 것이다.
기회가 닿으면 누구던지 이 문제를 좀 더 심도있게 검토연구하는 것이 좋겠다. 가장 가까운 나라 입장
에서 이 문제가 결코 가볍다고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