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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 흙을 쥐고 처음인 듯 들여다본다.
흙은 마지막 남은 틀려버린 일을 끝내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냄새를 낸다.
썩음의 목마른 소리를,
무너진 아름다움을 들내어 보여준다.
흙은 또 금방 생활을 토해낼 것 같은 창백한 빛,
나는 너무 놀라서 다른 흙을 쥐어보고
또 다른 흙을 쥐어보며 소리쳤다.
이처럼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은 슬픔과의 입맞춤 때문이냐!
말없는 땅의 한줌 흙은
이미 너무나 강력한 패배에 길들고 말았다.
세계의 씩씩한 사람들은 오고 있지만
흙은 늦었어 너무너무 늦고 말았어.
이성부의 시 <자연> 전문.
고등학교 때 읽고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던 시다.
이성부의 시는 <벼>나 <전라도> 연작이 유명하고, 저 <자연>이란 시는 별로 언급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전통 농경문화에 고착되어 시대의 변화에서 소외되고, 어떠한 정치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호남의 비애를 저렇게 절절하게 떠올려준 시는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이성부 본인은 다른 의미로 저 시를 썼을 수도 있다.
박노해보다도, 김남주보다도, 김준태보다도... 내가 더 사랑한 시인이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박노해는 가소로웠고, 김남주는 우스꽝스러웠고, 김준태는 좀 안쓰러웠다고나 할까.
나머지 시인들은 잘 모르겠다. 나의 시 읽기는 너무나 일찍 끝나버렸기 때문에.

봄
이성부(李盛夫)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처럼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은 슬픔과의 입맞춤 때문이냐!
말없는 땅의 한줌 흙은
이미 너무나 강력한 패배에 길들고 말았다.
세계의 씩씩한 사람들은 오고 있지만
흙은 늦었어 너무너무 늦고 말았어."
흙이 느리고... 수많은 슬픔과 죽음과 입을 맞추고 있지만
또... 수많은 생명을 품고 키워내니까요...
세계의 씩씩한 사람들, 발전하는 찬란한 기술은 흙을 더럽고 무능하게 여기지만
그 사람들 조차 흙을 밟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이 성 부
노인은 삽으로
영산강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머지 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
노인은 다만
성난 사랑을 혼자서 퍼올린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은 끝끝내
영산강을 퍼올린다 가슴에다
불은 짊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
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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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시 특히 詩語라는 점에서
우리의 것과 서양의 것, 정서와 이성, 구호와 한탄, 강과 약, 완과 급의 조화를 이룬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성부 시인은 드물게 그런 조화를 이룬 시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슬프되 감상적이지 않고, 분노하되 도그마를 말하지 않더군요.
박노해의 시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철저한 프로파간다로서의 기능, 자신을 속이는 몰입 같은 것입니다.
이성부 같은 시인이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이 나라의 지적 풍토를 보면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썩은 냄새를 맡습니다.
흙이 뿜어내는 썩은 냄새와는 많이 다른 냄새 말입니다.
프로파간다 어쩌구 하는 것도 사실 그 시적 품질에 대해서는 최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그냥 시대적 역할을 평가해준 겁니다.
'시다의 꿈'이나 '이불 홋청을 꿰매며'를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지금도 옛날 같은 감동이 느껴질까요? 소재가 주는 힘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형화된 표현에 정형화된 감동... 그건 시가 아닙니다. 카탈로그죠. 그 카탈로그 수준도 유치하기 짝이 없어요. 표현 보세요. 웬만큼 시를 이해하는 고등학생도 저렇게 치졸하게 쓰지 않습니다.
그러시다면 저 역시 예의를 차리지않고 이야기를 하지요. 시라는 문학 장르처럼 주관적인 해석이 감상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없고, 그 형식이 자유로운 장르도 또한 없겠지요. 때문에 어떤 시에 대해 감동이 많다 적다는 오로지 그 시를 읽는 독자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지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타의 문학장르인 소설이나 희곡같은 경우는 '고유의 작법'에 충실했나를 따지는 것이 가능하지만 시는 그렇지 못하지요.
정형화된 표현에 정형화된 감동이라... 저는 도리어 님이 언급하신 이성부시인의 시가 바로 그런 시라고 봅니다만. 대한민국 근현대시들의 대부분은 어떤 정형화된 시작법에 충실한 개성없고 고만 고만한 시들뿐이라는 게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자신의 관념을 잘 표현해주는 어떤 상징물을 찾아내고, 그 상징물을 최대한 은유적으로 재구성하기. 이런 형식에 잘 맞춘 시는 잘쓴 시로 대접 받고, 그렇지 못한 시는 시적 품질을 의심받고 그랬지요. 서정시의 은유와 상징 알아 맞추기가 대부분인 공교육의 국어 수업과 우리나라 특유의 신춘문예제도도 그런 시적 편식을 부추기는 주범이기도 하구요. (그 덕분에 시집이 안팔려서 대한민국 시인들이 몇명 빼고는 부업으로 시를 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성부시인처럼 소위 '민중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쓴 시들이 그런 작법에 매우 충실했지요. 님께서 소개하신 전라도7이라는 시도 그런 정형화된 시작법에 매우 충실한 어떤 전형과도 같은 시입니다. 솔직하게 그 시를 시적 품질이라는 시각에서 혹평하자면 김수영의 '풀' 이후로 수없이 양산된 민중시 아류작들의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박노해의 시들은 애초부터 그런 시작법에 오염되지 않고 거의 최초로 자신의 관념을 구체적인 진술로 구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즉 시인이 뭘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박노해의 시들은 제목과 작자를 지우고 본문만 읽어도 '이것은 박노해의 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고유의 시적 개성이 있지만, 이성부시인의 시들을 그렇게 읽으면 누가 쓴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 그런 이유이지요. 또한 은유적인 진술은 시적 울림이 있지만, 구체적인 진술은 유치하다는 감상법은 시를 감상하는 수없이 많은 방법들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 특수한 기준에서 본다면 박노해의 시들은 유치한 것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다의 꿈'이나 '이불 홋청을 꿰매며'를 다시 읽어도 옛날 같은 감동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아직 노동자이기 때문이지요. 모두를 적당히 감동시킬 수 있는 시들보다 노동자들이 읽었을 때 더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는 시가 노동자들에게는 더 좋은 시다라는 논리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물론 박노해 이후 '정형화된 표현에 정형화된 감동'을 강요하는 수많은 박노해 스타일의 노동시 아류작들이 쏟아져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박노해의 책임이 아니지요. 나아가 그 논리를 더욱 극단적으로 전개해서 '노동 계급의 당파성'에 복무하는 시들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는 해괴한 '스탈린주의적 시'들이 범람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역시 초기 박노해의 책임은 아니지요. (후기 박노해의 시들에는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뭐 제가 박노해 시인의 팬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이성복 시인의 초기 시들을 가장 좋아하니까요.
2. '노동 계급의 당파성'에 복무하는 시들이 가장 좋은 것이다
질문 하나 : 1과 2의 명제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질문 둘 : '은유적인 진술은 시적 울림이 있지만, 구체적인 진술은 유치하다는 감상법'--> 제가 이렇게 주장했다는 얘기인가요?
질문 셋 : 솔직하게 그 시(전라도 7)를 시적 품질이라는 시각에서 혹평하자면 김수영의 '풀' 이후로 수없이 양산된 민중시 아류작들의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전라도 7'이 김수영의 '풀'의 아류작이라면 그렇게 보시는 기준이 있겠지요. 그 기준을 듣고 싶습니다.
질문 하나 - 이미 님께서 '자신을 속이는 몰입'이라는 말로 그 차이를 설명하시던데요;;
질문 둘 - 저는 그렇게 읽혔는데 제가 지레 짐작으로 오독했다면 죄송합니다. 박노해의 시는 카탈로그에 불과하다는 말씀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켰나 보네요.
질문 셋 - 대부분 민중시들의 창작 방식이 민중적 의미를 드러내는 상징물(흙, 땅, 눈물, 어미,풀 기타등등)을 찾아 내서, 그 상징물과 관련한 이미지들로 자신의 관념을 최대한 은유적으로 재구성하기입니다. '전라도 7'은 그런 창작 방법을 매우 충실하게 따른 시이고, 그런 창작 방법의 효시로 김수영의 '풀'을 든다는 말씀입니다.
전 이 시인의 시가 좋더라고요...뭐랄까 너무 고함치고 너무 따지고, 너무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도다리를 먹으며 -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에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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